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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설교/강영우박사님

고통과 편견·차별을 신앙으로 극복해 재활의 세계적 귀감이 되었던 강영우 박사, 24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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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편견·차별을 신앙으로 극복해 재활의 세계적 귀감이 되었던 강영우 박사, 24일 별세

[2012.02.24 17:18] 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미션라이프] 국내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인 강영우 박사의 별세 소식이 알려진 24일,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과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강 박사는 한국에 올 때 마다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신앙간증을 겸한 기독교육 강의를 펼쳐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신앙적 도전과 감동을 선사했었다.

1944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강 박사는 중학생 시절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맹인이 됐다. 이후 그는 온갖 고통과 사회적 편견, 차별을 기독교 신앙과 굳은 의지로 극복해 재활의 세계적 귀감이 되었다.

그는 서울맹학교 고등부를 졸업하고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 72년 문과대학 전체차석으로 졸업했다. 72년 2월 아내(석은옥 여사)와 결혼하고 그해 8월에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으로 도미했다.

그는 3년 8개월 만인 76년 4월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석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후 교육전공 철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해 한국 맹인 최초의 박사가 됐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교육을 가르치던 강 박사는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을 만들어 한국의 장애인 재활사업과 복지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2001년부터 8년 동안 조지 W 부시 전 미국대통령의 임명으로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역임했다. 또 세계 장애위원회 부위원장, 루스벨트 재단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96년 한국이 루스벨트 국제 장애인상 첫 수상국이 되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미 주류사회에서 우뚝 선 그의 감동적인 생애는 ‘눈먼 새의 노래’란 드라마로 제작됐고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 저서 ‘빛은 내 가슴에’(A Light In My Life)는 수십 개국에 번역 소개됐다. 이 책을 조지 부시 대통령이 감동적으로 읽은 뒤 “당신의 책에는 언어와 문화를 초월해 존재하는 인간의 고귀한 가치들이 있다”는 친필편지를 써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에 출간된 ‘성공적인 자녀 교육법’, ‘교육을 통한 성공의 비결’,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등 13권의 저서는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특히 강 박사는 아내 석은옥 여사와 함께 두 아들을 모두 명문고인 ‘필립스 아카데미’를 졸업시키는 영재로 키워내 화제가 됐다. 큰 아들 강진석 박사는 조지타운의대 안과교수이며 변호사인 둘째 아들 크리스토퍼 강(한국이름 강진영)은 현 오바마 행정부 입법담당 특별보좌관에 발탁돼 눈길을 모았었다.

강 박사는 강단에서 주로 ‘오늘의 도전은 내일의 영광’이라는 주제로 간증했다. 그는 “누구든 큰 고난에 직면하면 이제 나는 끝났다, 기회는 ‘아무데도 없다(nowhere)’고 하며 절망한다”며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며 우리를 인도하고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켜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노 웨어’는 ‘나우 히어(now here)’, 즉 ‘지금 여기에 기회가 있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또 강 박사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감사할 것을 요구했다. “실명은 장애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명에 쓰이는 도구다”라고 선언하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라고 주문했다.

지난해 말 자신이 췌장암에 걸린 것을 안 강 박사는 죽음조차 담담히 받아들이며 오히려 “여러분이 저로 인해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길 바란다”며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 온 제가 이렇게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 할 시간을 허락받아 감사하다”고 이메일을 보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또 “여러분들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했고 은혜로웠습니다”라며 감사인사를 잊지 않았다.

얼마 전 아들들과 함께 모은 장학금 25만 달러를 국제로타리재단에 쾌척하면서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했던 강영우 박사. 교회 강단에 설 때마다 활짝 웃던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그가 남긴 ‘긍정의 언어’와 ‘재활의 표상’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김무정 기자 kmj@kmib.co.kr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20224140614922&cateid=1046

<마지막까지 `사랑ㆍ감사' 메시지 남긴 강영우>

부인, 두 아들에 이별편지 "행복하게 떠납니다" 연합뉴스 | 성기홍 | 입력 2012.02.24 14:06

부인, 두 아들에 이별편지 "행복하게 떠납니다"

(워싱턴=연합뉴스) 성기홍 특파원 = "너희들과 함께 한 추억이 내 맘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가 있단다"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난 가슴 한 가득 품고 떠납니다"

시각장애인인 전(前) 백악관 차관보 강영우 박사는 임종을 앞두고 아내와 두 아들에 남긴 편지를 남겼다.

