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국과지옥2/말세 징조·3

[스크랩] 세계정세와 성서의 예언(강추)

샬롬~사랑하는님들 주님안에서 반갑습니다.^.~

이 자료의 원제목은 '성서를 알면 세계가 보인다'입니다.

아주 중요한 자료이기에 메시지가 좀 길더라도 인내하시면서 끝까지  

읽으시면 결코 후회하시지 않으실것입니다.마라나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성서를 알면 세계가 보인다

 

▣ Short Summary

99.9%의 적중률이라면 완전한 예언이 아니다. 그 옛날 성서 속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설파한 예언이 0.1%라도 틀렸다면 그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이 성서 속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그 예언은 100% 적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예언 중 아직까지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않고 남아 있는 예언들이 있다. 그리고 그 남아 있는 예언이 다시 이루어지기 위해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있다.

로마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유럽공동체(EC)와 유로화로의 통일, 전 세계인류를 일원화 체계로 통합하려는 ‘주민등록번호’와 자기(IC) 카드, 전 세계를 경악으로 몰아넣는 동시다발 테러의 공포, 일본자위대 해외파병과 중국 2억의 군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의 끝없는 살육작전 등, 2600년 전, 그리고 2000년 전에 성서가 예언한 내용을 100% 이루기 위해 지금 세계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제1장 세계정세와 성서의 예언

 

세계를 읽는 좌표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을 때 신문이나 텔레비전의 정보만으로는 결코 진실을 알 수가 없다. 세계정세를 아는 중요한 축이 있다. 그 좌표축이 바로 성서이다. 성서를 기독교만의 경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유태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서는 다가오는 인류역사의 종말이 어떤 모양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성서연구자의 관점에서 9ㆍ11 테러사건을 볼 때 이것은 결코 예상을 뒤엎는 행동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사건 다음날 있은 강연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주모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사마 빈 라덴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집단이 존재한다. 나는 그것이 ‘유럽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라고 단정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우선 첫째로 이 사건이 2002년 1월 1일 유로화 완전 도입 직전에 일어났다는 절묘한 타이밍이다. 2002년 1월 1일은 유럽합중국의 탄생의 순간이며 아주 새로운 세력권의 탄생의 날이었다. 그 직전에 세계 경제의 중심인 뉴욕이 붕괴한 것이다. 글로벌경제의 기본통화의 위치를 획득한 유로화로 볼 때 미국은 두드려 없애야 하는 존재이다. 달러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세계의 돈은 당연히 거대한 경제권인 유럽합중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9ㆍ11 테러사건이 발생하기 수개월 전부터 아프가니스탄 전 국왕 자비르 샤를 중심한 탈레반 이후의 아프간 신정권 수립안이 NATO가 관계하는 유럽 안전보장전문가에 의해 입안되고 논의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이것은 유럽이 테러 발생을 알고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실제 지배세력이었던 탈레반이 사실상 붕괴되고 아프간 신정권회의가 유럽과 유엔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죽든지 체포되든지 탈레반정권은 없어져야 한다는 게 서방세계의 공동목표라고 나는 주장해 왔는데 지금은 그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

뉴욕이라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심장부가 파괴된 직후에 유럽연합의장으로부터 전 세계로 하나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그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그것(윤리적 글로벌화)은 유럽에서 시작된다. 유럽 기준으로 일을 결정할 때 지구상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검토하는 게 중요하다.” 유럽주도의 새로운 세계화가 시작된다는 선언이다. 얼마나 멋진 타이밍인가! 이것이 단지 우연일까? 성서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들은 또 하나의 성서의 예언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리얼타임으로 목격하는 증인이 된다.

 

예언이란 본래 어떤 뜻인가?

 

예언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미스터리 책이나 음모담 같은 이상한 것을 생각한다.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의 저술 목적과는 동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내가 여기서 꼭 검증해 보고 싶어 하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언과 일반 예언을 명확히 구별해서 이해해주기 바란다. 성서의 예언(預言)은 한자의 뜻과 같이 ‘맡긴 말’이다. 예정할 ‘예(豫)’자가 아니고, 은행예금의 ‘예(預)’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을 맡아서 말하는 예언자’라고 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활약했던 사회적 배경에서 유래한다.

 

원래 성서라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래한 책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신권국가였다. 야훼(하나님)라고 불리는 유일신을 믿었으며, 그 신은 천지만물을 창조한 창조자이며, 그의 주권과 권위로 세워진 나라라는 것이다. 즉 ‘태초에 하나님이 존재’했으며 그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건국된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유태라는 것이다. 그 민족의 시작은 아브라함이었는데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우르(현재의 이라크)라는 곳에 살고 있었으나 하루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너는 네 본토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거기서 너로 많은 민족이 되게 하겠다.”

아브라함은 다신교로서 애니미즘(무속신앙) 문화 속에서 생활하던 남자였으나 그때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 가족을 이끌고 태어난 고향을 떠난다.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만 음성을 따라 갔던 것이다. 성서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교환된 ‘아브라함의 계약’을 토대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이 계약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약속(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2. 사명(네 이름을 축복하겠다). 3. 목적(땅의 모든 족속이 너 때문에 복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기둥이다. 성서는 이 계약을 믿고서 떠난 남자와 그 계약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기록한 책이며, 동시에 그 사명과 목적을 곡해한 유태인과 그 결과 유태사회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역사의 기록인 것이다.

