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우리의 영원한 본향
보이드 니콜슨(J. Boyd Nicholson)
요 14;1-3, 계 21:1-4, 9-13, 22:3-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다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주님을 다시 뵙게 된다는 것이 오늘날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한 사실이 내 손의 수고와 내 마음의 사랑, 나의 삶의 성결한 수준과 천국을 그리는 나의 마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기도할 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는 간구와 함께 그 마음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마음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또 우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아는데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님의 백성들이 그러한 소망을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기를 바랬고, 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우치기를 바라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류 시인은 다음의 시를 통해 순전한 인간 마음의 갈망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놀라운 곳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곳을 시작의 땅이라 부르면 어떨까요?
그래요 그곳은 우리 마음의 상처와 연약함을
그 문 앞에 벗어 던질 수 있는 곳일 거예요.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그것들을 도로 입을 필요가 없겠죠.
이 시인이 노래한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녀가 모르고 있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곳을 천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공상적이고 신화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북미 인디안들이 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소에 꿈꾸던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을 가로질러 떼지어 달리는 버팔로라는 물소들을 마음껏 사냥할 수 있는 곳으로 천국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 그러한 곳이 천국일 수는 있겠지만, 저에게는 아닙니다. 바이킹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전사들의 명예의 전당이라는 발할라(Valhalla)라는 곳인데, 그들은 그곳에 서서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동양의 신비종교에서 생각하는 천국은 너바나(Nirvana)라는 곳으로, 즐거움과 고통의 의식이 없는 지복의 장소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마다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실제로 가보았거나, 그러한 장소를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만 천국의 존재와 모습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머리를 들어 우리가 장차 들어가 살게 될 영광스러운 영원한 처소에 대한 통찰력을 구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어느 때라도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본 대로 주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은 천국에서 내려오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부르셨으며, 부활하신 후에는 천국으로 올리워 가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이제 천국에 앉아 계시며, 장차 호령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천국에서 영원히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열어보면 그러한 천국의 영광에 이르는 길에 대해 보게 되는데, 그 길은 험하고, 우리 면전을 때리는 세찬 바람이 있으며, 또 그 길에서 우리를 이해해줄 세상 친구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이 시간이라는 한계를 너머 영원한 세계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존재가 결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수 천만년의 세월이 오고 또 가고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질지라도, 우리는 영원한 시간 속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가졌던 영적인 생각으로, 저는 그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겨우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제가 "영원"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물었지요. "아빠, 영원이 뭐예요?" 그때 아버지께서 들려주셨던 내용들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이후로 "영원"이라는 단어는 제게 경외심을 일으키는 인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단어가 제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기에 저는 주님께 그것에 대해 이제 그만 생각하게 해달라고 구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끝도 없이 사색만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 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곳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곳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상상력은 끝없는 무언가에 대한 생각에까지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원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별들의 탄생으로부터 마지막 우주의 대폭발이 있게 될 때까지, 이처럼 광대한 기간조차도 하나님의 영원이라는 시계에서는 한번 '똑딱'하는 시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광대하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영원 무궁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영원을 보내게 될까요? 우리는 천국을 그저 "위"에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밖"이라고 하는 말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이라는 광활한 곳도 분명 하나의 영역,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이라고 명명되고 있는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주 예수님도 "내가 처소(place)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장소적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과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천사들이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어째서 주님은 우리를 당신이 계신 곳에 있게 하기를 바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매우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주님을 한번도 낙심시킨 일이 없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구원받은 후 죄를 한번도 지은 일이 없기 때문에, 또는 주님을 온전히 섬겼기 때문에, 아니면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으로 천국을 장식하기까지 주님이 기다릴 수 없어서 일까요? 아닙니다. 결단코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곳에서 함께 있기를 바라시는 것은 다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그 얼굴을 마주보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주님은 우리를 천국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희로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리라".
우리가 영원한 시간을 보내게 될 이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천국은 민족적인 갈등이 없는, 만왕의 왕이 다스리는 한 왕국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그 나라의 법이며, 의가 삶의 규범이고, 거룩이 삶의 질서이며, 평화가 그 놀라운 왕국의 분위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러한 왕국이 존재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천국은 또한 사회적인 문제가 없는 하나의 도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거주하는 도성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도성을 보면서 기대할 수 있는 구조는 어떠한 것일까요? 비록 이 도성이 천국 자체가 아니라 천국의 수도일지라도, 우리는 그 도성을 통해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 그 실마리를 얻게 됩니다. 이 도성은 높이와 길이와 넓이가 모두 12,000펄롱(2,414km)입니다. 이 도성은 오늘날 인도와 그 넓이와 길이가 같습니다. 그 엄청난 크기가 상상이 되십니까? 이 도성은 참으로 어떠한 제한이나 한계도 없는 장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사야 33장에서는 그곳을 "광활한 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도성은 안전합니다. 그 도성은 크고도 높은 성벽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처음으로 받았던 사람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성벽은 밖의 대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요새의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 대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성이 있습니다. 완전한 평화와 평온이 감도는 성입니다.
