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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십자가와 성경을 치우겠습니다"

"교회에서 십자가와 성경을 치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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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윤여문 기자]
9일부터 13일까지 부활절 휴가기간을 맞고 있는 호주에서 성경책과 십자가가 교회로부터 홀대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민의 73%가 기독교인인 호주는 크리스마스와 함께 부활절 축제를 전 국민적 축제로 치르는 곳이다. 그런데 부활절 이브였던 4월 9일, 로열노스쇼어 병원 소속 교회에서 십자가와 성경책 등 기독교 관련 심벌들을 전부 치워버린 것.

병원 측은 "다양한 신앙을 가진 타 종교인들에게도 채플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해 시대적 변화에 조응하자는 뜻"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으나 일부 기독교인들은 "채플에서 십자가와 성경 비치를 금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모독"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십자가가 사라진 로열노스쇼어 교회의 안과 밖.


ⓒ 윤여문


기독교인들의 반발 "십자가도 없다니... 교회가 아니라 창고잖아"

뉴스를 접하고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도미니크 로페즈 시장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모스만 지역의 시장이다. 그의 아내는 그 병원에서 유방암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채플을 더 이상 성스런 장소로 부를 수 없게 됐다"고 화를 내면서 "아내가 이 병원에서 유방암 투병을 하는 동안 나는 자주 채플에 들러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를 올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서 "십자가도 없는 교회는 창고나 다름없다. 이런 식으로 가면, 나중엔 공립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캐럴도 못 부르게 할 것"이라면서 "이거야말로 기독교에 대한 역차별이고, 인종 간의 화합을 거스르는 잘못된 결정"이라고 성토했다.

그러나 병원 측 대변인은 "병원을 찾는 환자들 중에 기독교인이 절대다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채플을 찾는 환자는 아주 소수"라면서 "채플은 텅 비었는데 타종교를 믿는 환자들은 다락방 같은 곳에서 묵상한다"고 항변했다.

병원 대변인은 이어 "이번 조치의 결과로 채플이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 모두를 환영하는 '멀티 신앙'의 공회당이 됐다"면서 "기독교도 시대적인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열노스쇼어병원은 이번 조치를 취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보거나 기도를 하고 싶으면 교회보관함에 있는 십자가와 성경을 꺼내서 활용하면 된다"면서 "그러나 예배나 기도가 끝나면 타 종교인들을 위해 십자가와 성경을 보관함에 넣어 달라"는 채플사용지침을 공지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공립병원을 관장하는 델라 보스카 뉴사우스웨일스 보건장관까지 "종교문제는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사안이지만 실상을 파악해보겠다"며 사태 진정에 나섰다. 그러나 정작 상황을 진정시킨 것은 호주이슬람친선협회였다.





로열노스쇼어 교회 내부. 십자가가 놓인 모습과 사라진 모습.


ⓒ 윤여문


이슬람 지도자들 "십자가 있어도, 무슬림은 기도할 수 있다"

로열노스쇼어병원의 조치를 가장 크게 환영할 것으로 예상됐던 이슬람교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이번 사태가 몰고 올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여 즉각 지도자 회의를 열어 다음과 같은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1968년에 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엔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채플에 십자가와 성경이 비치됐을 것이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전통은 존중되어 마땅하다. 무슬림들은 예수를 '신의 사람'(Man of God)으로 추앙하기 때문에 십자가 아래서 이슬람 예배를 올려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이슬람 지도자들이 굳이 이런 성명을 서둘러서 발표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오해를 사전에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자세한 정황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이 병원 당국을 압박하여 이번 조치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공격해올 것이 두려웠던 것.

케이사르 트라드 협회 대변인은 교회를 방문해 "채플에 십자가와 성경이 있는 건 당연하다, 이슬람교 신자들은 그냥 기도만 드리면 된다"면서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이슬람 지도자들의 뜻을 전달했다. 이어 10일 아침, < 채널7 > 에 출연하여 "이번 조치는 무슬림의 요구사항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시드니 시내에 있는 이슬람 모스크.


ⓒ 윤여문


병원당국의 오버? 멀티종교 공존법 시도?

