어떻게 살아야 거듭나는 것입니까?
1.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거듭남의 첫 걸음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인성(人性)이라는 성품(性稟-타고난 70% 물로 형성된 체질)이 바꾸어져야 됩니다. 자신의 성품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하면 회개(μετάνοια)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는 강한 의지로서 자신의 못된 성품을 바꾸지 않으면 거듭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헐벗고 부족한 모습을 보게 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자신의 못난 성품이 무엇인지, 그러한 성품으로 이뤄지는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못된 성품이 얼마나 악한 죄를 만들고 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aϒαπή)은 준행하지 않으면서, 사랑(φιλέω)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자기의 옳지못한 인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단단하고 딱딱한 육신의 자아라는 껍질을 녹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aϒαπή)은 어떤 사랑(φιλέω)과도 또는 누구의 사랑(eντιμοs)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사랑이지만 인간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관계인 어머니의 사랑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하여 가장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내는 긍휼과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에게 구주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깨닫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구원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에게 많은 사건이나 어려운 고난이나 고통 등을 허락하십니다.
아무런 시련이나 재난같은 것이 없이도 자기의 잘못됨에 대한 사실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연약한 우리는 어려운 시험이나 고난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인성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러한 잘못으로 인한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볼수 있는 눈이 뜨이면서 못된 성품을 알게 됩니다. 고난과 고통을 통하여 비로소 영적인 눈이 떠진 인간이 사랑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존재는 다른 이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 곧 못된 인성을 바꾸지 못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에서 비쳐지는 빛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당신 앞으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저항하지 않는다면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를 슬퍼하는 가운데 십자가 밑으로 인도함을 받으면서 ‘나’라는 존재가 어떤 인성을 갖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계속해서 주님을 슬프게 하는 인성, 배은망덕한 삶으로 반역하며 살아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십자가 아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하려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귀중한 선물을 모독해 온 자신의 행동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죄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어달고 못을 박으며 옆구리를 찔려서 물과 피를 흘리게 한 못된 습관, 못된 습성을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어둡고 깊은 수령에 빠진 채 하나님과 분리된 채 살아온 자신의 생에서 지독하고 악한 성품에 대하여 처절하게 슬퍼하게 됩니다.
자신의 인성이 죄가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통렬하게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듭나야 할 필요성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성품을 바꾸려 하질 않기 때문에 물로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비뚤어진 인성으로 인한 영적상태에 대하여 고뇌하고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은 거듭나는 첫 번째 과정(성품의 변화)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접촉하는 카페를 통해서도 많이 볼수 있습니다.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 때, — 가시돋친 글, 비이양 거리는 글, 질문을 한다면서 자기 주장에 답하는 글, 공격적인 글, 자기 전공이 무엇이라며 올리는 글, 현직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으려는 글, — 등에서 그 사람의 인성을 글에서 볼수 있습니다. 인성적인 자만과 자족감 속에 빠져서 자신의 못된 성품으로 인하여 죄됨을 절실히 느끼지 않거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거듭나는 첫 번째 과정(성품의 변화)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들어갈 준비조차 되지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상태에 관하여 깨닫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성품 또는 체질)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처절한 절규로 외치는 사람만이 거듭나는 첫 번째 과정(성품변화)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발아라.(행3:19)
자신의 옳지 성품을 감추려하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깨닫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뉘우치고 자복하며 회개하는 생으로 전환하는 기회를 체험하게 됩니다. 회개란 “μετάνοια”는 못된 성품을 슬퍼하고 그 죄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행위가 수반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성질이나 습관이 너무 싫어서 다시는 그러한 성질, 곧 인성으로 짓고 싶지 않은 상태에 이르는 것을 회개라 합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앞에서 자신의 잘못된 인성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기로 작정하심을 깨닫게 합니다. 또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고 나라는 죄인을 구원하려고 모든 것을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깨닫게 하십니다. 죄인인 자가 십자가를 주목할 때에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 곧 인성이 통회하는 생각을 일어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쳐다보고 주목할 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고통의 소리가 올라옵니다. 그 소리는 자신의 악한 성품이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죄를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악한 인성을 본 사람만이 “죄가 무엇인데 죄를 범한 ‘나’를 구속하려고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됩니까? 하고 부르짖게 됩니다. 죄의 악한 인성을 절실하게 깨닫는 그때에, 비로소 마음은 회개와 통회로 녹아내립니다. 그 악한 인성의 죄가 다시 반복하기 싫을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죄의 악한 성품이 몸서리치도록 싫어지고 그 죄로 돌아가지 않는 생이 진정한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과거의 죄 된 인성으로 살아가는 생애를 청산하게 하고 새로운 태어남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입니다.
3. 생애에 나타나는 것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5~26)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거듭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가식든 진실이든 간에 거듭남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진정한 거듭남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거듭남을 마치 감정적인 황홀감이나 성령님의 감화의 역사를 뜨겁게 경험하는 감정적인 어떤 느낌쯤으로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거듭남을 동사로 ‘aναϒεννάω’이며 수동태입니다. 그 뜻은 ‘다시 낳다’ ‘거듭나다’이므로 스스로의 의지로서 자기 인성을 바꾸어야 됩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말합니다(고후5:17). 이전의 모든 죄된 옛 생애, 옛 습관, 옛 성질, 죄 된 과거의 생애를 청산하고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바꾸어진 인성으로 주님과 합하여 새로운 생활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이론이나 자기 지식을 부각시키는 인격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인격자를 말합니다.
옳지 못한 자신의 성품을 보고 마음으로 아파하고 통회하고 회개할 때, 나는 없어지고 주님만 나타납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나 과거에 답습하던 습관을 반복하려는 마음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십자가의 은혜가 감사하고 하늘로부터 빛이 마음에 들어오게 됩니다. 자신을 두르고 있던 죄를 생산하는 성질과 심정의 껍질과 굴레가 깨어지고 자아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굴복될 때, 성령님께서 그가 노력하는 의지적인 변화의 분량에 따라 심령에 새로운 생명을 낳게 하십니다. 회개와 예수님의 보혈의 용서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성질을 바꾸며 살 때 그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새 생명을 나게 해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지적으로 지속시키며 자기 인성을 바꾸며 나아가야 합니다. 죄를 생산하는 신성의 결과를 뼈아픈 고통을 겪으며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겸손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바꾸어집니다. 통회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자기의 인성이라는 성품을 굴복시킬 때 마음속에 새로운 능력이 점령합니다.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성취할 수 없는 신비한 변화가 일어나서 인간의 본성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져다주는 성령의 역사를 “성령으로 거듭남”이라 부릅니다.
이런 결과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속에 더럽고 비열하고 가증한 인성이 바꾸어진 후에 하나님의 법이 지배하는 신비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구성시키는 물인 인성이라는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하고, 마음의 본바탕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쓰입니다. 외형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생애가 아니라, 마음이, 곧 인성이란 성품이 바꾸어지면 저절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지키게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생활에 변화가 생깁니다. 이렇게 되기에는 먼저 물로 거듭나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성경은 교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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