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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설교/이중표목사님

이중표 목사의 설교분석 Preaching관련자료

이중표 목사의 설교분석 Preaching관련자료  2006/09/20 


출처 =  http://blog.naver.com/sheer67/80028952948 
 
강단의 인습타파: 이중표 목사의 성경해석


I.   성경해석의 틀

현세에서부터 별세를 사는 것을 강조. 별세는 죽은 후의 다른 세상으로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나라, 별세한 사람들이 살고 별세한 사람들이 체험하는 천국이지만 죽은 후에 가는 환상적인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만이 누리는 은혜의 세계.

 

1. 통시적/동시적으로 본 별세신학

 

(1) 통시적으로 본 별세신학

아담은 하나님이 행복을 위해서 만드신 에덴에서 사랑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으나 깊은 잠(죽음)을 잔 후 진정한 에덴(행복)에 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아담의 별세.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통해서 이별 별 자 별세는 했으나 다를 별 자 별세는 하지 못한 채 광야생활을 했다. 몸은 애굽을 떠났으나 마음은 애굽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세상을 떠나는 별세를 하셨고 부활을 통해 다른 세상을 사는 별세를 하셨으며 별세의 은혜를 주시러 오셨다. 예수님이 3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신 목적은 그들을 별세시키시기 위한(마 16:23-24)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보내신 성령을 받아 증인들이 됨으로써 별세를 하게 되었다. 제자들은 자신이 죽고 예수로 사는 별세를 살게 되었고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행 2:44이하). 사도 바울은 자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로 여겼기 때문에 예수로 살고 예수로 만족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살았다 (갈 2:20)

 

(2) 동시적으로 본 별세신학

별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세계인데 성령께서 죽음과 부활 사건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때에 우리가 별세의 사람이 된다. 성령은 별세의 영이고, 증인은 별세의 사람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서 살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별세의 고백(갈 2:20)이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별세의 사람들이 된다.

 

예수님이 별세하므로 모든 사람을 별세시키듯 목회자가 별세해야 교인들을 별세하게 할 수 있다. "별세의 지도자란 `다른 세상의 지도자'란 뜻"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며 세상의 정치,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현세에서 맛본 천국 별세의 지도자로 세움받은 자라는 뜻이다. 목회자가 먼저 별세되어야 교인들도 별세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는 많으나 이 세상이 전혀 변화되지 않는 것은 목사가 별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은 시켰으나 가나안에 인도하지 못한 것처럼 교인들을 세상에서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별세로 살게 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교인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으로 살고 있다.

이중표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진정한 교회성장과 교회 갱신, 교회의 일치와 연합 및 세계화의 비결이 별세신학에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

 


2. 별세신학의 장점

 

(1) 별세신학의 실천

실천하기 어렵고 전하기 어려운 신학을 전면에 내세운 점.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성령 받기 전에 이해하기 어려웠고 바울도 변화되기 전에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당시 유대인들이 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에게 돌아오는데 거침돌이 되는 부분이다. 오늘날도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 유형과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 유형의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고전 1:18-25).

이중표 목사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체험을 한 결과이며 신앙의 용기있는 결단이며 강단과 목회의 인습타파이다. 한국교회로부터 신학과 신앙과 성장과 목회와 삶의 거품을 걷어내고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특단의 조치이다.

 

(2) 별세의 목회

이중표 목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님은 그의 별세를 통하여 우리의 지도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영적인 지도자로 부름받은 자는 별세를 체험해야 한다" "지도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지배자는 살아서 지배하나 순교자는 죽어서 지배합니다."

오늘의 현실은 교인을 통솔하는 당회장은 있으나 섬기는 종의 자리는 항상 비어 있는 상황이다. "최고의 치리는 당회가 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하는 것입니다. 당회하지 말고 십자가 회의를 하는 것이 최고의 치리회입니다. `교회 장로는 죽으라고 세운 것이오. 그래야 자기도 살고 목사도 살리는 것이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목회가 쉽고, 귀하고, 목회하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고백한다.자신이 죽어서 목회하는 목사는 자신도 행복하고 교인들을 부요하고 행복하게 한다. 이런 목회자에게는 주님과 만나는 골방의 행복, 주님과 교제하는 정방(情房)의 행복, 교인들에게 자신을 주는 유방(乳房)의 행복,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치는 사방(死房)의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중표 목사가 주님이 너무 좋아 눈물을 흘리며 성전을 돌고 있는 모습을 한 청년이 숨어서 보다가 가까이 와서 "전도사님, 전도사님, 정신 차리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 때 이중표 목사는 "나는 정신이 온전하다.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해 미쳤다"고 했다는 것이다.