 

그 이후 기원전 1400년경 나타난 모세는 약 400년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한 영웅이다. 당시 모세가 120만 명에서 20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방까지 데리고 간 것은 이집트의 람세스 2세 때이다. 가는 도중에 시내산 꼭대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헌법이었던 십계명을 받는다. 법률로부터 사회제도까지 모든 것이, 창조자였던 하나님의 지시로 이루어졌고, 그의 종인 모세가 시행했다. 이런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의 주체인 야훼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그들의 국가적 관심사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모세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모세와 같은 초 카리스마가 죽자 상황이 달라진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각각의 형편에 따라 비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이방종교의 풍습에 동화되기도 하고, 사회생활이 황폐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시대에 등장한 이들이 예언자들이다. 그들은 황폐한 이스라엘 사회에서 본래의 뿌리를 일깨우기 위해 죽을 각오로 일어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점쟁이나 무당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예언자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만일 하나라도 틀려서 말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즉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적당히 속이는 것이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삶과 죽음의 협곡에서 살았던 사람들인 것이다.

 

예언자들이 말한 내용 가운데는 그들의 시대 이후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 가운데 많은 것이 역사 속에서 실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내용은 앞으로 실현될 일들이다. 만일 예언이 과거에 100% 적중했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로 예언된 것도 100%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이다. 성서에 예언이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예언을 부여한 주체가 역사를 시간 추의 밖에서 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역사라는 말을 영어로 ‘History’라고 하는데, 이것은 His와 Story의 혼합어라고 한다. His(하나님의) Story(이야기)는 성서적 역사관의 기초가 된다.

 

성서는 예언을 부여한 야훼라는 주체가 물리적 우주의 제1원인이라고 선언한다. 이 하나님이 물리적 세계를 창조한 순간에 물리적 법칙이 만들어진 것이며, 그 순간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과거, 미래라는 개념은 하나님에게는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영원의 한 순간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만이 어떤 일이 미래에 일어나기 전에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만이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할 수가 있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이사야 42장 9절)

 

성서는 무엇을 예언하고 있는가?

 

성서 속에는 꼭 이해해야 할 몇 가지 키워드가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오늘날 우리와 관련 있는 것은 ‘종말의 날’이라고 불리는 내용이다. 이것은 세계역사의 마지막에 관한 테크니컬 타임이며 문자그대로 ‘종말’을 의미한다. 어떤 구절에서는 ‘그 날’, 또는 ‘주의 날’이라고도 나와 있다. 이것은 모두가 끝나고 마는 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가 새로워지는 날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정치가 바뀐다거나 세상이 좋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리적 법칙까지도 완전히 바뀐다는 놀라운 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날에 관해서 성서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금부터 2600년 전에 세상의 마지막 때의 세계정세를 극명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가 예언한 마지막 날의 모습을 간단히 열거해 보자.

 

1. 세계에 흩어졌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귀환해서 나라를 재건한다.

2. 성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주권 안으로 들어온다.

3. 중동문제가 세계를 위험한 상태까지 끌어올린다.

4. 예루살렘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중요한 도시가 된다.

5. 유럽이 결집된 강대한 군사경제 지역으로 발전한다.

6. 세계는 글로벌화 된다.

7. 러시아가 유럽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적인 세력이 된다.

8. 아시아에 2억의 병사를 가진 강대한 군사세력이 존재하게 된다.

성서가 까마득한 옛날부터 말하고 있던 마지막 징조는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제2장 성서가 밝혀주는 가까운 미래

 

이스라엘은 세계의 타임테이블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세계의 시계가 될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세계에 대한 ‘징조’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을 보면 역사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알 수 있으며 ‘종말의 때’를 아는 시각표를 보는 것과 같다. 종말의 날에 대한 분명한 징후의 하나는 세계의 눈이 이스라엘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을 둘러싼 중동문제야말로 세계의 화약고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분명 성서가 말한 대로 세계는 움직이고 있다.

 

세계역사상 유태인만큼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운명을 살아온 민족은 없다. 그들은 조국을 잃어버리고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으면서 2000년 동안 유랑생활을 했으나 멸망하지 않고 나라를 재건했다. 조국이 멸망한 민족으로서 5대 이상을 단일 민족으로서 순수성과 아이덴티티를 보존한 것은 유태인을 빼고는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유태인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다름 아닌 예수가 2000년 전에 이미 예언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24:34). 여기서 ‘이 일’이라고 말한 것은 앞서 언급한 종말의 징조를 말하며 ‘세대’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제이나’라는 말로, 제너레이션(generation)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Nation(민족)’이라는 의미도 있다. 즉, 예수가 유태인을 가리켜서 “종말의 시대에 일어날 일이 전부 일어날 때까지 이 민족은 멸절하지 않는다.”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방랑생활을 거쳐 마침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이 생활 속에서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말한 설교가 신명기인데 그 안에는 축복과 저주의 선택이 백성들 앞에 놓여 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따르면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만일 따르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유태민족은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귀환하고 거기서 국가로 발전하게 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와 간음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즉, 저주를 선택한 것이다.

 

그로부터 800년 뒤 예언자 이사야는 분명하게 예언한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빌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이사야 39:6) 그리고 이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결국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바빌로니아에 끌려가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기원전 600년경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의 포로기간이 70년간이 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유태인은 예언한 그대로 70년 후에 바빌로니아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귀환한다. 귀환을 허가한 사람은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 왕 고레스인데, 놀랍게도 고레스가 태어나기 175년 전에 예언자 이사야는 그의 이름을 실명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에는 유태인이 저주를 선택할 경우 그들은 두 번 조국을 쫓겨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두 번째는 앞서와 다른 나라가 공격해올 것인데 ‘독수리’의 날음 같이 치러와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에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언대로 기원전 68년에 시작된 유태인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려고 기원후 70년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이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100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다. 로마제국의 상징이 ‘독수리’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치다. 살아남은 유태인은 생명을 구하려고 세계 여러 나라로 피난했고, 이 때부터 방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서는 분명히 세계 중에 흩어진 유태인이 다시 모여 조국을 재건할 때가 온다고 여러 번 말했으며, 예언자 에스겔도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에 그것을 극명하게 예언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방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에스겔 36:24).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에스겔 36:21).

