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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한반도

5·18진상조사위가 필사적으로 전두환보안사령관을 발포명령자로 몰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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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진상조사위 가 필사적으로 전두환보안사령관을 발포명령자로 몰고갑니다.


그러나  이들은 반대쪽목소리는  듣지도 않습니다.
이희성계엄사령관, 주영복국방장관 등  당시 책임자로  있던 사람들이 전두환보안사령관은  상관없다 고 말하고  이희성,주영복등이  자신들이  책임져야한다고  고백했는데도  듣지도 않습니다.
왜  저러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발포명령자로  의심받는 최세창씨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이미  김영삼정부때 드러난 사실
이고  이때도 확실하지  않다고  결론났습니다.


‘서울의 봄’ 이후 5·18…“발포 명령 실질 결정권자는 전두환” (hani.co.kr)
‘서울의 봄’ 이후 5·18…“발포 명령 실질 결정권자는 전두환”
5·18진상조사위 조사 결과 요약문 발표
“최세창, 윗선과 통화 후 ‘위급하면 발포’”

기자정대하
  • 수정 2024-01-13 00:31
  • 등록 2024-01-12 15:12
자위권 보유 천명 전 발포를 명령한 ‘윗선’은 누구일까? 윤영기 보안사 본부대장은 조사위에 “전두환이 광주에 현장 출동한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직접 소통했다”고 진술했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이끌던 군내 사조직 정치군인집단이다. 육사 13기인 최세창은 하나회의 핵심으로 12·12 당시직속 상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공수혁 특전사령관(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김창세역의 모티브 인물이 최세창 3공수여단장으로 알려졌다.
 
최세창 3공수특전여단장의 검찰 진술. 검찰 수사 기록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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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발포명령 확실치 않다"…5·18 계엄군 증언 별무소득 (newsis.com)
"최세창 발포명령 확실치 않다"…5·18 계엄군 증언 별무소득
기사등록 2023/04/20 16:44:58
최종수정 2023/04/20 23:38:38




[광주=뉴시스]이영주 기자 = 5·18 일부 단체와 ㈔대한민국특전사동지회가 5·18 당시 투입된 계엄군을 초청해 두번째 증언회를 열었지만 이렇다 할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증언회에 참석한 계엄군은 과거 언론보도를 비롯,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 과정에서 이미 밝혀진 내용을 되풀이했다.


지난달 첫번째 증언회 당시 참여한 계엄군도 과거 자신이 수차례 관계 기관에 증언한 내용들을 반복한 바 있어 두 차례 열린 증언회가 모두 소득 없이 끝났다.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 특전사회는 20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오늘의 증언이 5·18진상규명의 첫걸음이다'는 이름으로 두 번째 계엄군 증언회를 열었다.

증언회에는 5·18 당시 대위 직급으로 3공수여단 정보보좌관을 역임한 최명용씨가 나서 진술했다.

전북 김제가 고향인 그는 1980년 5월 18일 이전 광주에 먼저 투입, 전남대학교에 차려진 진지 상황실에서 상황실장을 맡았다.

그는 그해 5월 21일 3공수여단이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주둔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저지른 양민 학살 과정, 이후 시신을 수습하며 벌인 암매장과 관련한 당시 내용을 밝혔다.

그는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소속 부대가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다.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 내려오면 알아서 조치하라'는 지시가 먼저 내려왔던 상황이었다"며 "죽기 싫으면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였으니 사실상 발포 명령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주요 쟁점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현장에 없어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고 일관했다.

금남로 헬기사격의 유무, 광주교도소 내 시민 학대 가담 계엄군의 신원, 암매장 시신의 사후 처리 과정 등에 대해서도 '직접 보지 않아 모른다'고 했다.

광주교도소로 주둔지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을 향해 이뤄진 계엄군의 사격과 관련, 이를 지시한 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고 답했다.


5월 20일 광주역 시위 진압 당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의 권총 발포는 있었으나 이를 집단 발포 명령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고도 했다.

광주역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자들의 수 또한 당시 확인할 수 없었다고도 했다. 1995년 검찰 조사 결과 당시 숨진 광주 시민 수는 4명으로 집계됐다.

최씨의 증언은 새로운 내용이 없고 주요 쟁점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답변이 이어지면서 잇단 증언회가 사실상 '맹탕'이었다는 지적이다.

그는 과거 5·18진상조사위의 조사에 참여, 광주역 등을 방문해 당시 상황을 설명한 바가 있어 이날 증언회가 새로운 사실을 밝히는 자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