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영상·설교/국내 영상설교

[스크랩] 번영신앙위에 굳게 서라 말씀하십니다(마11:2-6,121007/이병천목사).

번영신앙위에 굳게 서라 말씀하십니다.

121007(주일오전)

마 11:2-6

 설교원문은 동영상아래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요 5:19,30)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이상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정확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어떤 일들이었습니까?

 

(마 4:23-24)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마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한 침례요한이 정치적인 일로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마 11:4-6)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로 오신 분이 맞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가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사 35:3-6)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이상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고 계심을 확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시작되는 사역과 재림에서 이루어질 천년왕국까지를 예언하고 있기에,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는”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천년왕국에서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어찌 되었거나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야이심을 확증하시는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출 23:25-26) 『[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26]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이상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몸도 강건해지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온전하신 뜻입니다. 단지 우리의 영혼만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몸도 건강해지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온전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이 바로 그러한 사역들이었음을 봅니다.

 

(눅 4:18-27)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마 4:23-24)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마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육을 치유해 주셨으며 가난한 자들에게는 복음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영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온전한 회복을 하여 풍성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하여 선포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전락해 가고 있음을 봅니다. 성경의 모든 가치들을 오로지 영적인 것으로만 국한시켜 버리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과 치유와 회복과 부흥과 생명을 영혼육과 재정의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적인 것에만 국한 것으로 치부하고, 몸의 치유와 재정의 부흥을 이야기하면, 그런 것들은 성경적인 올바른 신앙의 의제가 아닌 세속적‧문화적 욕망에서 비롯된 의제들로, 그리스도 혹은 성경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성경의 부수적인 계시와 근본적인 신앙을 부차적인 문제로 돌림으로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를 왜곡시키는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매우 강도 높은 비판들을 쏟아내는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행크 해네 그래프가 쓴 <바벨탑에 갇힌 복음; 번영 신학을 고발한다>는 책은 미국 교회를 뒤흔든 화제의 베스트셀러라고 합니다. 그 책의 저자는 “치유를 가리키는 성경의 언어 ‘라파’는 영적인 회복을 의미하는데도, 믿음 운동가들은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의 영적‧도덕적 무능력을 질병과 육신의 저주로 둔갑시켜 버렸다.”(417~420쪽)는 식의 엉뚱한 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라파(히. lapaa)”가 쓰인 구절들을 잘 살펴보면 그와 같은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성경 렘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라파]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라파가 영적인 치유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어떤 단어에는 어떤 한 가지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전후문맥에 의해서 여러가지 의미로 쓰여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언어개념의 기본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서 “라파”는 이방나라를 용서하는 것(사19:22,57:18),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것(왕상18:30), 물체를 원상태로 복구시키는 것(렘19:11), 소금물을 담수로 변화시키는 것(왕하2:22) 등의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주로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것으로 쓰여진 단어이지 단지 영적인 회복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라파”는 영적인 회복보다는 오히려 육체의 치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다음의 구절들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창 20: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창 50:2) 『그 수종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출 21:18-19)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할 것이니라』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신 28: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피부병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유 받지 못할 것이며』

 

(왕하 8:29) 『요람 왕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에 라마에서 아람 사람에게 당한 부상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유다의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보기 위하여 내려갔으니 이는 그에게 병이 생겼음이더라』

 

(사 53:4-5)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마 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그러므로 “치유를 가리키는 성경의 언어 ‘라파’는 영적인 회복을 의미하는데도, 믿음 운동가들은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의 영적‧도덕적 무능력을 질병과 육신의 저주로 둔갑시켜 버렸다.”는 행크 해네그래프의 비평은 전혀 사실무근임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몸의 치유와 재정의 부흥을 이야기하면, “부와 건강이라는 신앙의 부수적인 쟁점이 신앙의 앞자리로 재배치됨으로써 기독교신앙의 근본적인 신조들이 제멋대로 재해석되는 황당한 풍경이 펼쳐진다.”는 어이없는 비판들을 쏟아냅니다. 그러면서 “고통과 질병을 영적인 성숙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목회적 돌봄과 더불어 호스피스 사역을 더욱 적극적이며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등의 교묘한 제안을 하곤 합니다.

 

성경적인 번영신앙에 대하여 그것은 계시된 말씀이 아닌 세속의 유한한 욕망에서 신앙과 삶의 의제를 빌려와서는 이에 맞추어 성경을 문맥과 달리 엉터리로 해석하고, 점입가경으로 기독교의 정통 교리들을 자신들이 내세운 의제에 따라 고쳐 버리는 것으로 함부로 평가해 버리곤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흔히 하는 번영신앙에 대한 잘못된 평가들을 소개해 봅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의 폐해는 크리스천의 가치관에까지 침투하여 복음을 왜곡시키고, 저급한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풍요를 향한 탐욕을 조장하고 있다.