성서의 예언가들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다시 같은 장소, 즉 고대 도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 부흥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세계 역사학자들은 성서의 예언을 믿지 않았으며 1900년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서학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혹평 당해왔다. 그러나 실제로 세계사 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이 재건된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날이 언제 도래해도 좋다는 대전제가 이미 준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말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세계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종말을 향한 걸음이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예언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예언이라면 믿지 않는, 그리고 반감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예언을 둘러싼 이야기 가운데 근년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큰 뉴스가 있다. 그것은 사해사본의 발견이다. 구약성서의 유명한 예언서 가운데 이사야서라고 부르는 예언서가 하나 있는데 이 책에는 실로 놀라운 예언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예수가 어떻게 태어날까, 그리고 어떻게 죽을까라는 것에 대해 상세히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이사야 53장은 십자가의 전경뿐 아니라, 왜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까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태어나기 700년 전에 기록된 것이나 그 기술된 것이 너무도 정확하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목격한 제자들이 이사야가 쓴 예언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이사야서에 그 내용을 삽입한 것”이라고 조롱했다.

 

그런데 1947년 세기의 대 발견이 세계를 진동시켰다. 사해 서쪽의 쿰란에서 베들레헴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던 베두인 소년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다가 일부가 붕괴된 동굴을 발견했는데 동굴 속에서 두루마리의 끝이 나와 있는 깨어진 항아리를 발견했다. 감정 결과, 그 두루마리 속에는 그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어떤 사본보다도 천년이나 더 오래된 고대 히브리어로 씌어진 이사야서가 들어 있었다. 이 발견으로 이사야 53장이 틀림없이 예수 이전부터 이사야서 속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이 사해사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성서의 신빙성이 세계로 클로즈업된 가운데 다음해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돌연 역사 속에 다시 그 모습을 나타냈다.

 

떠오르는 유럽

 

지금부터는 성서가 밝혀주는 가까운 미래에 관한 매우 중요한 표적에 관해 말하고 싶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내가 미국의 동시다발 테러사건의 주모자가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포로 가운데 유태인 소년 다니엘이 있었다.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은 한 신상이 등장하는 매우 무서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은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계속되었고, 공포에 휩싸인 왕은 그 꿈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느끼고는 전 바빌로니아에서 점쟁이와 마술사를 불러 자기 꿈의 해석을 의뢰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꿈의 의미를 밝히지 못하자 격노한 왕은 그들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다니엘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이 꿈을 해석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 꿈을 해석해 주셨다고 선언했고, 놀랍게도 왕이 꾼 꿈을 맞추고 의미까지 해석한다. 이때 다니엘이 해석한 꿈은 실로 성서가 말한 ‘종말의 날’에 일어날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40년 후에 이번에는 다니엘 자신이 꿈을 꾸었다. 다니엘은 마음이 동요하여 이 꿈을 해석하기를 원했고, 그에게 직접 계시가 주어졌다. 이 두 꿈은 기본적으로 같은 사건에 대한 계시였다. 바빌로니아 제국에서 시작하여 그 땅에 흥할 네 개의 제국에 관한 예언인데, 네 번째 나라 다음에 영원한 나라인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의 나라’가 나타난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계사는 이와 같이 실현되었다. 결코 망할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던 바빌로니아 제국(신상의 금 머리)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은 가슴과 팔)가 나타났고,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지중해 세계를 헬레니즘화 시킨 것이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이끈 그리스 제국(청동 배와 넓적다리)이다. 하지만, 이 위대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 세계를 통일시킨 최강의 나라가 다름 아닌 로마제국(철 종아리)이다. 다니엘서가 가리키는 대로 분명히 이 땅에서 네 개의 대제국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니엘서도 신명기 28장과 같이 우리가 세계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를 사전에 예언한 놀라운 책이다. 신명기가 유태민족에 관한 예언이었던 것에 반해 다니엘서는 4대 제국에 관한 예언이라는 점에서 특필해야 할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사람 손에 의하지 않은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신상이 다 부서졌다.”고 씌어져 있다. ‘돌’은 성서 가운데 키워드의 하나로 상징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분명히 그리스도가 활동한 시대는 유태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때였다. ‘돌’이 로마제국을 치고, 그 후에 영원히 계속되는 나라가 흥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나라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성서의 또 하나의 키워드로서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하나님 나라란 자기들 유태인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지배하는 유태 독립국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공적인 활동을 개시했을 때 가장 먼저 한 말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모두 유태인이므로 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라는 말을 지금이야말로 예수가 로마권력을 분쇄하고 유태인 독립국가를 세워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그를 따랐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가 의미하고 있던 하나님 나라가 권력을 타도하고 다음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나타나야 할 변화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다니엘의 예언을 한 번 더 돌이켜 보자면, 느부갓네살이 꾼 꿈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이라고 씌어져 있다. 그런데 앞서 마지막 날이 실현되기 위한 대전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존재할 때’라고 말한 바, 그렇다면 마지막 날에 메시아가 로마제국을 치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한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는 대전제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대 이벤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없어져 버렸으므로 로마시대에 일어났어야 할 ‘마지막 날’에 관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예언이 실현되자면 이스라엘이 부흥하는 것과 동시에 로마제국이 또 다시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것밖에 없는데, 우리들은 현재의 세계정세 속에서 사실 로마제국의 부활을 바라는 세력이 집결하고 있는 놀라운 현실을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EU, 즉 유럽연합이다.

