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서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신대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Oida). (요11:23~24)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이전에 마르다(Μάρθ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네 오라비를 살려주겠노라고 말씀하였을 때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안다(οiδα)” 했습니다(요11:24). 그럼에도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πιστεύω)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믿음을 강조합니다(요11:40).믿음(πιστεύω-피스테우오)과 아는 것(οiδα-오이다 / ϒίνώσκω-기노스코)과는 다릅니다.
믿음이라는 피스테우오(πιστεύω)는 자기편에서 스스로 행함으로 얻어지는 미래형능동태입니다. 그렇다면 피스테우오(πιστεύω)는 어떤 의미일까요. 신뢰(Trust)하고 자신의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아는 것까지 포기하고 맡기거나 위탁함을 나타냅니다. 신뢰는 믿고 의지하여 소망을 이루어가는 실재입니다. 그러나 안다는 오이다(οiδα)는 인식(Understanding)으로서 기억이나 관계나 존경, 또는 간주함을 나타냅니다. 인식은 감각이나 지각으로부터 분별하는 의식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기노스코(ϒίνώσκω)는 지식(Knowledge)으로 알게 되거나 확인, 또는 익숙해짐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믿음의 여부를 확인하려했지만 마르다는 인식으로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믿음(πιστεύω)’이 아닌 ‘아는 것(οἷδα)’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말이나 문장을 보다 묘하고 그럴듯하게 꾸미는 수사적(修辭的)인 것이지 믿음은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인식이나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경전체에는 믿음이란 단어가 많습니다. 지식은 인식에 의하여 얻어낸 결과를 말합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아브라함을 예로 진정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야레)하는 줄 아노라.(창22:12)
야레(Yare)는 신약에서 엘곤(elgon)과 함께 행위를 나타냅니다. 믿음이란 단어를 둘로 따로 인식해야 합니다. 호격 πίστιs와 미래형능동 πιστεύω을 구별해야 합니다. 피스티스(ίστιs)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사실을 믿는다고 할때 적용됩니다. 이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온 나의 원죄가 없어지게 함을 인정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말하였던 구원을 얻었나니로 표기된 세소스메노이(σεσωσμένοι)는 σώξω의 완료형 수동태 입니다. 완료는 지난 일의 끝남에 관한 문법이므로, 이는 과거 아담으로부터 이어져오던 원죄가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원죄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원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Justification)입니다. 대속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주신 선물이라고 교훈합니다.(엡2:8-9) 이것은 과거의 죄, 원죄만을 사함 받았을 뿐이지 거듭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피스테우오(πιστεύω)는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된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의롭게 살아서 거듭나게 되는 미래형능동으로 적용됩니다. 이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의를 이루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행전 2장40절에서 육신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을 ‘받으라’는 했습니다. 구원을 받으라는 소데테(Σώθητε)는 σώξω의 현재형 수동태 진행이므로 내적인 거룩함과 외적인 의를 이루는 삶을 말합니다. 이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자기를 성화시키며 살아감을 말합니다. 이는 육신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인 성화(Sanctification)라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지만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 성화를 이루며 살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의 순서는 이러합니다. 첫째; 원죄사함을 받기 위해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됩니다. 이 자체로만으로는 하늘나라에 갈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경고하였습니다. 둘째;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행위로 자신을 의(διχαίοω)롭게 행하는 삶이어야 됩니다. 그래야 구원에 이르게 되는 법입니다. 의로운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의는 행위로만 이루어집니다. 셋째; 첫째와 둘째과정을 거처야 비로써 피스테우오(πιστεύω)라는 믿음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행함이 없으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elgon)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
오늘날 믿는다는 우리들 중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르기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까지 죽이라면 죽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다.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러고도 믿는다고 할 것입니까? 예수님의 동생이요 사도인 야고보는 행함이 있어야 의(διχαιόω)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의란 ‘옳게 행하거나, 공의로 행하거나, 자신의 옳게 만들어가는 행동이라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말씀대로 독자 이삭까지 포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우르를 떠나 하란에서 거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란을 떠날 때 나이는 75세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되고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말만 듣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들었다고 입으로만 믿는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자기 것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라나셨습니다.
그는 우르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성장했다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전토가 있었을 것이고, 처갓집 식구들까지 친척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득권마저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πίστιs)하고 자신의 마음과 몸까지 맡기는 행위가 아브라함의 믿음(πιστεύω)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의(διχαιόω)로 여겨졌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자기 마음에 맞는 교회를 찾아갑니다.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설교가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찾아간 가나안은 갈대아 우르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독자를 바치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서 바쳤습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처럼 행함이 없다면 그는 믿는다고 인식으로 아는 것이지 믿음이 아니므로 믿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최근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상담을 받았습니다. 교회엘 꼭 나가야 되느냐? 교회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신부가 되겠답니다. 목사가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장로가 어떻다고, 그래서 이교회 저교회를 전전하는 것이 믿음이 좋기 때문에 자기 수준에 맞는 교회를 찾아간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믿음이 좋다고 하지만, 미안하게도 어느날 여호와께서 사단에 물었을 때, 사단이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녔다" 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과 믿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elgon)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elgon)이 없는 믿음은 죽음 것이니라.(약2:26)
믿음이 그의 행함(elgon)과 함께 일하고 행함(elgon)으로 [믿음이]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야고보는 행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자라난다 하였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피스티스(πίστιs)을 말합니다. 이는 원죄사함 받은 믿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자라나게 하려면 반드시 행위가 따라야 비로써 구원에 이르는 믿음(πιστεύω-피스테우오)이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마라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아브라함은 이상(maraha)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환상(maraha)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몇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시겠다는 것과, 아브라함에게 상급을 보장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시는 것은 그의 믿음에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다면 그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상급이 되어주신다면, 그 이상은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가? 그것은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이란 단어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배반하지 않음을 로마서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배반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이 두가지 문제에서 요한일서에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계 인류를 구원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롬4:3.갈3:6)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습니다. 재산도 포기했고, 인간관계인 친척들, 또는 친구들도 포기했습니다. 부모도 물질도 친구도 다 포기하고 오진 사랑하는 자신의 권속들만 데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온으로 향하는 길에 장애가 되는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포기해야 됩니다. 친구들에 대한 정적감정도 포기해야 됩니다. 인맥을 이루는 것 때문에 시온으로 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면 단호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요 믿는 자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는 믿는 사람이 아니요 예수 이름만 부르면서 성전뜰만 밟고 다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포기하고 애굽왕에게 보내졌습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 또는 남편을 남에게 가라고 포기할 수 있겠습니다. 모름지기는 이혼소송이 아니면 위자료 청구다 뭐다 하면서 상대를 죽이려고 달려들겠지요, 그러고도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한다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조카의 종들과 다툼이 생길 때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재산문제로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고소하고 죽이기까지 합니까? 우리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요, 하나님이 내게 주었다면서 조카는 얼씬도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행13:50)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연합국에 잡혀간 조카가족들과 부녀들과 백성과 재물까지 다 찾아왔다고 교훈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에 믿는다는 사람들의 형태는 어떠합니까?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목사들이 선동에 휘말려서 한 나라를 소용돌이에 빠지게 하는 시위에 가담하는 목사들의 모습이 TV 브라운관에 보였지요. 과연 그런 행위가 믿는 자들이 해야 할 짓인가요? 저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기독교지도자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οiδα)을 믿음(πιστεύω)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하늘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믿음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득권, 자기에게 필요한 것, 자기가 원하는 것, 갖고자 하는 소유권을 포기하고 오직 위로부터 주신 사랑을 공유하면서 그 행복을 찾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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