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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와 대환란/휴거·2

[스크랩] ♡♡. 휴거에 무관심한 한국교회여!(펌) .♡♡



그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1-2)






그 하늘들의 그 나라를 영역본에는 헤븐으로, 한글성경에서는 천국으로 번역했다. 하늘이란 명사를 복수 목적격으로 하여 관사를 붙였놓았다. 관사가 있다함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어법이다.





그러면 '그 하늘들'은 어디에 나오는가. 창세기 1장 1절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차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창조기사를 기록한 점을 감안하고 창세기 서두를 읽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사람을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창조주께서는 사람에게 '왕으로서의 다스림'을 주신 것이다. 아담의 타락은 통치권의 상실을, 환언하자면 왕같은 제사장의 지위를 상실한 결과를 가져왔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왕권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임을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회복시키셨다. 천국을 소유한 자는 이 직임을 구원자(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회복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시원으로 하는 새 인류로서의 회복인 것이다. 옛 사람을 입고 있으면서 동시에 새 인류로 살아가는 터전이 천국이요, 천국을 소유함으로써 왕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천국을 소유한 자는 예외없이 모두 왕적인 존재다.





그렇다면 내가 왕이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그것은 타락한 세상 왕들이 하는 짓이고 새 인류는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삼고 우리도 하나님을 닮은 왕같은 자로서 이 세상을 섬김으로 다스리는 것이 천국에 속한 자의 본분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이 것에 있어서 원형이요 모델이요 실제이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똑 같으신, 보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참으로 복된 자들이다.





그렇게 뜻하신(정하신) 주님께 순복해야 함에도 죄성으로 인해 온전한 다스림을 행사하지 못하는 형편일뿐이지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왕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다.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의 본의는 통치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사람으로 오신 그 분은 인자됨을 인하여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셨다. 그 분으로 말미암아 난 새 인류인 우리도 그 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천국-하늘 나라)를 유업으로(상속) 받는다는 의미는 그 나라의 왕이 된다는 뜻이다.





그 천국을 차지한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예수님이 입을 열어 가르치신 첫 말씀은 얼마나 복된 말씀인가. 가슴이 벌렁거릴뿐이다. 이 말씀에 '심쿵'치 않는다면 그는 필시 아직 잘 몰라서 그렇거나 심령이 가난하지 않아서 일 거다.





그 천국에 대해서 한 구절 한 구절 풀어서 나누고자 한다. 작은 무리의 모임이라고 기죽지 말자. 본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소문만 요란했지 사람들이 많아서 일일이 챙겨주지 못한다. 작은 모임이니까 일일이 챙겨주지 않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을 소유한다고 했으니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심령으로 번역을 했지만 좀 애매하다. 마음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더라. 프뉴마-영이다. 카르디아-마음, 푸쉬케-혼, 소마-몸을 가진 인간 자체를 일컫는 말이다. 헬라적 이분법, 삼분법적인 접근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다.





분석적인 언어가 아니라 실제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디 하나님께로 난 자들로서 하나님과 사귐(교제 혹은 교통)을 갖는 복된 존재였다. 다만 타락하여 분리되었을 뿐이다. 그것의 회복의 첫걸음이 천국에 들어가서 천국을 누리며,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아래로는 사람을 섬기는 섬김의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 천국에 속한 자의 참된 모습인 것이다.





이런 천국이 영적인 눈에 보여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천국만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내적 상태를 가리켜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한다. 마음에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처럼 양손에 떡을 쥐고 어느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은 태도로는 결코 심령이 가난해질 수가 없다. 주 예수님은 왜 가난(프토코스)이란 단어를 쓰셔서 우리를 가르치셨나? 절대 빈곤의 심령을 찾으시기 때문이다. 상대적 빈곤 비교적 가난의 상태가 아닌 거지를 지칭할 때 쓰는 단어가 프토코스이다.





거지 나사로에게 적용한 용어요, 가난한 과부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과부가 두 렙돈(요즘 가치로는 다불과 몇 천원)을 손에 쥐고 연보궤 앞에 섰을 때는 궁핍한(페니크로스의 여성형) 과부로 기록하다가 헌금하고 돌아서는 과부를 보시고는 프토케(프토코스의 여성형) 과부라 부르신다. 생활비 전부를 드렸으므로 '주시면 먹고 안 주시면 굶어야 하는 형편'이 성경이 말하는 가난이다. 그래서 주로 거지를 두고 이 말을 쓴다.





내가 절대 가난, 절대 빈곤의 심령상태인지 스스로 점검해보라!

말씀을 바르게 알면 알수록 이런 영적 상태가 된다.





그러면 이렇게 완벽해야 천국에 들어가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들어가서 배워가는 것이다. 비참과 절망 앞에서 몸부림쳐보지 않은 자들이 천국의 참맛을 제대로 알까싶기도 하다. 그러니 제발 종교 일반의 관념으로 기독교신앙을 규정짓지 말자. 그런 면에서 돌처럼 굳어진 분들이 있을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한국교회가 너무 배부른지도 모릅니다. 세상 것을 움켜쥔 채 천국도 탐하고 있는 것은 혹 아닐런지요. 탐심을 회개하고 영적으로 각성할 때입니다. 샬롬! ^^









주찬미

출처 : 하늘향연
글쓴이 : 마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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