 

당회장의 권위만 내세우는 "몰이꾼"이 아니라 양을 사랑하고 겸손하게 섬기는 "놀이꾼"이 참된 목회자라는 것이다. 구원도 인간고에서의 해방(마 11:28)이라는 의미에서 놀이이고, 삶도 쉼과 자유와 평안이 있을 때 놀이이며, 찬송하며 영광의 세계에 들어가는 죽음도 놀이라는 것이다. 목회자는 진정한 놀이감을 잃어 화투, 술, 춤 등 그릇된 놀이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해 내고 창조적 놀이(re-creation)를 만들어내는 놀이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II.   성경해석자의 태도

 

1. 신학교의 신학에 대한 태도

 

십자가와 부활을 신학의 핵심으로 깨달은 이중표 목사는 신학생 시절 강의시간에 성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종아, 너 무슨 공부를 하니?" "예, 신학 공부이옵니다." "신학이 뭐냐?" "예,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왜 교수한테 배우느냐?" "그러면 누구한테 배울까요?" "나한테 배워야지." "그러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배울 수 있습니까?" "내 멍에를 매고 배워라. 그 멍에는 결국은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예수의 겸손이고, 온유함인데 너도 그 속에 들어가라."

 

이중표 목사가 신학교 시절 시험을 치고 있을 때도 이런 감동이 왔다고 한다. "종아, 너 무슨 시험을 치니?" "예, 신학이옵니다." "왜 신학 시험을 교수한테 치니? 나한테 쳐야지." "하나님, 어떻게 시험을 칩니까?" "아브라함이 어디에서 시험을 치렀느냐?" "예, 모리아산입니다." "예수는 어디에서 치렀느냐?" "예, 십자가상에서입니다." "너도 교수한테 점수 딸 생각 말고 하나님의 점수를 따라." "주님, 알았습니다. 이제 나는 십자가에서 죽는 연습만 하겠습니다."

 

이중표 목사는 60점 넘는 과목이 1/3 정도였고 세 번씩 친 시험도 많았으나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웠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신학 공부는 못했으나 은혜받는 공부를 하여 한신측 교단에서 제일 큰 교회를 섬기게 되고, 그 탓에 `공부를 못해야 목회를 잘 한다'는 무슨 이상한(?) 철학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2. 교단신학에 대한 태도

 

신학의 인습타파를 시도한 이중표 목사는 한신 교단에 대한 소속감을 분명히 하였다. "한국 장로교회를 정통이라는 그러한 교권 안에 가두고서 모든 교회가 바리새인처럼 되어 갈 때 신앙의 횃불을 들고 일어난 분이 김재준 박사요, 이 운동이 기장의 탄생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정통이라는 교리로써 남을 저주하고 징계하면서 그리스도를 교권에 가두어 놓으려는 그릇된 신앙이 오늘도 한국 교회에 바리새적으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되어 가는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끊임없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겸손이 있어야 겠습니다."

 

이중표 목사는 한신에 속한 목회자로서 소위 정통에 속했다고 하면서 바리새적으로 남들을 저주하고 정죄하는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강한 불쾌감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통교리를 강조하고 사수하려고 하는 자들을 다 바리새적인 "회칠한 무덤"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요 속단인 것 같다. 물론 정통 보수주의자들 중에 이중표 목사가 지적한 바와 같은 바리새주의에 빠진 자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한 정통주의자들을 통해서 나오는 주님의 음성도 들을 줄 아는 겸손이 필요하다.

 

이중표 목사는 바리새적인 정통주의자들도 비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인 투쟁에 빠져 있는 목회자들도 비판했다. 어떤 사람은 박정희와 투쟁을 하면서 인권을 운동을 했는데 박정희가 죽고 나니 할 일이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전두환과 싸웠는데 전두환이 백담사로 가고 나니 싸울 일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 때 이중표 목사는 "이제까지 당신의 싸움은 허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정권 잡은 자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정치가들이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정치 문제로 싸워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불의와의 싸움이요 어두움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옥에 가더라도 달라야 합니다. 자기를 감옥에 넣은 자들을 욕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III. 해석된 메시지

 

어느 토요일 오후 갈라디아 2:20을 본문으로 잡고 설교를 써내려 가려고 하는데 원고를 전혀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너는 이 말씀으로 설교를 못한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서 그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수술 후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건강 상태여서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는 것이다. 본래 설교를 신앙고백으로 하던 그로서는 심령 속에 확신이 없는 설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성령께서 이중표 목사는 죽고 그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고백을 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별세의 신앙은 나를 별세의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별세 신앙을 가진 후로는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세속의 시시한 시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중표 목사의 설교는 별세를 실제로 체험한 자로서 신앙고백적으로 하는 설교로서 성경 전체의 사상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될 수 있다.

