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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박근혜대통령·2

[스크랩] 강준식의 정치비사 대통령 이야기 박정희

강준식의 정치비사 대통령 이야기 박정희

생존_찢어지게 가난한 모친, 낙태하려 마신 간장 뚫고 태어나다
운명_3군을 다스릴 관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똑같은 사주
욕망_일본장교·北내통 소령…긴 칼 차고 싶던 權富 지향의 나폴레옹
사랑_남로당 체포된 뒤 “널 사랑해서 도망 못 가겠다” 애인에게 편지
야심_이승만 제거 계획 등 3번의 쿠데타 실패 후 詩 읊으며 5·16 구상
열정_경제개발·수출드라이브·하면 된다…근대화와 軍隊化
소박_12·12 때 시신엔 허름한 세이코시계, 낡은 넥타이 핀, 해진 허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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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글쓰기

월간중앙무인 출신의 그가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54년경 송요찬(宋堯讚) 등 4명의 장성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에도(江戶)시대의 유학자 라이산요(賴山陽)의 한시를 읊었다고 한다.(池東旭, <韓國大統領列傳>, 東京, 2002)

채찍소리 조용히 밤 강을 건넜으나 鞭聲肅肅夜過河
대장기의 수천군사 새벽녘 발각되니 曉見千兵擁大牙
원한은 십 년이라 갈아온 칼이건만 遺恨十年磨一劍
번뜩인 검광 밑에서 큰 뱀을 놓치누나 流星光底逸長蛇

이 시는 1561년 일본 전국시대 무장의 하나였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이 10년간 복수의 칼을 갈아오다 야밤에 습격을 단행했으나 눈앞에서 번뜩이는 칼 빛 아래서(流星光底) 큰 뱀, 곧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놓친 사실을 노래한 것이다.

동석했던 한 소장이 “거, 일본 거 되게 좋아하네”라고 빈정거리자 박정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구형, 갑시다. 이런 속물들 하고는 술 못 마시겠어요” 하고 영남일보 주필이었던 시인 구상(具常)을 재촉했다는데, 이때 그는 왜 그런 일본 한시를 그 자리에서 읊었던 것일까?

시의 내용에 그가 계획했었으나 군 수뇌의 동조를 얻지 못해 불발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1952년의 쿠데타 미수사건과 비슷한 점이 있었던 까닭이다. 쿠데타와 시.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당일 술자리의 주빈이었던 구상은 평소 박정희가 “의협심과 인정이 강하고 시심(詩心)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평한 일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시절에 발표한 두어 편의 시와 그 후 아내 육영수(陸英修)를 그린 시 등 20편 정도를 남겼다. 육영수는 남편이 군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소설을 썼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뜻인데, 실제 박정희는 오랫동안 일기를 썼고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특히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편지를 쓰곤 했는데, 삶의 주요 고비마다 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혔던 대목이 흥미롭다. 첫 번째는 만주군관학교 응시자격을 허가해 달라고 당국에 보낸 혈서(血書)다. 두 번째는 1952년 이종찬(李鍾贊) 육군참모총장에게 거사의 결단을 내린 것만 못했다면서 다음을 기대한다는 내용의 편지다.

세 번째는 1960년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용퇴할 것을 건의한 편지다. 네 번째는 1961년 장도영(張都暎) 육군참모총장에게 거사에 가담할 것을 종용한 편지다. 그의 글이 매우 문학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쓰기는 사람의 생각을 정리해주는 기능이 있다. 그는 대체 어떤 생각들을 갖고 있었고, 그 생각들을 나름대로 정리해왔던 것일까?

박정희는 어떤 인물인가?
어떤 술집에서 언쟁이 붙은 손님들 이야기를 등 뒤로 들어보니 한쪽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옹호자, 다른 한쪽은 비판자였다. 우리 사회에서 그만큼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엇갈리는 대통령은 없다. 이 같은 현상은 일반인의 좌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문학자들의 논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햇살이 강하면 그늘이 짙다고 했다. 그래서 논제를 민주냐 반민주냐 하는 정치적 관점에서 경제 문제로 옮긴다 해도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다”는 쪽과 “한국 경제를 비뚤어지게 했다”는 쪽으로 갈리고 만다. 그런데 이런 상반된 시각과는 별도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누구를 평가하느냐는 여론조사에서는 벌써 16년째 박정희가 단연 톱이다.

