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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설교·8/이동원목사님

[원고]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7)신 광야에서(출 16:1-5)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7)신 광야에서(출 16:1-5)

 

빅톨 위고의 명작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은 불어이지만 영어로 표기하면 ‘The Miserables’이 될 것입니다. 직역하면 ‘비참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어린 시절에는 더 많이 ‘가난한 사람들’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가난이 곧 비참함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용상으로 보면 이 번역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인공 장발장이 가난 때문에 도둑질을 하다가 19년의 감옥살이를 감수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이 작품은 불란서 혁명당시에 처절한 가난의 현실과 싸워야 했던 당시의 불란서 민중들의 삶을 배경으로 탄생한 작품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도 이런 처절한 가난과 싸우던 시절 도대체 ‘인생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존경하던 선생님에게 물었더니 “그것은 자네가 스스로 인생을 경험하며 찾아야 할 해답이네”하시더랍니다. 어느 날 자주 오르던 뒷 산의 산사 스님에게 용기를 내어 물었더니 스님은 “그걸 알면 내가 여기서 이러구 있겠나~나무 관세음 보살”하시더랍니다. 그런데 뜻밖에 어느 비오는 날 이 청년은 포장마차 가게 앞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삶은 계란”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어린 시절만 해도 제일 부러워했던 친구들의 도시락 내용물은 ‘삶은 계란’이었습니다. 내일이면 대통령에 취임하는 이 명박 당선자도 “신화는 없다”라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야간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가장 행복한 추억으로 양재원이라는 친구와의 우정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의 집에는 장 닭 한 마리와 암탉 두 마리가 있었는데 암탉이 매일 알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당선자가가 영양실조로 죽을 것을 염려하여 몇 달간 매일 계란 하나씩을 자기 집에서 몰래 가지고 와서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암탉은 두 마리인데 알은 하나밖에 낳지 않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그 친구 부모님에 의해 마침내 진상이 탄로가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그러니까 탄로 나기까지의 몇 달간 친구에게 ‘날마다 한 개씩 공급받은 게란’은 일생을 통한 최고의 감동적인 영양제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친구 재원이의 고마운 마음을 잊어 본적이 없다고--아니 그는 앞으로도 그의 고마운 마음을 일생동안 새기면서 살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이 명박 대통령이 이런 계란 하나에 담긴 서민들의 애환을 잊지 않고 국민을 섬기고 우리 민족을 선진화된 미래로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마라와 엘림을 거쳐 행진을 계속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다음 통과해야 할 지역은 소위 신 광야이었습니다. 신 광야는 엘림과 시내산 그 중간 지역의 광야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지도 참조) 그런데 이 광야에서 다시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배고픔이었습니다. 별수 없이 그들은 다시 원망하기 시작했고(Sin 광야가 됨) 그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내리신 처방이 ‘삶은 계란’대신 ‘만나’였습니다. *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 광야에서 내리는 만나의 레슨은 무엇입니까?


1. 우리는 ‘위로부터’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레슨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우리는 소위 사면초가의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동서남북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나갈 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가 바라 볼 곳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일 말입니다. 만나는 바로 그 곳으로부터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리라” 이것은 소위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구약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신약 약1:17의 약속의 말씀을 읽어 보실까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서 내려오나니--”구약의 하나님이 바로 신약의 하나님이시고 구약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고 믿으심이 타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그의 살아 계심의 여부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사느냐, 죽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느냐, 안 믿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인 것입니다. 그래서 4절 마지막 부분에 “--내가 시험하리라”고 그는 말씀하십니다. 마라로 시험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는 신 광야--여기서도 나를 믿고 살겠느냐, 여기서도 나를 믿고 계속 믿음의 걸음을 지속하겠느냐는 시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늘은 열릴 것입니다. 믿으면 만나는 내릴 것입니다. 믿으면 광야에도 기적이 식탁이 예비될 것입니다. 만나는 히브리어로 “만후(man+hu)--이것이 무엇이냐?”는 뜻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웬 은혜란 말인가? 소리치던 그들은 이 신기한 양식을 “이게 뭐냐?”곧 ‘만나’로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오늘도 이 변함없는 위로부터의 은혜가 약속되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은혜는 거둠의 노동을 요청하고 있다는 레슨입니다.