 


1. 생활 속에서 깨달은 말씀

 

이중표 목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고, 성경을 사랑해야 하며, 성경을 암송해야 하고,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확신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성경적인 성경관(시 1편; 119편; 마 5:17; 딤후 3:16-17; 벧후 1:21; 계 22:18-19)을 밝혔다. 그는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기 때문에 자신은 교수들의 강의는 소홀히 하고 성경만 붙잡고 공부했다고 한다.

 

성경은 영감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성경적인 확신으로서 강해설교의 필수조건인데, 이런 성경관을 가진 이중표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일 하루는 반드시 안식하면서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자녀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주일에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도전하는 것이고, 우리가 내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반드시 하나님에게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중표 목사는 7년 동안 아이가 없던 가정에 아이를 하나님이 주셔서 그 아이가 "아빠 아빠" 할 때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매우 좋아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할 때 밭에 분뇨를 뿌리다가 분뇨를 뒤집어 쓰고 나서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배설물을 여긴다"는 말씀(빌 3:8)을 깨달았다고 한다. 신부들을 가끔 만나면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이중표 목사는 결혼을 하면 설교를 잘 할 수 있다고 했다. 결혼을 하면 신랑 신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중표 목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에 걸려 고통으로 자살하려고 하는 순간 지옥의 두려운 장면, 불 가운데서 고통하는 군상을 보고 선교의 정열에 불타게 되었다고도 했다.

사랑하는 개가 콜레라에 걸렸을 때 병원에서 개 머리에 안수하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개야, 깨끗이 나을지어다"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눈물이 쏟아지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데도 눈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이런 체험담을 읽으면 이중표 목사는 괴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에게 안수 기도하고 개 때문에 성전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동키호테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주님과 민중과 민족을 위한 눈물도 이렇게 헤픈 눈물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개에게 안수하고 돌아와서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동키호테식 체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깨닫는 목회자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네 사랑하는 성도가 죽었을 때 얼마나 울었느냐? 너는 개 목자다. 너는 내 목자가 아니라 개 목자다"는 주님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2. 능력의 말씀

 

이중표 목사는 또한 목회자에게 어머니의 신령한 젖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나 신학과 지식으로는 교인들을 살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가진 자에게 젖이 나오는데 이런 생명의 젖으로 교인들을 살린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특별히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자기를 부정하고 양을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을 가지면 젖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성령의 불은 성령이 감동하는 말씀이다. 이중표 목사는 성경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지만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목회자가 자기거부를 통하여 얻게 되는, 조용히 스며들어 설득하는 능력을 강조했다. 이중표 목사는 시찰회 목회자들과 설악산에 갔을 때 큰 나무들이 벼락을 맞아 쓰러진 것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너도 벼락을 맞아 죽어라. 하늘 벼락은 성령의 불이니라. 성령의 불로 죽어라. 너는 죽어라" 하는 음성이 우레처럼 그를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나는 죽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남들을 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무한한 능력이고 폭발적인 힘을 주신다. 욕망은 성공의 씨앗이지만 말씀은 창조의 씨앗이다. "성령의 능력은 말씀이 잉태됨으로써 솟아오르는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될 때 창조의 씨앗인 말씀이 "레마의 말씀", 즉 나에게 임하여 은혜 받게 하는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이 된다. 표적을 통해서 예수를 증거하거나 설교를 통해서 증거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죽음을 통해서 증거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증거이다. 이것이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며 이것이 있을 때에 교회가 부흥된다.

 

이중표 목사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신비한 기적과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적 능력, 사랑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왕적 능력,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는 선지자적 능력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불어넣는 말씀의 능력과 일치시킨 것이다.

 

루와 나이다(Louw & Nida)의 <의미영역에 기초한 신약 헬-영 사전>에 보면 `레마'는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에 주요 초점을 두고 진술되거나 말해진 것"으로 되어 있고 `로고스'와 `레마'는 스타일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상 차이가 없다. 베드로전서 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를 중생하게 한 살아 있는 말씀, 즉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에게 중생의 능력을 준 말씀이 `레마'로 되어 있지 않고 `로고스'로 되어 있다. 베드로전서 1:25에 같은 문맥에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할 때에 `말씀'은 `레마'로 되어 있다. 베드로전서 1:23과 1:25의 `말씀'은 문맥상 전혀 차이가 없는 말씀인데, 앞에서는 `로고스', 뒤에서는 `레마'로 표현되어 있어서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4:4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되어 있는데, 내게 부딪혀 와서 생명이 되는 일부의 말씀이 아니라 "모든 말씀"이 다 `레마'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로고스'이고 그 말씀 중에 성령의 능력으로 특별히 내게 부딪혀 오는 것이 `레마'라는 구분은 용어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중표 목사의 레마와 로고스 구분이 사전적으로, 성경 용례상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중표 목사가 지적한 대로 성령의 불을 받으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씀의 능력을 받는 것은 사실이고 말씀 증거자는 다 이런 능력을 받아야 효과적으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행 1:8). 모든 설교자들은 설교를 예술적으로 미화하고 웅변적으로 강화하려는 유혹을 받기가 쉽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의 지혜로 치장된 말씀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여 신자들의 믿음을 사람의 지혜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두려고 하는 (고전 2:1-5) 이중표 목사의 능력 선포의 시도는 마땅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강단의 인습타파인 것이다.