그 도성은 견고합니다. 그 성의 열 두 기초석은 하나님의 영원한 집의 놀라운 견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성에는 성을 흔들만한 조금의 요동이나 그 성을 놀랠만한 악의 침입이 있을 수 없습니다(그러나 저는 그 성을 흔들 정도의 큰 기쁨은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천국은 행복의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복된 하나님, 그리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곳입니다. 천국은 성도들의 합창소리로 가득한 조화를 이룬 장소입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합당하시도다". 과연 무엇이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하여금 노래하도록 만드는 것일까요? 천국의 영장(the Chief Singer of heaven)이신 주님이 일어 서셔서 주 예수님의 아름답고 황홀한 음성으로 첫 음을 내실 때(습 3:17, 히 2:12 참조), 과연 무슨 일이 있게 될까요? 바로 이어서 온 성도들의 회중이 화답하여 천국의 합창인 할렐루야를 터뜨릴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 안에서 부풀어올라 터질 것만 같은 감정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천국에는 누가 있을까요? 하나님과 어린양이 천국에 계십니다. 그 사실이야말로 천국을 천국되게 하는 것입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천사의 무리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속함을 받은 자들도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천국문에 새겨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허다한 무리들도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주님과 같이 될 것이지만, 우리가 입게 될 영광이 다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고전 15:40-41 참조). 우리 하나님은 다양성의 하나님이십니다. 들의 꽃을 보십시오. 바다의 물고기들을 보십시오. 하늘의 별들을 보십시오. 주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한번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합니다.
천국에서 누리게 될 축복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천국에서 누리게 될 축복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천국에는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천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는 저주가 없을 것인데, 저주는 율법을 어긴 데서 온 것입니다(갈 3:10). 천국에는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사랑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있었습니다(고전 16:22). 그러나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에 대한 저주가 있었습니다(갈 3:13). 그러나 우리 영광스러운 주님을 조소하고 경멸할 죄인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는 밤이 없을 것입니다. 밤이 없다는 사실도 축복이 될 수 있을까요? 밤은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아무도 지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는 바다도 없을 것입니다. 바다는 분리를 의미하는데,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던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를 당한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아름다운 강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강들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으로, 천국의 경치를 상쾌하게 하고, 명랑하게 해줄 것입니다.
천국에는 성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전은 필요치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계 21:22)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모든 곳이 다 거룩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모든 행동이 다 거룩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모든 말이 다 거룩한 대화가 될 것입니다.
천국에는 사망이 없을 것입니다. 사망이 없다는 것의 의미는 곧 이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자주 순회전도를 위해 집을 떠나곤 했는데, 집을 떠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저를 괴롭히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러한 이별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천국의 언어 가운데 최소한 세 가지는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즉 "할렐루야", "아멘", 그리고 우리의 구주이신 분의 이름인 "예수"입니다. 그러나 저는 천국의 언어가 결코 될 수 없는 한가지 단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곧 이별의 인사인 "안녕(goodbye)"이라는 단어입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결코 "안녕"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는 애통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애통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언가 결핍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도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을 말합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삶의 필요한 것들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애통에 대한 가장 처절한 경험은 바로 하나님 없는 인생입니다. 천국에는 애통하는 것이 없는데, 이는 우리에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은, 비록 그것이 수천만 번 계속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는 곡하는 것(눈물)이 없을 것입니다. 슬픔의 눈물뿐만 아니라, 기쁨의 눈물도 없을 것입니다. 눈물이란 우리가 감정의 한계에 이르렀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우리는 한량없는 기쁨을 넉넉히 감당할만한 분량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는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언가 잘못 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이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심각한 문제에 대한 징후입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무언가 잘못되는 일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금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정금은 이 세상에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또 죽이기도 합니다만, 천국에는 그저 도로를 포장하는데 사용합니다. 우리가 밟고 다닐 것이 바로 정금입니다.
우리는 행복에 그지없는 경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둘러싼 새로운 성, 우리 위에 새로운 하늘, 우리 아래 새로운 땅, 우리 마음속에 새로운 노래, 우리 위에 새로운 이름, 그리고 우리 앞에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 이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천국, 천국은 성도들의 집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최고한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천국의 최고한 축복은 앞서 말씀드린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22장 4절에서 최고한 축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천국을 천국되게 하는 것입니다.
♥ 보이드 니콜슨(J. Boyd Nicholson). 영어 사용권의 대표적 크리스챤 메거진인
출처: 크리스챤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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