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⑯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⑰ 지붕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려 내려가지 말며, ⑱ 밭에 있는 자는 곁 옷을 가질려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마24:16-18)
얼마전에 서울의 한 집회장소에서 있었던 일이라 합니다. 자기에게 와야 들림을 받는다, 신부 티켓을 받아야 된다. 대환난사역자가 되는지 점검해 준다. 피난처를 알려주겠다. 등으로 현혹시키는 말에 미혹당한 신자들 뿐 아니라 심지어 신학까지 졸업했다는 목사들까지 그로부터 무엇인가 받겠다고 애쓰더라는 소식을 듣고 습슬한 마음이 있어서 이 글을 씁니다.
본문은 대 환난이 시작될 때에 관한 경고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주님의 재림을 갈망한다고 합니다. 또한 교회가 주님의 강림하실 때 나타날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려고 나름대로 준비한다고 합니다. 준비하는 과정을 들어보면 각기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말하기 이전에 주님께서 경고하신 진리의 말씀부터 보면 몇 가지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첫째;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된다는 것과,
둘째; 산으로 도망하라는 경고와,
셋째; 소유물을 가져가려 하지 말라는 것과,
넷째; 소유물에 대한 애착심으로 뒤로 돌이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1. 가증한 것이 세워지는 거룩한 곳
먼저 주님께서 경고하신 내용은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고 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가증한 것은 무엇이며 거룩한 곳은 어딘가요? ‘베데루그마(βδέλυϒμα)’로 표기된 가증한 것은 ‘미운 것, 몹시 미운 것, 더러운 것’으로 설명됩니다. 가증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17:5)
가증한 것에 대하여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기게 지금까지 알고 있는 학설이나 인식을 잠깐 내려놓고 들어야 합니다. 첫째는 Bilderberger 그룹의 지구정부청사진에는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해 성경을 없애고 UN에 지구정부 곧 적그리스도정부를 둔다고 되어있습니다.(http//bilderberger.org) UN에서 각 교회 안에 UN기를 세우겠다는 정책으로서 그것을 받아드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Freedom on the Altar pp-188. by William N. Grigg 1995) 따라서 UN기가 가증한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룩한 곳에 미운물건이 선다” 할 때 거룩한 곳을 ‘하기오스(ἅϒιο)’로 표기 되어있습니다(마24:15). ἅϒιο는 ‘거룩한 성도, 봉헌된 성도, 순결한 성도, 신성한 성도’라는 뜻입니다. 원어에 ‘ἐν τόπω ἁϒίω’로 단수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성도 개개인을 말합니다. ‘성도가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을 보거든’으로 해석됨으로 거룩한 성도가 VeriChip을 받게 됨을 말합니다.
2. 산으로 도망하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24:16)
예수님의 말씀은 그때가 되면 산(ὅρο-오로스)으로 도망하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군에 점령당할 때 실제로 그들은 산지로 몸을 피했습니다. 또한 로마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카타콤바(katakomba)에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대 환난 때에 피해야 될 곳이 산이라면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산(ὅρο)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어느 곳일지라도 피할 곳은 없습니다.
내가 북극 집회의 산(ר)위에 좌정하리라.(사14:13)
루시퍼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를 탐했던 좌정이라는 할(ר)은 문자적인 산이 아 니라 높은 지위란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했다는 지위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17장 9절에서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았다”는 케파라스(κεφαλά)는 문자적인 산이 아니라, ‘두목, 꼭대기, 머리, 등 높은 지위란 뜻입니다. 계시록 17장 7절에서 “내가 여자(교회)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라” 할 때 ‘탔다’는 편승도 가입(加入)이란 지위란 뜻입니다. 이는 교회가 UN을 움직이는 일곱 머리라는 G-7과 함께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따라서 산으로 도망하라는 뜻은 지형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은 그때를 위하여 땅을 사서 피난처를 장만한다면서 성도들에게 물질을 요구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볼 때는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발상이라 하겠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성도들을 위하는 것처럼 미혹시키는 행위일 뿐입니다. 이런 일은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Ubiquitous시대는 위성을 통해서 추적됨으로 숨을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당신은 도망은 갈수 있으나 숨을 곳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피할 곳은 어떤 지형이 아닙니다. 피난처는 예수님 품입니다. 예수님께로 피해야 살수 있다는 말씀이 마태복음 24장 16절의 말씀입니다.