 


3. 탈문맥적 성경적 메시지

 

이중표 목사는 또한 시편 55:1-8에 근거한 "신앙의 날개"란 제목의 설교에서 신앙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날개라고 전제하고 (1) 날개를 움직이는 능력은 기도와 주님을 섬기는 것과 신뢰와 순종이며, (2) 신앙의 날개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신앙의 날개를 움직이지 않고 신앙의 날개가 퇴화하고 날개가 거미줄과 새 덫에 걸리는 것이며, (3) 하나님은 성도들이 신앙의 날개를 움직이도록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보금자리를 흔드심으로 역사하신다고 했다.

 

이중표 목사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7)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강도는 사탄이며 주막은 교회이고 주막집 주인은 목회자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어서 주막집 주인은 음식을 만들어 주고 쉬게 하고 성령의 새술을 마시게 하며 길을 안내해야 한다고 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자비를 베풀라는 핵심교훈을 전달하는 이야기 비유로서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로, 강도를 사단으로, 주막을 교회로, 주막집 주인을 목회자로 해석할 근거가 본문 문맥에 전혀 없다. 이중표 목사의 이런 풍유적 해석은 본문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다.

 


IV. 성경 해석자의 생활

 

1. 강해자의 별세

 

이중표 목사는 어떤 목사는 자기의 교회는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순교자적 각오와 정신으로 교인들과 싸우고 40일 금식기도 한 사람이 자신의 총대에 떨어졌다고 문짝을 차버린 사건을 언급하면서 목회자가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파해야 목회가 시작된다고 했다.

 

이중표 목사도 처음에는 연로한 교인들과 싸웠다고 한다. 목사 때리고 목사를 쫓아내는 권투선수가 장로와 권사이므로 장로와 권사의 별명을 권투선수라 붙였다는 것이다. 특별히 어느 늙은 교인 때문에 목회가 너무 힘들어서 이중표 목사는 "내가 죽고 다른 목회자는 편안히 목회하게 만들어야지" 하는 기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어디로 보내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 버릇을 고칠 수 있도록 내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아무리 기도해도 자신이 원하는 응답이 없었는데, 어느 날 주님께서 감동하셔서

 "종아, 그 사람의 버릇을 고칠 작정이냐?"고 질문하셨다.

"기필코 고칠 작정입니다."

"그만두어라."

"주님 왜 그러시옵니까?"

 "나도 못고쳤다. 나도 못고쳤는데 네가 고치려고 하느냐? 그러면 네 명대로 못산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도 못고쳤는데 네가 왜 고치려고 시비하느냐? 종아, 그 사람이 천당 갈 것 같으니, 못갈 것 같으니?"

"믿음으로 천당에야 가겠죠."

 "그럼 천당 가는데 내가 데려갈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 사람이 버릇을 고치든 안고치든 내가 데려갈테니 너는 열받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라. 그리고 그 사람과 싸우지 마라. 싸우다가 네가 쓰러진다."

"종아, 네가 의로워서 천국 가니, 내 은혜로 가니?"

 "예, 주의 은혜로 갑니다."

"그 사람이 천국 가는 것도 내 은혜로 갈 것이니 내버려두어라. 나도 그 사람을 못고치게 생겼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내가 피흘려 죽었다. 내가 고칠 수가 있다면 나는 안죽었다. 도저히 못고칠 것을 알기에 나는 죽어야 했느니라. 그 사람은 못고친다. 도저히 못고친다. 금식시켜도 안된다. 종아리 때려도 안된다. 의로워서 데려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단다. 의인은 없나니 모두 죄인이다. 그래서 내가 죽었느니라. 너도 고쳐서 데려갈 사람이 아니다. 다만 십자가의 피로 덮어서 의롭다 인정해서 데려갈 뿐이다."