 

소위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 또는 ‘믿음신학(Faith theology)’이라 불리는 거짓복음이 세속의 바람을 타고 누룩처럼 번져가며 성도들의 믿음을 갉아먹고 있다.

 

한국교회에도 건강과 부, 성공과 번영의 복음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오고 있다. 번영신학의 누룩을 차단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결코 감당할 수 없다.

 

복음을 빙자한 탐욕들이 얼마나 강단을 더럽히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위선과 위증과 모순들로 넘쳐나고 있는지..., 번영신학자들은 기독교의 핵심 중의 핵심을 모호하게 하여 교란시키고, 초점을 이 세상의 덧없는 것들에 맞추게 한다. 번영신학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사이비 복음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인식하는 전환이 절박하게 요청된다. 가짜를 버리고 진정한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존 파이퍼는 “나는 번영신학을 증오한다! 부와 건강의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라 불리지만 실상은 쓰레기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미국 복음주의의 리더들이라 칭하여지는 분들의 번영신학에 대한 잘못된 반응들을 소개해 봅니다.

 

미국 기독교는 이른바 부와 건강의 복음이라고 불리는, 그 곳에 복음의 특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악성 질병에 빠르게 감염되고 있다. 번영신학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험하게 왜곡하고, 궁극적으로 성령 안에서의 우리의 삶이 아닌 타락한 성품에 호소하는 가르침이다.

_고든 D. 피, 리젠트 칼리지 신약학

 

건강, 부, 번영신학의 메시지는 사이비 복음이다. 그것은 성경이나 믿음의 공동체가 이전에 경험해 온 성령의 역사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말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권세를 믿는다. 번영복음은 그리스도인을 풍요하고 성공에 미쳐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포로로 만든다. 풍요의 복음에도 진리의 파편이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이단들이 그러하듯, 잘못된 부분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핵심으로 자리한다.

_월터 카이저, 고든-콘웰 신학교 구약학

 

하나님이 우리의 삶이 물질적으로 부유해지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치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경제적 성공을 이루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번영신학은 하나님과 ‘부“에 대한 욕망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우상숭배다.

_토마스 롱, 프린스턴 신학교 설교학

 

부와 건강의 복음은 신자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고, 또 누려야 하는 육체적 축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와는 다르다. 그들의 복음이 다른 이유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의심스러운 교리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번영신학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도 거부한다. 그들은 십자가로 나아가지만 십자가를 지지는 않는다.

_더글라스 무, 휘튼 칼리지 신약학

 

이상과 같은 비판의 말들이 과연 성경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정말로 맞는 말들이며, 번영신앙에 대한 옳고 정당한 비판들일까요?

 

지난 주 화요일 새벽기도시간에 몇몇 주제들에 관하여 글을 써야만 한다는 강력한 부담들이 밀려왔습니다. 그때 밀려온 주제들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의 설교였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해야 할 기본전제는, 번영신앙이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그 언약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는 겸손한 신앙을 말하는 것이지, 성경말씀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라딘의 마술램프와 같이 여기며 자기 자신의 욕심대로 하나님을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적극적인 신념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번영신앙을 설교하거나 말하면, 지금까지 서두에서 소개드린바와 같이, 그 즉시 그것은 잘못된 번영신학이라고 함부로 정죄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성경적인 번영신앙은 우리의 적극적인 믿음과 절대긍정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만 가지면 그분으로 하여금 ‘항상’ 축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욕심과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복된 자리로 겸손히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건강과 부와 명예에 관한 모든 일들이 자신이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말이나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필요한 무엇이든지 불러올 수 있고 이룰 수 있다는 심리학적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를 마음으로 신뢰하고 입으로 고백하며 행동으로 순종하며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안에서의 치유와 회복과 부흥이라는 총체적인 번영을 이야기하면 그와 같은 인간적 성공철학, 기복주의적 샤마니즘을 의미하는 것으로 곡해하여 지금까지 소개해 드린 것들과 같은 비평들을 소나기처럼 퍼붓는 안타까운 현실들을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번영신앙이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저 역시도 번영신앙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번영신앙이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성경말씀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겸손한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약속을 항상 지켜주시는 신실하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렘 1: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상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언제나 변함없이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역사해 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인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의 번영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시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they prosper in all they do/NLT)

 

