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눅10:20)
때로는 능력을 행하는 과정에서 자칫 교만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는 경우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게 됩니다. 70인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을 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돌아와서 보고가 아니라 자랑부터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 귀신들이 나가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기 때문이다.(눅10:19)” 그러나 “나희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무슨 뜻입니까?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이록됩니다. 그러나 능력위주로 교만하고 불법을 행하게 될 때 그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바깥 어두움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겠기 때문이라고 일렀으되,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거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41-42)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사했지만, 그러한 자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불법을 행한 해위는 하늘의 축복이 아니라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난다는 경고에 경청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능력위주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룬 사람은 결코 교만하거나 불법을 행치 아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아니하고 물두멍에 신앙의 기초를 둔 사람은 생을 소유로 하기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생의 목적이 소유하려는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상의 믿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믿음을 강조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를 모르는바가 아니지만,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11:22)” 이 말이 마르다가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 마르다의 지성(智性)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 주신다하더라도 당장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요11:24)” 마지막 날의 부활은 백보좌 심판때가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중요한 믿음을 지적합니다.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에서 마르다는 믿음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키는가를 그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지ㆍ정ㆍ의ㆍ로 믿음이상의 믿음을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백보좌심판 때에 마지막 부활이 있음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네가 믿느냐?”고 확인합니까? 마르다는 세 번씩이나 “내가 아나이다.” 했지 믿습니다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지식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는 하나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으므로 믿음이상의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확답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렇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이 믿음이상의 믿음을 요구하는 부분입니다. 죽어서 4일이 되었고 또한 썩은 육체가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자연법칙논리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 한계를 초월시키면 죽은 자도 살리는 믿음이상의 믿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이라야 예수님의 기도와 합작을 이룰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의 작은 믿음을 주니께 보이면, 예수님의 믿음으로 그녀의 믿음을 감싸고 예수님이 기도하면 응답이 있겠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삶
너의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님의 겸손을 보이시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겸손이라야 성령님이 내 안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시는 겸손에서 교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라야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다. 마음을 비움에 관해서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기도는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①. 세상의 근심, 욕심, 야망으로 채워진 마음을 먼저 비워야 됩니다. 비운 후에 하나님으 로 채우는 일이 기도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에 가득한 것들, 손 에 꼭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빈손, 빈 마음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이외에 더 중요 한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이 원리는 골방기도에서 설명되었습니다.
②. 기도는 겸손한 사람만이 응답되며, 기도하는 사람은 더욱 겸손해져야 됩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은 겸손하 시고 또한 겸손한 사람을 만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③. 기도는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종의 자리에서 하는 것입니다. 나의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을 자신의 중심에 모시고 그 발 앞에서 겸손히 그들 쳐다보는 일입니다.
④. 하나님과 나와의 만나는 경점의 체험은 곧 신비입니다. 그러나 신비는 현실적인 이성 과는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 간격을 좁혀주는 것이 체험입니다. 체험은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체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며 신비입니다. 이론이 실제의 경험이 되고 상 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체험은 신앙에 화력을 주는 전환점이 됩니다.
비워야 될 것은 세상을 향한 것들입니다. 육신을 위한 것들입니다. 사탄의 생각은 자기를 나타냅니다. 사탄은 상전의 형체로서 제사를 받으려합니다. 자기를 높이라고 부추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보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비워야 됩니다.
2. 기도는 마음을 그리스도로 채우는 일입니다.
①. 기도는 마음에 잘못된 감정, 무의식에 숨겨진 상처를 성령의 도움으로 비우고 지우는 일입니다. 그러한 심령에 하나님의 성품을 가득이 채워야 됩니다.
②. 심령에 성령으로 가득 채워질 때에 예수의 마음이 되며 열매를 맺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다음은 채워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나라로 향한 것들입니다. 영을 위한 것들입니다. 예수의 생각으로 채워야 됩니다. 자기를 비워야 예수님으로 채워집니다. 영의 형체라야 예수님으로 채워집니다. 자기를 낮추어야 예수님으로 채워집니다. 복종해야 성령으로 채워집니다. 자기를 죽이는 죽음이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럴 때 성령님이 역사하며, 그 역사가 성령의 활동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상 제도를 엄격히 지키십니다. 어떠한 위치에 있더라도 그 위치에 걸맞게 심어야 됩니다. 그렇게 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삶입니다. 자기의 삶에 따라 성령은 활동하십니다. 이러한 활동은 나의 바깥으로 나타나며 그 나타남이 표적과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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