이 사태를 두고 언론이나 종교인들은 대체적으로 '병원 측의 오버'였다고 보는 분위기다.
4월 9일자 < 데일리텔레그래프 > 는 '병원당국의 겁에 질린 부활절'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병원측의 조치를 비판했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에만 관심을 갖는데, 병원 측에서 지레 겁을 먹고 십자가와 성경을 치우도록 조치했다. 타종교 신앙인들이 거부감을 느낀다는 이유인데, 사실은 그런 조치 자체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

< 호주연합교단(일부 개신교 연합체) > 의 그레고어 핸더슨 목사도 "이번 결정은 난센스다. 이 교회가 정말 멀티 신앙을 위한 공회당이라면 십자가나 성경이 있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다"면서 "같은 맥락으로 채플에 타종교의 상징물이 있어도 호주연합교단은 개의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한편 < 호주크리스천로비그룹 > 의 짐 왈라스는 "병원당국이 도를 지나쳤다. 이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기독교인을 위한 공간이었으므로 십자가 등이 설치된 것"이라면서 "우리는 타종교를 위한 공간을 따로 만드는데 적극 협조할 것이다. 그러나 채플은 원래의 모습을 간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호주통계청이 발표한 공식자료에 의하면 호주 국민 중 73%가 기독교인이며, 이들은 가톨릭 27.3%, 영국성공회 23.9%, 개신교 22.8% 순이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예배나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5%미만으로 알려졌고, 그나마 대부분 노인들이어서 호주의 교회나 성당은 텅 비어있는 상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문을 닫는 교회도 늘고 있다.

반면, 1973년 백호주의가 공식 폐지되면서 타종교를 믿는 이민자의 숫자는 급격히 늘었다. 200여 국가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출신국가에서 가져온 다양한 종교를 호주에 전파한 결과다. 특히 이슬람교와 불교 신자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이번 일은 다민족국가에서 발생하는 종교 간의 갈등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 사례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끼리도 부활절 축하 인사 나눈다"






케이사르 트라드 호주이슬람친선협회 대변인.


ⓒ 윤여문


10일 오전 케이사르 트라드 호주이슬람친선협회 대변인을 만나, 이번 사태에 대한 이슬람 쪽의 의견을 더 자세히 들어보았다. 트라드 대변인과는 2005년 12월 시드니 동부 크로눌라 해변에서 발생했던 백호주의 폭동 때 만났던 인연이 있다.

-당신이 시인인 것은 알고 있지만, 지난 크리스마스 때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시를 쓴 카드를 보내줘 깜짝 놀랐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으면 누구의 탄생을 축하하겠나. 예수는 죄를 많이 짓고 사는 인간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 성자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묵상하면서 회개한다."

-그럼 무슬림도 부활절 기간에 특별한 예배를 올리나?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무슬림들끼리 만나면 부활절 축하인사를 나눈다. 나는 최근에 예수 부활에 관한 시를 써서 이슬람교 모임에 나가서 낭송했다. 갈수록 깊어지는 시대의 어둠을 예수 부활의 정신으로 극복하자는 내용인데 큰 박수를 받았다."

-왜 그렇게 시대의 어둠이 깊어졌다고 생각하나?
"현대인의 물질숭배가 심각한 지경에 이른지 오래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다. 물질은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이지만, 인간이 맑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을 도와주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은 영혼과 물질의 가치가 전도됐다."

- < 채널7 > TV 인터뷰 이후 주변 반응이 어땠나.
"놀랄 만큼 큰 반응이 있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게 감동받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 대부분이 "무슬림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고 말하여 오히려 내가 놀랐다. 인터뷰 후에 만난 무슬림들은 "우리의 생각을 잘 전해주어 고맙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슬람교에서 예수의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
"신은 하나다. 다만 사람들이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의 여러 방식으로 신을 신앙할 따름이다. 예수도 신앙의 대상 중의 하나다. 다만 이슬람에서는 마호메트가 '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받은 것'으로 믿고 알라신을 신앙한다."

-로열노스쇼어병원의 이번 조치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는?
"어제 처음으로 그 채플을 가보았다. 언덕 위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였다. 병원 대변인의 말대로 '멀티 신앙'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더욱이 그곳은 환자들과 환자의 가족들이 주로 예배를 보고 기도하는 장소가 아닌가. 거듭 말하지만, 채플 안에 십자가와 성경이 있어도 알라신을 경배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