 

이중표 목사는 도무지 못고칠 버릇을 가진 신자와 싸울 때에 주님으로부터 그와 자신을 동일시 하고, 다 죄인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다. "은혜를 받고 장로를 보니 `어쩌다가 나와 함께 장로가 되었소? 고맙소. 짧은 인생길에 큰 은혜로다.' 그래서 손을 잡으면서도 눈에서 눈물이 나옵니다. 참 신비한 일입니다."

 

이기는 방법이 무엇인가? "이미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철저하게 고백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을 피하여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없는 것을 아시고 끊임없이 연단하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사경을 헤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서 심방 안간다고 전도사에게 호통을 쳤습니다...퇴원해서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어느날 도저히 설교 준비를 할 수 없고 기진해서 성전에 가서 앉아 있는데 주께서 감동을 주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 말씀은 수없이 읽고 외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가슴에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2. 가정의 별세

 

이중표 목사는 처음에는 목회를 위하여 가정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후에 별세의 신비를 알고 난 후 가정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가정을 멀리하고 금욕적인 길로 갔다. 날마다 교회에서 살고 싶었고 무엇이든 가난하고 헐벗은 자에게 나눠 주고 싶었다. 사모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집을 떠나야만 했다. 교인들이 사모를 위로하여 집으로 돌아오게 하면서도 "우리 목사님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남편으로 생각한다면 나도 같이 안 살겠다"고 했다. 따라서 가정에는 행복이 없었다.

 

그러나 후에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정은 별세의 신비를 체험하는 삶의 현장이고 아내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이중표 목사는 아내는 최고의 교회라고 보고 "유형의 교회보다 아내의 작은 교회를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녀에 대해서도 자녀를 제자로 삼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로 양육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3. 물질의 별세

 

이중표 목사는 목회자는 물성화되는 우리 민족을 비인간화에서 건져내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처럼 민중과 함께 하는 예로 성철 스님을 들었다. 성철 스님은 탐욕에서 해방을 선언하고 가사(袈裟: 法衣) 한 벌로 일생을 살다가 감으로써 중다운 중이 되었고 민족과 민중의 지도자로서 큰 별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큰 사찰의 주지가 되는 것도 싫어했고, 사찰을 건축하는 일에도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암자에 들어가면 그곳에 큰 절이 세워졌습니다. 그가 토굴에 들어가면 그곳이 큰 절이 되었습니다. 큰 사찰을 지어 큰 스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큰 도를 깨달아야 큰 절이 된다는 것입니다. 큰 스님은 영원히 살아 있는 절이 됩니다."

 

이중표 목사는 성철 스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난 다음 아무 유보나 주의가 없이 "이 위대한 정신을 이 종은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가 예수님을 배운다면 얼마나 교회와 사회가 달라질까요"라고 했다. 목회자가 예수님을 본받아 물성화와 탐욕에서 벗어나고 소외된 자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좋지만 마치 성철과 예수님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음으로써 성철 예찬 같은 예화를 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중표 목사는 `성철 스님이 예수님을 통한 영생의 길을 알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지만 탐욕에서 벗어난 일생을 살아간 것은 훌륭하다'고 하는 식의 유보 조항을 제시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중표 목사의 스타일을 고려할 때 이런 식의 유보조항은 전제한 채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 성철 예찬 같은 말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보인다.

이중표 목사는 자신이 죽으면 장기를 기증하고 재산은 모두 주의 것으로 드리고 화장을 하여 별세동산에 뿌림으로써 무덤을 남기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해도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신령한 몸으로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을 고백했다. 그러면서 어느 교회 묘지에 목사는 큰 무덤에 누워 있고 성도는 작은 묘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덧붙였다.

 


V.   성경해석자의 눈물

 

1. 주님의 눈물

 

이중표 목사는 시골에서 전도사로 봉직할 때 4시에 새벽종을 치면서 "주님, 이 고을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어둠에 잠든 이 백성들을 깨우시고 새벽을 알려 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환상 중에 보였다. 이중표 목사가 종줄을 놓고 엎드려 "주님, 왜 우시나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내 종아, 지금까지 너의 많은 눈물은 너의 눈물이 아니고, 내가 네 안에서 흘린 눈물이었다"는 응답이 들려왔다. 주님을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 (눅 19:42-44). 자신을 통해서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의 영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는 자들을 보시고 깊은 우정의 눈물을 흘리셨다 (요 11:33-35).

 

어느 날 고난주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교회당으로 간 이중표 목사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하루 종일 금식하다가 제단 가운데 있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너를 위하여 이 몸을 버려 피흘려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버렸느냐?" 하는 주님을 음성을 들었다. 그 때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마루바닥을 적시도록 울었다고 했다. 그 후로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흘러내린다는 것이다.