 

유럽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들의 정신에서 로마제국의 영광이 사라진 순간은 없었다. 14세기 초 근대국가의 성립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럽 부활론이 전개되어 왔다. 유럽이 작은 왕국으로 분열되어 서로 항쟁해왔기 때문에 평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유럽을 제창했던 것이다. 또한 강대한 이웃 여러 나라, 특히 이슬람교도 국가들의 침략에 대항해 고대 로마제국 이후 보존해왔던 기독교국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유럽경제는 파멸상태가 되었고, 세계에서 유럽시대는 끝을 맞았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초강대국의 힘의 밸런스로 유지되는 신시대를 맞이했던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유럽 사람들로서 이러한 굴욕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강한 유럽이 부활해야 한다”는 기운이 일어나는 것은 시대의 변천에 따른 필연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통합 움직임에 가속도가 붙었다. 각각의 정치나 사회풍토가 다른 유럽 각국이 각 나라의 주권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단일 통화에 의한 경제권의 통일과, 공통외교와, 안전보장의 획일화 통합에 의한 군사적 통일, 그리고 사법과 내무의 협력이라는 법적 통일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헌법의 기반이 다름 아닌 로마조약인 것이다. 이것이 국가를 넘어선 국가, 즉 합중국이 아니고 그 무엇인가? 가히 현대에 새로 태어난 로마제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EU 내에는 누가 EU를 지배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프랑스일까, 아니면 독일일까…. 성서에 따르면 부활한 유럽은 종말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21세기는 이미 미ㆍ소의 냉전시대도 아니고, 미국 혼자 승리하는 시대도 아니다. 분명 유럽은 무시할 수 없는 큰 세력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 동시다발 테러사건은 이 움직임과 매우 관련이 있다.

 

제3장 글로벌리제이션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을 국제화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국제화는 국가 간의 관계가 긴밀하게 되는 것을 말하지만, 글로벌리제이션은 국가를 초월한 움직임이고 국가기능을 약화시키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의 글로벌화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글로벌리제이션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키포인트가 된다.

세계를 글로벌화하는 것이 과연 세계의 영구적인 번영에 공헌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지면 글로벌리제이션 추진파들은 감정적으로 반글로벌리즘이라고 소리를 높인다. 그러한 모습은 다소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이미 세계외교무대에서는 자국의 국익보다 먼저 글로벌 스탠더드, 즉 세계 표준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점하고 있다. 세계적 시야에서 생각할 때 하나의 정책이나 방향이 세계주의적 관점과 세계 공동의 이익에 반한다면 강제적으로 간섭하여 세계기준에 적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글로벌리제이션을 생각할 때 항상 신중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결정하는 것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세상이 하나가 된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누가 하나로 된 사회를 지배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록이 밝혀주는 글로벌세계

 

너무나 놀랍게도 성서는 종말의 날이 가까우면 세계가 글로벌화를 향하게 된다는 사실을 2000년이나 앞서서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글로벌화 된 세계를 지배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고 예언하고 있다. 그는 세계에 군림하는 강력한 카리스마이며 모든 국민이 그를 세계의 리더로서 칭찬한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세계정부의 총재로서 글로벌사회의 정점에 서는 인물이다. 세계는 그를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성서는 그 그림자의 뒤에 숨어 있는 무서운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다니엘서와 지금부터 1906년 전에 씌어진 ‘요한계시록’의 연결점이다. 밧모섬에서 요한은 먼 훗날 일어날 일을 환상으로 보았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3:1) 여기서 열 뿔과 일곱 머리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난 열 왕이며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다니엘 7:24). 갑자기 ‘그’라는 인칭 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인간이라는 것이다. 계시록은 그가 갖게 될 대단한 권력에 대해 알려준다. “내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동안 받으리라.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계시록 17:12-13). 열 명의 왕들은 스스로의 능력과 권위를 짐승(그)에게 준다고 한다. 즉, 짐승이란 유럽합중국의 권력을 손아귀에 넣은 강력한 정치가, 혹은 지배자인 것이다.

 

계속해서 이 짐승의 정체를 더욱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구절을 보자. “기회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육이니라.”(계시록 13장 18절) 여기에서 이 짐승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폭로되고 있다. 그는 666이라고 하는 수수께끼의 숫자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짐승이 어떠한 인물이 될 것인지에 관해서 성서는 매우 명확히 경고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숭배되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되어 세상에 군림하게 된다고 예언되어 있다. 계시록 13장 3-4절에 보면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오’ 하더라.” 또한 이 인물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고 싸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에 성서 속에서 이 인물은 ‘적그리스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세계가 카리스마적인 리더를 대망하는 시대가 온다. 그것은 세계적인 리더십의 결여와 세계적인 불안이 증대하는 시대에 찾아온다. 이것은 성서에서 나오는 ‘짐승’이 출현하기 직전의 징조이다. 지금 세계는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질서, 새로운 리더십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 도래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세계는 혼미를 거듭해갈 것이다. 20세기형 국가주의적 안전보장 체계가 기능할 수 없게 되고, 기존의 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불안이 증대되면 하나의 세계가 부상한다. 과거 세계를 지배했던 유럽이다. 거기서 등장하는 정치가가 세계질서를 회복하는 최고의 지도자로 환영받게 될 것이다. 세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서가 예언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상에는 성서의 예언을 실현시키려는 실현집단이 존재한다. 그들은 글로벌리제이션의 파도로 세계를 몰아가고 있는 사람들, 즉 글로벌 엘리트들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세계 지배를 꿈꾸고 있다. 종말의 시대에 부상해야 하는 거대 세력권은 유럽이다. 글로벌 엘리트들이 유럽을 글로벌 스탠더드의 중심에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폭로되는 프라이버시

 