(수 1:7-8)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신 28:1-6)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12-14)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you will always be at the top, never at the bottom/NIV)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상의 성경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자녀가 말씀대로 순종하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되며, 항상 위에만 있게 된다는 말이 과연 잘못된 말이며 성경적으로 틀린 말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 건강을 ‘항상’ 받아 누릴 수 있다는 말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종교지도자들의 사탕발림과 같은 사기성이 있는 잘못된 말들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물질적으로 언제 어떻게 보상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신 15:4-5)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출 23:25-26) 『[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26]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사 1:19, 새번역)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시 112:1-3)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막 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현세에서 백배로 보상해 주시고 내세에서 영생으로 갚아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백배로 부흥하고 내세에서 영생을 얻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겸손한 신앙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된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을 가지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영적으로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즉 부와 건강으로 ‘항상’ 축복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틀린 것이며,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번영신학은 그분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만 가지면 그분으로 하여금 ‘항상’ 축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인데, 그렇다면 그분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시다”라는 비판이 과연 성경적으로 정당한 비판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행에 대한 겸손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번영신앙, 혹은 번영신학이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그 언약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는 겸손한 신앙을 말하는 것이지, 성경말씀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라딘의 마술램프와 같이 여기며 자기 자신의 욕심대로 부려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적극적인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번영신앙 혹은 번영신학을 인본주의적 적극적인 사고방식정도로 치부하는 어리석고 무지하며 오만방자한 말들을 함부로 쏟아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R교수님은 “참 신앙이란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부유해진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번영신학에 길들여진 사람은 이러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하며 “가난하게 살아도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임을 성도들에게 ‘바르게’, ‘정직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셨고, G대학교 L교수님은 “소위 번영신학을 내세우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를 속단할 수는 없다”면서도 “하지만 이생에서 누리는 온갖 부와 명예와 갈채를 볼 때 후세 사람들이 길이길이 그들을 기억할 것 같지는 않다. 성경은 이생에서 찬란한 삶을 누렸던 사람을 칭찬하지 않고,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살면서도 믿음을 놓치지 않은 사람을 칭찬하고 있음을 목회자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라는 충고를 하셨다고 하는데, 그러한 말들이 과연 성경적으로 맞는 말들인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성경말씀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에 무지할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적인 진리를 대항하여 오만방자한 말들을 함부로 쏟아내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런 말들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12:36-37)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큰 어른이시며 전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나타내시는 J목사님, 더군다나 이 분은 우리나라 교계 번영신학의 대표적인 선두주자로 알려지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비성경적인 내용이 들어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 가운데 반드시 좋은 일만 계속 다가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라고 말했는데 영혼이 잘되려면 우리에게 햇빛 비치는 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평안한 날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기 위해서는 비오는 날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날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서 우리가 눈물 흘리며 금식하며 주님께 몸부림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러한 날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여러분과 나를 멸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나의 삶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말이 과연 성경적으로도 맞는 말인지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07:10-20)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이상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며, 미련한 자들이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이 오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믿음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과 같은 것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건강해지고, 부유해지는 삶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알며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기에, 신실한 믿음으로 말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 조차도, 때때로 질병을 주시고 가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욥의 고난에 대한 매우 잘못된 해석들- 하나님께서 의로운 욥을 더 정결하게 하시려고 일방적으로 시험을 주신 것이라는 식의 잘못된 해석들 ( http://cafe.daum.net/gvlove0691/K3zB/217 참조)을 -매우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R교수님의 말처럼 목회자는 “가난하게 살아도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임을 성도들에게 ‘바르게’, ‘정직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과연 성경적으로도 맞는 말일까요?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 15:4-5)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빌 4:11-20)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 빌4:11-20 이 구절이 꽤 많은 사람들에게 본의와 상관없이 여러 가지 큰 오해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듯합니다. 이 구절은 사도바울이 풍부한 삶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음전파사명을 위하여 자원함으로 궁핍한 환경을 초월하였다는 고백이지, 사도바울이 어쩔 수 없이 궁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여졌다는 말도,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그와 같은 훈련을 주셨다는 말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신 28:13-14)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마 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14:34-36) 『[34]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행 5: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 33:20-24) 『[20]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21]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24]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No one in Zion will say, "I'm sick.")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But you have come to Mount Zion)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자동차운전을 잘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잘 받고 조심하여 운전을 잘하면 되는 것이지, 운전을 잘하기 위해서 반드시 크고 작은 사고들을 당해봐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크고 작은 시행착오들을 통하여 능숙한 운전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능숙한 운전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러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운전경력 10년 무사고, 20년 무사고, 평생무사고로 능숙한 운전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운전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말씀으로 훈련을 잘 받고 말씀 안에서 살아감으로, 굳이 크고 작은 사고들을 당하지 않더라도, 항상 잘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하였을 때조차도 처음부터 채찍의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으로 충분히 훈계하시고 훈련시키셔서 돌이킬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히12:7-11에 기록된 "징계"라는 말의 헬라원어는 채찍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훈계"를 뜻하는 "파이데이아(paideia)"이고, "연단"이라는 말의 헬라원어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 연습"을 뜻하는 "굼나조(gumnazoo)"라는 것도 아시기 바랍니다. 부디 한국교회가 성경적인 번영신앙, 번영신학의 기치를 더 높이 들고 더 힘차게 부흥의 길을 달려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 : 이병천카페 [성령전인치유목회]
글쓴이 : 이병천목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