또 이승만(李承晩) 정권이나 장면(張勉) 정권 하면 ‘가난, 혼란, 어두움’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박정희 정권 하면 ‘발전, 안정, 밝음’의 긍정적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많았다는 조사도 있다.(<조선일보> 2004년 12월 31일) 정통성이나 정당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민주주의를 위축시킨 마이너스 유산을 남긴 것이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계속 박정희를 최고의 대통령으로 간주하는 것일까?

플라톤은 공동의 삶의 기원에 ‘먹는 것’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역시 경제를 발전시킨 박정희의 실적을 높이 평가해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신드롬에는 일부 맹목적인 향수 같은 것도 있고, 군사정권 시대에 절대선이라 믿었던 민주화의 신념이 깨진 데 대한 실망 같은 것이 역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중에게는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집권 후 박정희는 “민주주의라는 빛 좋은 개살구는 기아와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 대중에게 너무 무의미한 것”(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1962)이라고 역설했다. 이는 배고픔을 벗어나는 것이 당대 민주주의라고 본 대중의 정서와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었다. 사람들은 보릿고개를 넘는 데 그가 헌신적이었고 열심히 일했으며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던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나 가난을 벗기 위해 노력한다. 그 성과로 기업가가 된 사람도 있고 전문직 종사자가 된 사람도 있으며 개중에는 정계로 나아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 입신영달이나 치부를 넘어 집단이나 민족을 위해 노력한 인물은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 박정희는 역시 한 시대의 지도자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박정희와 억눌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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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시 상모리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 생가.

정치학자 해럴드 D 라스웰은 “억눌린 경력이 정치가를 만든다”고 지적했다. 수줍음을 잘 타고 말솜씨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박정희를 혁명가 내지 정치가로 만든 것은 ‘억눌린 경력’이었다. 그의 삶을 가장 억눌렀던 짐은 ‘가난’이었을 것이다.

1917년 경북 선산의 빈농에서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사이에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박정희는 태어나기 전부터 가난 때문에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의 작은누나 박재희(朴在熙)는 그 점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때는 또 집안이 원체 가난하여 식구가 하나 더 느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기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셨습니다. 시골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식대로 간장을 한 사발이나 마시고 앓아 누우시고, 밀기울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답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쳐 보기도 했더랍니다.”(정재경, <위인 박정희>, 1992)

이렇게 시달리다 태어난 탓인지 박정희는 기골이 장대한 아버지나 형들과 달리 체구가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 든 어머니의 젖이 말라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멀건 죽을 먹으며 자랐다. 그는 턱없이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 일이 있다.

“학교에서는 내일이 추석명절이라고 오전 수업만 하고 학생들을 집으로 보내주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떡을 치고 전 부치는 구수한 냄새가 온 마을에 서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집에 들어서자 전혀 음식을 장만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날의 냉랭하던 정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박정희, 수기 <나의 소년시절>, 1970년 4월 26일)

우등 자리를 놓치지 않던 그는 어떻게든 가난만은 벗어나고 싶었다. 소년의 이 같은 결심은 대개 판검사든 사업가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부(富)에의 개인적인 출구를 찾는 것으로 귀결되기 쉽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엉뚱하게도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년 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다.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박정희는 수기에 적었다. 그 직업이 자신의 취향이나 적성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기가 있었다.

그는 보통학교 시절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롤모델이 된 것이 나폴레옹이었다. 병정놀이를 즐겨 했던 그는 나폴레옹이나 이순신 같은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우선 주변의 권유에 따라 학비가 들지 않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어머니는 아들이 입시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수업료 면제라곤 해도 기숙사비는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해마다 고향에 돌아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몇 주고 한 달이고 눌러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입학 때 중간 정도였던 그의 성적은 점점 떨어져 4학년 때는 꼴찌, 5학년 때는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가난의 그늘은 짙었다.

그의 조행(操行)평가서에는 “음울하고 빈곤한 듯함”이라는 식의 코멘트가 기재되었다. 나약한 정신력은 대개 여기에서 좌절하기 쉽다. 그러나 태내에서부터 사선을 넘나들며 태어난 그였다. 이런 유의 사람에게는 역경이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된다. 강인함을 키우는 훈련장이 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장군이 되고 싶은 꿈을 안으로 더욱 다져나갔다.

그것을 방증하는 것이 쳐지는 학과성적과 달리 뛰어난 점수를 얻은 교련과목이었다. 대구사범 동기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던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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