유럽에서 등장하는 카리스마적 정치가는 세계에서 열광적으로 환영받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의 관리 시스템을 하나의 극으로 집중시켜서 넘버링에 의한 전체관리체제를 만든다는 사실이 성서에 확실히 예언되어 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짐승의 수라. 기회가 여기 있으니 총명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육이니라.”(계시록 13:16-18). 이것은 숫자에 의한 일원관리가 전 세계적 규모로 달성되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었던 시대에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라는 위대한 테크놀로지의 등장으로 이 예언은 우리가 살고 있는 21C 사회에서 처음으로 실현 가능한 것이 되었다. 신용카드 또한 우리의 사회생활을 극적으로 바꾸고 말았다. 컴퓨터에 의한 일원화 관리기술로, 이미 세계 규모로 네트워크화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너무도 당연한 사회생활의 단면이지만, 이것이 내 개인정보가 세계의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국경 없는 글로벌리제이션의 서막이다. 당신의 개인 데이터는 세계의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고, 세계의 개인정보를 합쳐서 관리하고 있는 초대형 모(母) 컴퓨터는 EU 의장국인 벨기에의 브뤼셀, EU 본부에 있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짐승’이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매매를 못하게 한다’고 했는데, 요즘은 상품에 바코드가 붙여져 있지 않으면 매매를 할 수가 없다. 일본은 이미 식품잡화의 바코드 소스 마킹율이 99.9%이기 때문에 정말로 바코드 없이는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바코드를 세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조직이 EAN(유럽유통통일 심볼)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즉 물류의 세계통일 코드를 결정하는 곳이 유럽인 것이다. 일본에서 새로운 상품을 제조하여 그것을 일본 국내에 판매하려 해도 바코드가 없으면 물류 시스템에 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바코드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EAN에 신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놀라운 것은 1900년 전, 컴퓨터나 디지털 같은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성서가 예언한 사회시스템이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 완전히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평소 생활 속에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계시록이 예언하고 있는 대로 인간을 숫자로 관리하기 위한 인간 넘버링, 즉 국민총배번호제(우리나라의 주민등록제도)는 이미 세계적인 흐름이 되고 있다. 숨겨두고 싶은 출생의 비밀이나 가족관계, 병력이나 범죄력, 그런 모든 것이 단지 10행의 번호를 입력하는 것으로써 모두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행정은 이것을 IC카드화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는데 이것은 보통 자기카드보다 수백 배의 정보를 입력할 수가 있다. 호적을 카드화하면 선조 대대까지의 정보가 컴퓨터로 관리되는 무서운 현실이 이미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놀라는 것은 아직 이르다. 계시록에서는 놀라운 현실을 예언하고 있다. 666이라는 적그리스도의 숫자는 이마나 오른손에 각인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숫자를 인체에 끼워 넣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그 마이크로칩 기술은 실용화되고 있다. 전 미국 대통령 보좌관인 마틴 앤더슨은 휴즈사에 의해 신형식별시스템이 개발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사용된 장치는 마이크로칩을 탑재한 트랜스폰더(transponder; 외부로부터의 신호에 자동적으로 반응하여 신호를 반송하는 송신기)로서 이것은 주사기로 체내에 삽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도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전파를 이용한 식별시스템이라고 한다. 디지털 타투(문신)와도 같은 이 방식을 이용하면 위성의 궤도 위까지 전파를 발신할 수 있으며 340억 명의 개인정보 식별이 가능하다. 이것은 당신이 위성궤도 위에서 감시당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계시록은 짐승에게 힘을 주는 것을 ‘용’이라고 고발하고 있다. 용이란 성서의 키워드이며 악마와 사탄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말한다. 이것은 오컬트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할 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론이다. 세계를 전체 관리체제로 이끌고 가는 ‘짐승’은 악마의 힘에 붙잡혀 있으나 그 ‘사탄은 빛의 천사로 위장한다.’고 성서는 폭로한다. 동시다발 테러라는 미증유의 사태는 미국 국민뿐만이 아니라 적어도 선진국 주민의 위기의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 자기방어를 위해서는 자유도 포기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짐승이 한 발짝 가까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보라.”고 계시록은 전한다. 짐승의 숫자는 666이다. 수치로부터 문자를 찾아내는 방법을 게마트리아라고 하는데, 이것은 암호기술의 고대적 응용이며 현대의 암호기술도 여기서 발전해왔다.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게마트리아를 숙지하고 있었고 상징적인 666을 사용하는 것으로서 다가올 독재자의 정체를 후세에 전달하려고 했다. 옛날부터 게마트리아를 응용하여 계시록에 있는 666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알아보려는 시도가 계속되었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를 단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에일레나이오스가 그것은 로마제국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로마제국의 그리스어는 Lateinos인데 L은 30, a는 1, t는 300, e는 5, i는 10, n이 50, o는 70, s는 200으로 합계하면 666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네로 황제도, 히틀러의 이름도 666이 되는데,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제4장 인류의 성지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복잡한 역사를 거친 끝에 세계에 큰 영향을 주는 3대종교의 성지로서 세계가 무시할 수 없는 도성이 되었다. 거의 세계인구의 반 이상이 신앙의 이름으로 이 장소를 거룩한 땅으로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는 실로 인류의 성지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세계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시는 뉴욕이나 런던, 도쿄가 아니라 예루살렘인 것이다. 성서는 인류의 종말에 이 도시가 세계의 이목을 다시 집중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며, 미국의 테러사건을 계기로 세계인의 이목이 싫어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

 

유혈의 도시

 