강 박사는 지난해 10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차분하게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해왔고 가족들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써내려갔다.

23일(현지시간) 별세한 강 박사의 가족이 전한 편지는 그가 가족과 함께 하며 행복했던 순간을 회고하고 부인 석은옥 여사와 진석, 진영 두 아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빼곡히 담고 있다.

"이제 너희들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로 시작되는 두 아들에 보내는 편지는 "내가 너희들을 처음 품에 안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들과 이별의 약속을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니,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온다"고 두 아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담았다.

그는 "하지만 너희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너희들과 함께 한 추억이 내 맘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라며 두 아들을 키우는 과정의 추억을 회고했다.

강 박사의 장남 진석(39. 폴 강)씨는 지난해 워싱턴포스트에 의해 `슈퍼 닥터'로 선정되기도 한 유명 안과전문의이며, 차남 진영(35. 크리스토퍼 강)씨는 백악관 선임법률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해 보기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 속깊이 새긴 채로 자라준 너희들이 고맙고, 너희들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게 나에게는 축복이었다"며 특히 지난해 연말 췌장암 판정을 받은 후 손자들까지 모든 가족이 함께 했던 크리스마스가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었다"고 아들들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강 박사는 "내가 떠나더라도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기에 너희들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항상 함께 할 것이기에 아버지는 슬픔도, 걱정도 없다"며 "나의 아들 진석, 진영이를 나는 넘치도록 사랑했고 사랑한다"고 편지를 맺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라는 제목이 붙은 부인에 보내는 편지는 젊은 시절 첫 만남부터 회상하며 시작했다.

"당신을 처음 만난게 벌써 50년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 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날개없는 천사였습니다"

1962년 서울맹학교 학생이던 강 박사는 맹학교 자원봉사를 나왔던 당시 숙명여대 1학년이던 부인 석은옥 여사를 처음 만났다. 강 박사는 `대학생 누나'였던 석 여사의 도움으로 대학 진학의 꿈을 키웠고 1972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강 박사는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이라며 시각장애인인 자신과 결혼하고 보살펴준 부인의 헌신적인 삶을 떠올렸다.

미국 유학,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회상하며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느냐"며 "항상 주기만 한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좀 더 배려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회한도 담았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주지 못할 것이라서..."

강 박사가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이라고 지칭한 부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는 말로 맺었다.

1944년 경기도 문호리에서 태어난 강 박사는 13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박리로 시력을 잃었고 같은 해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 10대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불우한 청소년기를 겪었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연세대를 졸업한 뒤 1972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 박사가 미국 유학을 떠날 당시 문교부(옛 교육과학기술부)는 장애를 해외 유학의 결격사유로 규정했지만 강 박사의 유학으로 이 조항이 폐지되면서 그는 한국 장애인 최초의 정규 유학생이 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는 박사학위 취득후 일리노이대 교수와 일리노이주 특수교육국장 등을 역임하다 지난 2001년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로 발탁됐다.

당시 강 박사의 백악관 차관보 발탁은 미국 이민 1백년 한인 역사상 최고위 공직이었다.

그의 자서전 `빛은 내 가슴에'는 7개 국어로 번역 출간됐고, 국회 도서관에 음성도서(talking book)로 소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장애인 인권을 제도적으로 증진시키기 위해 강 박사는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을 창설했으며 유엔 세계 장애위원회의 부의장을 역임하며 루스벨트 장애인상 제정을 제안하고 창설하기도 했다.

sgh@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