3. 소유물을 가져가려 하지 말라!
지붕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οίκία)을 가질려 내려가지 말며,(마24: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건(οίκία)은 ‘보물, 재산, 식구’라 했습니다. 이것은 동산(動産)을 말하며 일반적인 물건(ἀϒαθό)으로 생활에 쓰이는 가재도구가 아닙니다. 죽음도 혼자가고 하나님나라에도 혼자 가듯이, 대 환난에서 예수님께로 피하는 사람은 개인일 뿐이지 가족적이거나 또는 교회적인 집단체제가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피난처를 마련하겠다며 땅을 사놓고 그곳에 건물을 짓겠다며 성도들의 은신처로 만들기 위해 성도들에게 물질을 요구하는 것은 비성서적이요 속이는 미혹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명히 어떠한 물건도 가지러가지 말라고 하셨다면 피난처를 짓기 위해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것까지 포함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난처를 지으려고 물질을 요구하는 것은 물건을 가지려 내려가는 것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지도자들은 신자들을 속여서도 안 되고 신자들은 속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모든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두가 휴거될 터인데 구태여 피난처를 운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휴거될 자격이 안 됐다면 피난처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아직도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지 못한 발상입니다.
4. 소유물에 관한 애착으로 뒤로 돌이키지 말라!
밭에 있는 자는 곁 옷(ίμάτιον)을 가질려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마24:18)
히마티온(ίμάτιον)은 주로 겉옷이나 외투에 적용됩니다. 다시 말하면 여벌옷을 가지려 뒤로 돌이키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는 의식주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려 보내실 때에 전대나 두벌 옷을 금지시켰음을 명심해야 됩니다. 사람은 육신을 가졌기에 먹어야 살고 입어야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아직도 자기라는 육신을 주님이상으로 섬기려는 발상이요 이러한 발상은 주님을 믿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농사도 짓지 않았고 피난처 같은 곳도 장만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고 고기를 주셨습니다. 신명기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40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29:5)”하신 말씀을 믿는다면 피난처를 위해 땅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백성들을 밤낮으로 이동시켰듯이 그때가 되면 대환난사역자들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다고 성경은 교훈하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교회)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계12:14)
두 날개가 있는 큰 독수가 아니라 큰 독수리의 날개 둘(δύο)을 받는 다고 했습니다. 독수리의 두 날개는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능력을 받은 종과 평신도 두 그룹이며 이것이 두(δύο) 날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받았다는 수납(受衲)이 아니라, 양육받기 ‘위하여(ἴνα)’입니다. 정리하면 환난전에는 자신만을 위하다가 벌거벗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나라에는 벌거벗은 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마포 옷이 입혀지기 위해 대환난사역자들로부터 양육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양육받는 장소는 인간이 정하는 위치가 아니라 사역자들이 사역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오직 자신의 몸뚱어리 하나뿐입니다.
환난사역자들은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환난사역자들도 지구정부에 체포되어 죽게 됩니다.(계11:6-10) 그렇다면 죽지 아니할 안전한 지형의 피난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합니다.(계18:24)
정리를 하겠습니다. 휴거에서 탈락되면 대 환난에 남겨지게 됩니다. 남겨지는 이유는 생(生)을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자기육신만을 위한 소유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지 않은 육신을 벌을 받게 되는데 그 벌이 대환난에서 육신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육신의 안전을 위해 피난처를 만든다면 육신이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육신이 필요한 잠자리, 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준비해 둔다면 그것이 어떻게 대환난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성경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게 하든가, 아니면 성도들을 위하는 것처럼 해서 자기재산을 만들려는 꾐일 것입니다. 대개 전자에 해당되리라 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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