 

이중표 목사가 고부의 거리를 걸으면서 우니까 평소에 그를 아는 송옥순 할머니(후에 집사)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고부 고을 사람이 죽어서 운다니까 누가 죽었느냐고 되물었다. 할머니의 손목을 잡고 할머니의 영혼이 죽어서 슬피 우노라고 하며 전도받게 한 일이 있었다.

 

교인들이 이중표 목사는 사랑하는 마음이 이 목사를 울게 하고 그 울음이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게 한다고 했다. 따님으로부터 받은 차비를 아끼기 위해 8km를 걸어오신 권사님이 목사를 위한 음료수 한 박스를 사 들고 오셔서 사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모님, 내가 목사님을 생각하면 살을 깍아서 드려도 아까운 것이 없지만 이것을 드립니다"라고 했다. 이중표 목사가 설교를 쓰고 있는데 아내가 그것을 가지고 와서 권사님의 그 말을 전했다. 그 때 이중표 목사에게 성령이 "종아, 이것은 피의 향유다"고 감동하셨다. 이중표 목사는 그것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서 "주여, 받으소서! 이것은 성도의 피의 향유입니다. 이 종은 마실 수 없사오니 주여, 받으시옵소서" 하고 엎드려 기도했다. 주님은 "종아, 목사는 교인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니 네 살과 네 피는 네 교인들의 것이요, 너는 교인들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감동해 주셨다.

 


2. 민중의 눈물

 

이중표 목사가 계급투쟁적 개념으로서의 투쟁자 민중이 아니라 "가난하고, 천대받고,  소외당하는 변두리 인생들"이라는 의미로 민중을 사용한 것은 다행이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민중'은 가진 자들, 즉 제도권에 대하여 폭력적 방식이나 비폭력적 자기초월 방식으로 투쟁하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이중표 목사는 그런 의미로 `민중'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예수님도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소외된 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셨고 그들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킨 것이 사실이다 (마 25:14-30). 이중표 목사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민중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고, "권력과 금력의 실오라기 같은 줄을 타고 민중의 피를 흘리게 만들고, 채찍을 몰아치는 인간들이 지구상에 있다면 무덤의 돌들의 외침을 들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3. 민족의 눈물

 

예수님이 동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신 것처럼 지도자는 자기 민족을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눈물을 민족주의의 애국 감정이 아니라 민족의 구원을 바라보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민족의 제일 큰 원수는 죄이기 때문에 민족을 죄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눈물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우리에게는 분단된 민족의 현실을 애통해 하며 민족을 구원하려는 눈물이 있어야 한다. "무기 아래 세운 나라는 망할지언정, 무릎 아래 있는 나라와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은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심판이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민족의 구원과 일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중표 목사는 민족의 가슴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심고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도록 하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했다.

 

이중표 목사는 신자들이 민족의 구조악 척결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본 회퍼가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한 것을 예로 들었다. 본 회퍼는 목사가 어떻게 암살단에 가입했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술 취한 운전자가 버스에 선량한 시민들을 태우고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을 때 나는 목사가 사고가 난 후에 장례식이나 치르는 경건한 목사가 되는 것보다?_미친 운전자의 핸들을 빼앗아 선량한 시민을 위기에서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중표 목사는 본 회퍼의 예를 들고 난 후에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등 모든 분야가 구조악으로 썩어가는 현상을 보면서 기도드려야 하고 또한 이 악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내놓은 결단도 있어야 합니다"고 했다.

 


VI. 성경해석자의 커뮤니케이션

 

와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는 `우측 뇌'(right brain)는 예술적인 패턴과 형상, 시와 그림 등과 같은 창조적인 것에 발달되어 있고 `좌측 뇌'(left brain)는 언어와 숫자와 과학 등 인지적이고 논리적인 것에 발달되어 있다는 심리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설교자는 `좌측 뇌'보다 `우측 뇌'를 많이 사용하고 사람들의 `우측 뇌'를 겨냥해야 한다고 했다. 위어스비는 아히도벨의 말(삼하 17:1-3)과 후새의 말(삼하 17:7-13)을 비교하면서 아히도벨은 `좌측 뇌' 방식을 사용했고 후새는 `우측 뇌' 방식을 사용했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말은 듣는 데 그쳤으나 후새의 말은 보고 느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이중표 목사의 커뮤니케이션은 `좌측 뇌'보다 `우측 뇌'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중표 목사의 설교는 논리적 인지적으로는 더러 결함이 있으나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행동하도록 하는 데는 굉장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1. 무형식의 형식

 

이중표 목사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23)는 설교를 마무리할 때 "오늘 이 시간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신 교회 성도들이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했다. 목회자들이 설교를 마무리 할 때 "...바랍니다"는 식으로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중표 목사는 "...묻고 계십니다"는 식으로, 즉 마무리가 안된 것 같은 방식으로 마무리 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전통적인 형식을 탈피한 설교 형식을 택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 충격 스타일

 

"목사는 천국 배우와 같습니다. 강단이 무대입니다. 목사는 천국을 보여주는 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배우로서 훌륭한 연기력이 있어야 합니다. 얼굴 표정으로부터 손의 움직임 전체의 행동까지 예수의 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중표 목사는 진실을 생명으로 해야 할 목사에게 사실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느끼도록 연기하는 배우 개념을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이다.