예루살렘의 귀속권을 둘러싸고 지금도 중동에서는 피를 부르는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예언에 따르면 메시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수립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동쪽 문으로 들어온다고 믿고 있다. 예루살렘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리로서 8개의 문이 있는데, 이 황금 문이야말로 신전의 언덕으로 통하는 문이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기 1주일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도 동쪽 문으로 들어왔다. 유태민중은 예수를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재에도 그들은 언젠가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강림할 때 예루살렘의 동쪽 황금 문으로 입성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현재 예루살렘에 가보면 이 문은 완전히 폐쇄되어 바깥에서 접근할 수 없다. 과거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할 때 유태인의 왕이 될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면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이 문을 폐쇄하고 이 문 바로 앞을 묘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미국 안에는 600만 명의 유태인이 살고 있지만 1,000만의 이슬람교도도 함께 살고 있다. 이슬람권은 약 12억이고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다. 신전의 언덕에 있는 이슬람사원이 폐쇄되고 그 땅에 유대 신전을 건축한다는 엄청난 사태가 일어난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신전의 언덕’ 문제야말로 세계가 해결해야 할 최후의 어려운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세계를 대혼란에 빠뜨리려면 가장 효과적인 테러 표적이 ‘신전의 언덕’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CIA나 모사드가 그러한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테러대책에 분주히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평화의 군주이다

 

세계의 지도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복잡한 예루살렘 문제를 포함한 중동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세계의 명사로서 칭찬 받고, 위대한 인물로서 세계에 이름을 남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다. 아마도 이런 신전의 언덕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세계적인 카리스마로서의 자격과 자질을 가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성서는 매우 명확하게 이 사실을 폭로한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다니엘 9:27). 이것은 실로 놀라운 예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라는 것은 여기서 우리들이 논해온 최후의 시저, 짐승을 말한다. ‘한 이레’란 7일이 아니라 7년을 말하는 것으로, 7년간 포괄적 평화조약을 굳게 맺는다는 것이다. 또한 ‘절반의 기간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라고 한 것은 그때 이전에 제사와 예물의 제도가 이미 재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이 제도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것이므로 이 제도가 재개되려면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7년간의 언약을 계기로 시저는 예루살렘 문제를 해결하고 예수살렘의 언덕에 유대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7년간의 평화조약을 주변제국들과 체결한다는 것이다.

 

예수도 종말의 날에 대해 구체적으로 많은 예언을 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 유태인에게 거룩한 곳은 성전이다. 예수는 유태인이 멸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짐승이 성전에 서는 사건을 말한다. 또 다른 곳을 읽어보면 다니엘이 예언하고 예수가 확인한 무서운 사건이 보인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한 예언이다.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데살로니가 후서 2:4).

 

이 예언에서 그 전모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구체적으로 ‘그’가 하는 행위를 폭로한 것이다. 그는 과거의 지배자가 해온 것처럼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네로 황제나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절대적인 독재권한을 가지고 자기에게 예배할 것을 요구하고 선언했는데, 그와 같은 일이 부활 로마제국에서도 일어난다고 성서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히틀러도 제3국이라는 명칭을 사상 최강의 제1제국 ‘신성로마제국’에서 따왔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이때가 되면 유태인들은 자기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열심히 도망하게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성전재건이라는 어려운 일을 이루어준 그를 메시아로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최대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 25절로 다시 눈을 돌려보자.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여기에도 짐승이 성도를 괴롭게 할 것임이 예언되어 있는데 그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이것은 3년 반을 의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도 3년 반이 반복된다.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리라.” 마흔 두 달이라는 것은 3년 반이다.

성서의 통일성은 분명하다. 부활 로마제국의 총통은 깜짝 놀랄 7년간의 평화조약으로 글로벌세계의 정점에 올라서게 되고, 하이테크를 이용하여 인류 일원관리체제를 확립시키고, 경제부흥과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는 기꺼이 그에게 권위를 넘겨준다. 그러나 3년 반이 지나면 그는 평화조약을 버리고 역대 황제와 같은 길을 간다. 세계에 대하여 황제로서 스스로를 예배하도록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는 세계 총독부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유태의 제3성전의 지성소에 자신의 자리를 둔다. 이때 세계는 그가 제2의 히틀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를 최후의 분쟁으로 이끄는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제5장 성서를 알면 세계가 보인다

 

홀로코스트의 음산한 태동

 

다니엘과 같은 시대에 또 한 사람 하나님이 세운 위대한 예언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에스겔인데, 그 또한 ‘끝날’에 관한 예언을 한다. “구름이 땅에 덮힘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너’라는 것은 ‘곡’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로서 곡이 ‘내 땅’, 즉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해온다고 하는 매우 확실한 예언이다. 그렇다면 이 일은 언제 일어나는 일일까? “열국에서부터 모여 들어오며 이방에서부터 나와서 다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고 했으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부흥하고, 그것도 안심하고 살고 있을 때이다. 그렇다면 평화조약이 체결된 후에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에스겔 38장의 예언은 곡과 그가 이끄는 군세에 대한 고대사회의 민족적 배경을 밝혀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가 이 민족 집단을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곡은 대수장으로 마곡이라고 불리는 고대국가를 지배했으며 메섹과 도발이라는 고대민족을 이끌고 있다. 이들 명칭은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많은 고대문서 속에도 등장하는 이름으로 현대의 민족분포를 조사할 때 매우 유익한 고고학적 자료가 된다. 대수장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원어 로시(Rosh)는 메섹과 도발 지역을 포함한 세력인데 도발은 도보로스크(러시아 최대의 주)의 어원이며 메섹은 모스크바의 어원으로 이들 부족은 분명히 현재 러시아인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역사가 요세푸스는 마곡의 자손이 흑해와 카스피해의 북쪽에 정착한 종족으로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정착한 민족이 마곡의 후예인 스키타이인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북쪽 끝에서 공격해 오는 러시아는 단독으로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동맹국과 연대 플레이를 한다고 했다. “그들과 함께 한 바 방패와 투구를 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고멜과 그 모든 떼와 북쪽 끝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내리라.” 여기서 바사(페르시아)는 오늘의 이란과 파키스탄의 일부 시리아, 요르단, 아프가니스탄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외에 구스, 붓, 고멜, 도갈마가 거명되고 있는데 구스는 에티오피아이며 붓은 리비아를, 고멜은 독일이고, 도갈마는 아르메니아 혹은 터키를 가리킨다. 종말의 시대, 글로벌화 되는 세계의 하나의 관리체제에 반기를 들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침략해오는 북방세력은 매우 거대한 군사동맹이 되는 것이다.