하늘에서 양식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하면 어는 분은 그러면 우리는 지금부터 아무것도 안하고 하늘을 쳐다보기만 하고 살면 되겠느냐고 반문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4절을 다시 주의 깊게 보시면 만나를 약속하시면서도 그는 우리가 할일을 남기십니다. 그것은 ‘거두는 노동’입니다. 다시 4절에 보면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하지 않으셨습니까. 성경의 기독교는 결코 무위도식의 은혜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은혜는 다시 은혜를 믿는 이들에게 노동을 요청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에서 내릴 양식을 믿는다면 이제 광야로 나가서 땀을 흘려 거둠의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둠의 수고 없이 은혜의 양식은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한 것입니다. 참된 성경적 신앙이 심어지는 나라마다 문화가 발전하고 풍요한 삶의 질이 발전하는 것은 바로 이런 근면한 노동의 정신을 성경에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들에게 은혜의 레슨만을 전달해서는 안됩니다. 은혜와 함께 노동의 윤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일방적 복지의 혜택만이 아닌 노동의 책임을 가르치는 사회이어야 합니다. 노동 없이 임금의 혜택만을 요구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새로 출발하는 정부가 참으로 건강한 사회를 구현하도록 기도하십시다.


3. 노동은 안식의 균형을 동반해야 한다는 레슨입니다.


인간의 삶의 지혜는 언제나 균형에 있습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리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신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는 노동을 명하신 하나님은 그러나 여섯째 날로 일단 노동을 종료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제 그들에게 안식이 필요한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노동의 중요성 못지않게 안식의 필요성을 가르칩니다. 하루 더 일하면 그만큼 이익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의 원리를 범하면 우리는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 더 벌었다고 하지만 병원비로, 사고 수습비로, 혹은 법정비용으로 결국은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이 레슨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은 오늘 출16:25에 보면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지도 말아야 하고 거둘 수도 없게 하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그래서 본문 6절에 여섯째 날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섯 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생각해 보십시오. 안식일 전날(평소보다 갑절의 만나를 거둠) 미리 안식일의 축제를 잘 예비하여 안식일은 노동대신 온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안식을 즐기는 날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의 질은 얼마나 아름답게 개선되고 증진될 수 있겠습니까. 6일 동안의 근면한 노동과 제 7일의 안식의 여유로운 균형-이것이 바로 선진 사회의 이상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인 것입니다. 새 정부의 노력으로 이런 사회가 앞당겨 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4. 거둠은 나눔의 책임을 요청하고 있다는 레슨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다 보면 우리는 반드시 일어날 한 가지 현상을 예측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두고 어떤 사람은 적게 거두게 되리라는 것이지요. 16-7절에 보면 실제로 한 사람이 한 오멜(2,27리터)씩 공평하게 거두라고 명하셨음에도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니” 여기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경적 신앙의 또 하나의 가치인 바로 ‘자발적 나눔의 윤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원리가 초대 교회에 이르기 까지 얼마나 소중하게 적용되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신약 고후8:14-15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15절의 말씀이 어디에서 인용된 말씀입니까? 바로 출애굽기 본문 16장이 아닙니까.


많은 만나를 거둔 자들의 자발적인 나눔의 실천이 활성화되는 사회-이것이 또한 우리가 기다리는 진정한 선진 사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과거의 공산주의는 이런 성경적 이상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는 대목에서 정치적 사회적 억압에 의한 강제적 분배를 선택함으로 독재 사회와 전제 국가로 전락해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오늘 이런 자발적 나눔의 감동과 가치를 사회에 심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사회 속에서 질타당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 실천을 소홀히 한 때문이 아닙니까. 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바로 이 실천의 순종을 결단할 때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작년부터 사회 복지 이사회를 벌도로 독립시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역량으로 집중시켜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금년 1월 노인 주간 보호 센터를 개설했고, 기러기 부모와 가정의 새로운 사회적 대안으로 글로벌 홈 스쿨 아카데미를 이미 열었고, 5월 쯤 노숙자 쉼터도 준비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제 나눔의 공동체로서 우리 한 교회만을 키워나가기 보다 같은 비전을 가진 여러 교회들을 개척해 나가는 일입니다. 이 일에 특히 오늘 우리 교회를 방문하신 노스우드 침례 교회 밥 로버츠 목사님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 교회는 이미 100교회를 개척했고, 매년 25교회 개척의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교회 사업가들은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 온 역량을 모아 국내외적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 우리가 얼마나 모았느냐, 벌었느냐는 것은 중요한 질문이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 앞에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나눌 수 있었느냐”, 그리고 우리가 살다간 그 자리에 다음 세대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남길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