 

"목회는 설교하는 것이나 심방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자신이 죽어서 교인들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감해야 합니다. 강단에 서서 교인들을 볼 때 `내가 저 속에 죽어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생각, 이것이 곧 어린 양에에 젖을 먹이는 것입니다." 목사가 죽는 것도 충격적인 표현인데, 게다가 죽어서 교인들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여 마치 귀신이 되어 들어가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과 함께 충격적인 감동을 주는 표현이다.

 

"신부는 신랑에게서 골방의 사랑을 받습니다. 몸을 받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신부는 유방이 커집니다. 그리고 신랑에게서 나온 자녀들을 먹일 수 있는 사랑의 젖이 나옵니다...사랑하는 님이 젖을 만지면 그 속에서 신령한 젖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중표 목사는 사랑하는 남녀가 너무 사랑하여 "이승에서 사랑을 이룰 수 없기에 죽어 저승에서 우리 혼이라도 함께 살고자 죽노라"고 하는 동반자살을 소개한 다음 아무 유보나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고 바로 "순교는 현세에서 예수를 사랑하며 살 수 없기에 내세에 주님과 사랑하며 함께 영원히 사랑하고자 기쁘게 죽음을 택하는 것"라고 연결시켰다.

 

 이것은 순교를 주님을 사랑하여 기쁨으로 죽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는 좋으나 동반자살을 미화하고 순교를 동반자살과 직결시키는 듯한 인상을 넘겨 놓았다. 청중 가운데 이런 식의 오해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겠지만 만약 그런 자가 일어난다면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이중표 목사는 한국 교계의 인물들을 연구하면서 큰 인물들은 다 큰 강물을 마신 자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경직, 김창인, 박조준, 김선도, 곽선희 목사는 대동강 물줄기를 마시고 자랐고 김재준, 강원룡, 안병무, 문익환 목사는 두만강 물을 마셨으며 이종성, 이상근 목사는 낙동강 물을 마셨다. 그런데 이중표 목사 자신은 짧은 만경강 물을 마시고 자랐기 때문에 키도 작고 큰 인물이 되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에게 "종아, 낙심하지 마라. 대동강 물줄기가 길다 한들 얼마나 길겠으며 낙동강이 길다 한들 얼마나 길겠느냐? 진짜 긴 강수, 성령의 강수를 마셔라...그 강수가 그대 가슴에 흘러 들어갈 때 하늘도 땅도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국경을 넘고, 세계를 넘어 큰 인물이 되리라"는 감동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중표 목사는 이런 관찰과 표현을 통해서 마치 풍수지리설이나 미신을 전하는 듯하게 출발함으로써 청중을 놀라게 하다가 성령의 강수를 소개함으로써 충격적인 감동을 준 것이다.

 

이중표 목사는 밥상목회(마 26:26-29)라는 제목 하에서 밥으로 오신 예수님, 성찬은 예수님의 밥상, 밥을 먹은 자의 삶, 밥값을 하며 사는 삶, 밥의 능력으로 사는 삶, 밥이 되는 삶, 밥상 공동체의 실현, 밥상은 사랑의 현장, 밥상에 앉아 줄 사람, 밥상을 나누는 신비, 교회는 세상의 밥, 밥맛 나게 하는 자, 세상의 밥이 되기 위해서 죽어야---이런 식으로 말씀을 전개했다.

 


3. 위트와 유모어

 

설교에 유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자칫 지나친 유모어를 사용하여 문제를 실수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놓고 웃긴다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죽음, 심판, 천당, 지옥 등 엄숙한 실재를 놓고 웃기는 것은 그런 주제들을 가볍게 여기게 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중표 목사는 위의 충격적인 스타일에서도 가끔 드러난 것처럼 지나친 해학을 사용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적으로 적절한 위트와 유모어 감각이 뛰어난 목회자라는 점은 다음의 예들이 확실하게 보여준다.

 

"물건 중에도 가치 기준에서 보면 `상품'이 있고, `작품'이 있습니다. 상품은 비교가치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작품은 비교할 대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존재로 유일성을 지니므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유모(乳母)입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양모(養母)입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식모(食母)입니다."