 

에스겔 38장은 오늘의 러시아 정세와 주변 여러 나라의 동향을 탐구하는 매우 중요한 국제적인 보고서라고 말해도 좋다.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에스겔 38:23). 결국 전쟁은 러시아군의 대패로 끝나고 이 일로 이스라엘은 또다시 대 부흥이 되고 적그리스도를 믿던 유태인의 눈이 완전히 열려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적인 마지막 전쟁의 개막이 된다.

 

유프라테스 강을 넘는 붉은 기마병

 

성서를 조사하면 인류가 최종국면에 도달할 때 아시아에서 강대한 세력이 탄생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프라테스에 쏟으니, 강물이 말라버려서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마련되었다.”(계시록 16:12). 인류의 최종 전쟁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이 왕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서 이스라엘로 침공해 들어온다. ‘왕들’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복수의 연합군이며, 이스라엘에서 보면 해 돋는 쪽은 극동의 나라임에 틀림없다. “사람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해 풀어놓았다.”고 예언된 이들은 무서운 살상능력을 가진 아시아 연합군이다. 현재 아시아에 존재하는 초 대국으로 핵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말 안 해도 아는 ‘중국’이다. 그 천사들이 거느린 기마대의 수가 이 억이나 된다고 한 요한은 세계인구가 2억도 되지 않은 시대에 그런 구체적인 예언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미국의 <타임>지가 중국정부의 발표로서 “현재 중국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이 2억이며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6장 바이블 리얼리티

 

세계에 군림하는 성서의 백성

 

자본주의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국가적 전략과 기업의 이익이 기본적으로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미국에서는 안전보장의 전략요소인 군사기술, 에너지, 식량, 금융, 정보, 지적소유권 등의 정치 전략과 기업전략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잘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 미국 국내에서 절대적인 힘을 과시하고 있는 유태자본그룹의 계열 회사가 경제 전체에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을까?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금융경제가 실체 경제를 훨씬 초월하는 거대한 몬스터로 성장하여, 국가를 초월하는 시장을 형성하는 원리인 글로벌 세계로 통일하려는 미국지배계급과 재벌과의 융합은 당연한 것이다. 유태계 재벌을 포함한 구미 자본가 그룹과 유럽 귀족 그룹은 세계 경제에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글로벌리제이션의 추진파인 것이다.

 

이전에 투자가들의 금융시찰여행을 동행하여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동행인 중 한 사람이 과거 30년간 금의 움직임을 관찰했을 때 금융거래는 금융시장의 조작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각도에서 리스크관리를 연구한 결과 ‘성서적 무엇’이 근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 때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심히 놀랐다. “펀드, 혹은 운용이라고 말하지만, 처음부터 영국귀족들의 재산을 지키고 증식시키기 위해서 유태인이 만든 게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유태인의 파워와 영향력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유태인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금융경제가 돌아가는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서를 알지 못하면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완전히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사 최대의 터부 - 유태인은 누구인가?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의 국가이면서도 내부사정은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다. 유태인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혀 다른 생활습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 두 종류의 유태인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아시케나지 유태인과 세파디 유태인이다. 아시케나지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독일을 뜻한다. 이들은 중세로부터 유럽에 이주한 유태인으로 1948년 이스라엘공화국 건국 후 대거 이스라엘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즉 백인계 유태인의 총칭인 것이다. 한편 세파디란 원래 스페인을 의미하며, 지중해 연안, 특히 스페인에 살고 있던 유태인으로 이들은 중동이나 북아프리카로 쫓겨났다가 이스라엘로 이주해온 셈계의 사람들이다. 텔아비브의 고급주택지에 사는 부유층 엘리트들은 아시케나지이며, 한편 저소득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세파디이다. 건국 후 세파디가 수상이 된 적은 아직 없다.

몇 년 전 이스라엘 국내에서 아시케나지와 세파디의 대립이 격화되었을 때 밤중에 “아시케나지는 하자르로 돌아가라!”라는 비난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여진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세파디가 주장하고 있는 아시케나지의 고향나라는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8세기 이전의 세계에는 아주 적은 혼혈을 제외하고는 백인 유태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 수많은 백인 유태인이 등장하게 된 것은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것이야말로 수수께끼이며 백인 유태인의 뿌리에 관한 세계사 최대의 금기사항인 것이다.

 

1977년 자신도 아시케나지 유태인이었던 유명한 작가 아서 케스트러가 『제13지파』라는 책을 내놓았다. 백인계 유태인의 뿌리를 성실히 조사해서 쓴 이 책은 세계사의 상식을 근본에서부터 뒤집는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출간을 금지한 나라도 있다. 1983년 케스트러는 수수께끼의 자살을 하는데 당시 신문기사에는 이 책을 저작 목록에서 생략하고 있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당시의 서한이나 기록에 근거한 학술연구가 대부분 사실로 판명되었다. 세계 유태인의 90%를 점하는 아시케나지는 사실상 아브라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터키계 백인(코카소이드)인 하자르인을 뿌리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7세기경 코카서스에서 카스피해 북쪽 중앙아시아에 인구 약 100만 명 규모의 하자르한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 그들은 터키계 백인들이었으나 국교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동로마제국과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사라센제국은 하자르한국을 가운데 두고 정치적인 대립을 하고 있었다. 점점 양국의 종교적 간섭을 받게 되고 어느 쪽의 종교로 국교를 정해도 국가 전체가 전화에 휘말리게 될 상황에 놓이게 된 하자르왕 칸 부란은 양쪽 종교의 뿌리인 유태교로 개종했다. 이 정책의 결과,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셈계 민족이 아닌 유태교 국가 탄생’이라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후 하자르한국은 몽고제국의 공격으로 12세기경 멸망했고 이때 하자르한국에서 발생한 대량의 난민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동유럽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이 개종유태교도인 하자르난민이 나중에 바로 아시케나지 유태인이라고 부르게 된 사람들이다.

