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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설교·3/영상 설교·3

신우인 목사 / 은혜 위에 더해지는 은혜

포이에마예수교회

신우인 목사

은혜 위에 더해지는 은혜

요한복음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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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가?

하나님은 정말 내 개인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시는가?

하나님은 내가 고투하고 있는 이 절박한 상황에 도움을 주실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섭리를 의심하게 되는 어두운 ‘영적 겨울’은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 요한도 사람이기에 분명 그랬습니다.

그랬던 그가 말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이것은 수많은 시련과 의심을 지나온 사도 요한의 마지막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충만한 은혜.”


‘충만’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는 ‘가득 찬 정도를 넘어 넘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분에게서 차고 넘쳐서 우리들은 물론 오고 오는 세대를 충족시키고도

남는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 엄청난 우주가

오늘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함입니다. 

온 우주에 비하면 한 알갱이의 먼지에 불과한 지구와 그 위에 사는 우리들도 당연히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만이 그 은혜를 누립니다. 


그 이유를, 파스칼이 그의 명저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세상은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존재하지만,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핑계대기에 충분할 만큼 어둡기도 하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말입니다.


풀잎 끝 이슬방울에도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은 왜 보지 못하고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요?


민수기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시내 광야에서

보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민수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시내 광야에서 ‘제사장 훈련’을 1년만 시키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일 세대 200만 명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들은 이집트에 내려진 열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 그리고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어도 믿음과 구원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민수기에는 모두 아홉 번에 걸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베라에서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만나만 먹기 싫다며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며 울었습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그 땅의 사람들은 거인들이고 자신들은 메뚜기 같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자신들을 삼키는 땅이라고 혹평하자 백성들이 대성통곡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전진하자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오히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나운 아말렉 족속을 피해 우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갈 길이 멀어졌다고 하나님을 원망

하였습니다. 

레위 자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무리를 규합하여 모세에게 반역하였습니다.

무리바에서 물이 없다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에돔 땅을 우회하다가 길이 멀고 험하다며 원망하였습니다.

브올에서

신전에 속한 여인들과 음행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음행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모세에 대한 반역이 두 번, 음행과 우상숭배가 한 번, 물과 음식 그리고 먼 길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여섯 번이나 됩니다.


광야는 모든 것이 모자라고 길이 험합니다.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였다가 밤에는 영하로까지 내려갑니다.

또한 광야는 내 능력, 노력, 학벌, 미모, 재능이 철저히 무력화되는 곳으로 내가 씨를 뿌리고

가꾼다고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어쩌면 광야에서의 원망과 불평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광야와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운 땅입니다.

물과 음식은 넘쳐나고 생필품은 쌓아놓을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 원망과 불평이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정말 파스칼의 말이 맞습니다.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핑계 대기에 충분할 만큼 세상은 언제나 어둡습니다. 


마음에 새기셔야 합니다.

무심코 내뱉는 원망과 불평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차단하여 이 아름다운 세상을 일순 황폐한 광야로 바꾸고,

나로 하여금 이 광야 길을 힘겹게 걷게 만든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평과 원망은 일순간에 신앙심을 무력화시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나 스스로를 메뚜기로 보며 가나안 땅을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통곡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벌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민 14:33)


“유리하는 자라니, 별 것도 아니네.”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한 가인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필연을 말합니다. 

정처 없는 고단한 광야 길을 살다가 고아처럼 길을 잃고 만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요, 광야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 잘 보고 더 잘 누릴 수 있습니다.

광야에는 자신을 의탁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랬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고, 그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져 풍성하고 존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하나님 아버지께 가장 소중한 여러분들이 있는 것마저 빼앗겨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로 하여금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했다가는 저도 하나님의 책망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보아서, 올해부터는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지는 삶을 살기로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막 10:38)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자기 아들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즉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에 앉혀 달라고 청탁하자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에까지 기록된 이 ‘엄마의 치맛바람’의 당사자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당시 사도 요한도 자신의 어머니의 청탁에 “우리 엄마 최고!”라며 속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 청탁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알았고 생각날 때마다 얼굴이 화끈

거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다 만사형통, 부귀영화, 무병장수에 해당될 것이며,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작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모르고 기도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대신 ‘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려 하고, 하나님의 뜻 대신 ‘내 뜻’을 이루려

하고, 일용할 양식은커녕 몇 대가 먹고도 남을 양식에도 불안해하고, 용서대신에 이를 갈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대신에 ‘내게’ 영원히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부르짖는 기도와 철저한 종교생활에 매진하며 이제나 임할까 저제나 임할까 하늘만

바라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어 나는 하나님의 무응답에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만으로도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주기도문은 정처 없이 떠도는 ‘유리하는 삶’을 종식시키는 진리와 생명의 이정표입니다. 


조지 매티슨이 너무나 아름다운 기도를 하였습니다.

“당신이 

화창한 날에 오시든 비 오는 날에 오시든 저는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맞이하겠습니다.

당신은 화창한 햇빛보다 귀하시며 당신만 계시면 비가 와도 괜찮습니다.

제가 갈망하는 것은, 당신의 선물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제가 갈망하는 것은 당신의 선물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정말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이십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다른 길로 가야 합니다.

그 길에 대해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독생하신 하나님’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고 배우고 살면 마침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미혼모에다가 술과 마약과 나쁜 기억들로 찌들어 살았던 오프라 윈프리는 어느 날 이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감사일기’를 쓰는 일입니다.

그 내용은 별거 아닙니다.

“일찍 일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심 스파게티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상의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녀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그 사랑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기회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현재 1억5천만 명이 시청하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 쇼’는 사람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그들을

돕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시작한 감사일기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찾기’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20-21)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결단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 하나를 살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분의 가르침 둘을 살면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1+1=2가 아닙니다.

백이 되고 천도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하나님을 보게 되고 내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아 헤맸던 욥이 마침내 외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 감격스런 외침이 저와 여러분의 입에서 터져 나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