"온순은 출생으로부터 받은 성품이요, 온유는 중생으로 받는 성품입니다. 온순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인간성이요, 온유는 감추어진 속사람의 마음입니다. 온순은 사람의 뜻을 따르는 마음이요, 온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하늘 같이 알아라.' 그런데 천사 같은 아내라야 남편을 하늘처럼 섬김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사는 곳이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같은 아내가 어떻게 하늘을 만나겠습니까?"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쉬지 못합니다. 자기 가슴에서 빠져 나간 갈비뼈를 찾아서 만나야 안정이 됩니다. 집에 오자마자 남자들은 갈비뼈부터 찾습니다. `네 엄마 어디 있니?' 하고 찾아갑니다. 엄마가 없으면 집에 오자마자 나가버립니다. 아내가 없으면 헤매게 됩니다. 자기 짝을 찾기까지 남자들은 온 세상을 헤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아내들은 자기 남편을 고향으로 삼고 `나의 살던 고향은 남편의 갈비뼈'라고 생각하고 `여기가 내 고향이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목회에는 세 가지, `고역' `교역' `성역'이 있습니다. 고역은 죽지 못해서 하는 것입니다. 교역은 목회를 하나의 직업으로 알고 하는 것입니다. 성역은 주님을 사랑하는 행복한 마음으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당회만 마치고 나면 얼굴이 벌겋게 됩니다. 은혜 받아서 벌건 것이 아니라 열 받아서 벌겋게 됩니다."

"어떤 분은 죽을 때에 수십억의 재산을 남겨 놓고 죽었다고 말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사실 저는 죽은 후에 온 세상을 다 남겨 놓고 갈 작정입니다."

 

"`오늘 은혜를 많이 받고 싶습니까?' 하면 교인들은 모두 `아멘'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은혜를 조금만 받으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은혜를 조금 받으면 편히 살 수 있지만 많이 받으면 빚진 자가 되어 그 빚 때문에 재산과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는데 그래도 은혜를 많이 받겠습니까?'라고 할 때는 `아멘' 소리가 작아집니다."

 

이중표 목사의 별세신학은 보편성 객관성 절대성 대신에 상대성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후현대주의 상황에서 별세의 복음을 절대진리로 삼고 있다는 면에서 후현대주의에 역류하는 면이 있다. 동시에 고리타분한 커뮤니케이션에 염증을 느끼면서 인습타파적인 스타일에 매력을 느끼는 후현대주의적 분위기에 이중표 목사의 커뮤니케이션은 잘 맞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이중표 목사의 커뮤니케이션은 보통 목회자들이 흉내내기 힘들 정도로 일상성을 깨면서도 보통 사람들을 친근하게 끌어들이는 면, 즉 해체성(deconstruction)과 일체성(identification)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튀는 스타일로 식상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친근하게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스타일로 감동을 주는 것이다.

 


결론


이중표 목사의 별세신학이 성경신학적으로 대속성의 약화와 완성천국의 약화와 원형 공동체의 약화라는 단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핵심으로 하는 별세의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별세의 삶을 체험하고 역설한다는 면에서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중표 목사가 강단에서 행하는 성경해석도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의 틀에는 맞지 않는다. 그의 설교를 엄밀한 의미의 강해로 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성경 전체의 사상과 일치하고, 무엇보다 성경해석자로서의 그의 별세적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접해 있고 근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는 현세와 세속과 타락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교회가 불신세계와 동화되어 불신세상과 거의 같다. 이중표 목사는 이런 상황 속에서 "별세"를 통해 한국 교회의 갱신과 회복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시도하는 회복은 정통과 보수를 통한 거부감 나는 회복이 아니라 참신과 해체를 통한 기분 좋은 회복이다.

 

이중표 목사 자신은 삶을 통해서 복음의 핵심을 깨달은 목회자이다. 그는 죽어서 사는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깨우쳤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이다. 그에게는 복음적인 가슴과 복음적인 가정생활과 복음적인 민족의식이 있다. 그에게는 자기 육정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 즉 자신이 죽는 것이 목회의 최대의 과제라는 확신이 있다.

 

이중표 목사는 이런 복음적 확신을 가지고 21세기를 향해 질주하는 현대인들의 불신과 불안을 제거하고 성경의 복음을 통한 감격과 행복을 창출한다. 현대인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인습타파적인 스타일과 눈물과 삶과 튀는 스타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중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설교집을 읽으면 고리타분한 의식구조가 조금씩 깨어지고 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고리타분한 방식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이중표 목사의 튀는 스타일과 같은 인습타파적인 스타일로 움직이는 데 도움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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