 

물론 백인유태인을 가리켜 ‘거짓 유태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유태공동체에서는 구약성서시대부터 언제나 개종한 외국인도 ‘할례’를 받으면 유태인으로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 셈족의 사람이 돌연 셈족으로 변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속에는 셈계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유태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세계에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국제금융그룹을 형성하고,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 600만 명의 유태인학살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유태인은 국제사회에서 유태인 국가의 재건을 승인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대참살에 의해 흘려진 피가 아브라함의 자손의 피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유태인 국가수립에 대한 역사적 토대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을 살펴보면 왜 이스라엘공화국이 ‘유태인’이라는 말의 정의를 애매하게 방치하고 혈통에 따른 유태인의 존재 의의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지가 이해된다. 중동문제는 복잡한 유태인 국가 내의 이중구조라는 현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서라는 필터가 없다면 유태인이 누구냐 하는 것마저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긴 역사 속에서 아랍인과 유태인이 오늘날과 같이 증오하고 죽이고 하는 일은 없었다. 유태인도, 아랍인도 함께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셈계 민족이며,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셈계 민족의 독특한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세기 초반까지 팔레스타인에서 현재와 같은 유혈항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은 증오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시킨 원동력은 ‘시오니즘 운동’이다. 이 시오니즘 운동의 배후에서 철저하게 지원하고 자금을 원조한 사람이 유태인 대부호 로스차일드 경이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정부는 유태인에게 연합군을 지원하면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재건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 벨포어 선언 이전에 아랍 쪽에도 아랍국가수립을 약속하고 있었다. 바로 ‘후세인, 맥마흔’ 선언이다. 영국의 이러한 이중외교가 정치적인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원이 된 것이다. 그 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동정적 국제여론을 얻은 시오니즘 운동은 염원인 유태국가수립을 달성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히틀러에게 막대한 자금원조를 한 것도 다름 아닌 로스차일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오니즘은 비셈계민족 하자르인들의 민족주의 그 자체라고 생각해도 틀림없다. 유태계 미국인 저널리스트 알프레드 M. 리리안슬은 『유태의 커넥션』에서 시오니즘의 실태를 고발하고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아브라함의 계약’이라고 말한다. 이 계약의 목적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축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축복 받은 유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보는 것으로 이교의 인습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유일신을 알게 되고 그 축복이 모든 민족에게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유태민족이 하나님에게 선택된 것은 그들이 타민족보다 더 ‘우수했기’ 때문도, 그들이 ‘우월 민족’으로써 군림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모든 민족에 대한 ‘축복의 근원’이 된다는 목적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유태인들은 아브라함의 계약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이방인을 멸시하고, 자기들만이 우월한 민족이라고 하며, 더구나 우상숭배에 빠져서 예언자들의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리리안슬은 시오니즘이야말로 왜곡된 선민의식에 기초한 잘못된 민족주의이며 과거의 유태교도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과거 예수를 적대한 유태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의 토지를 사들여 유태인 국가를 만들려고 궐기하기 시작했을 때 당시 이미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던 초 정통파 유태인들은 시오니스트 운동에 반대했다. 그들은 유태국가재건은 완전히 하나님의 손으로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서를 믿는 신앙에 따라 정치적인 시오니즘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 공화국의 독립을 쟁취했다. 이것은 실로 인간적인 생각으로 승리하겠다고 하는, 성서가 말하는 전형적인 실패의 반복이다. ‘신앙으로 얻어져야 하는 숭고한 비전’인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적인 힘으로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결과적으로 예언은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방법은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어난 사실은 예언을 성취한 것이었다. 이렇게 피로 얼룩진 역사를 창출한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에 결과로서 일어날 현실을 미리 예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가상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슬람교도는 알라의 이름으로 테러를 반복한다. 기독교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탄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유태교도는 야훼의 이름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한다. 그것을 본 무신론자는 “그러니 하나님은 없는 거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모두 자신의 선입관과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일 뿐이다. 인간의 에고가 불식되지 않는 현실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비난한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이런 일이 생긴다”고. 그러나 성서는 태고적부터 선언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악이 나타난다고. 토대 없는 맹신, 실천하지 않는 신조… 이렇게 무익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가상현실을 만드는 기술도 인간의 죄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공상이 아닌 현실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직시하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것은 버추얼 리얼리티가 아니고 바이블 리얼리티인 것이다.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이란 그리스어의 로고스(logos)로서 ‘원리’라는 뜻이다. 성서는 아주 먼 옛날부터 이것을 선언한다. 이는 우리 존재의 뿌리에 관한 커다란 선포인 것이다. 또한 성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세상이 로고스로 창조되었고 인간은 창조자의 지고한 의사에 의해 디자인된 존재라고 하는 선포이다. 당신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고 당신의 존재 그 자체가 만유(萬有)의 기적인 것이다.

 

글쓴이:마레히사 이시이

1965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94년 도미하여 세계적인 NPO 갈보리 채플에서 성서학, 일반 카운슬링 등을 연구한 후에 목사로 임명되었다. 현재, 기독교의 범주를 넘는 성서해설로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으며 오랜 성서연구의 결과가 본서이다.

 

 
 
 

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 영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