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이긴 자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15:2)
믿음으로 이긴 자들에 대하여 요한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로 분명하게 알리셨다. 이 단원에서 상고할 내용은 짐승(Ideology)과 짐승의 우상(Image)과 그의 이름의 수에 대해서는 앞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상고하였다. 오늘은 특별히 유리 바닷가(θaλασσαν uαλίνην)는 어디며, 이긴 자들이 서있는 바닷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내용으로 대지를 넷으로 나누어서 상고하도록 하겠다.
①.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곳.(2)
②.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2)
③.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서있는 곳.(2)
④. 어린양의 노래.(3-4)
유리바다와 같은 곳
또 내가 보매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2)
불이 섞인 바다가 있는데, 그 바다는 유리와 같다 하였다. ‘허올리노스(uάλινοs)’는 투명함을 나타내므로 바다가 유리와 같이 투명하게 깊은 밑바닥까지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유리와 같은 바다에 대한 지금까지 전해오는 해석들은, ①. 어떤 이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보좌를 반영한다.” 하였고, ②. 다른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홍해에서의 사실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설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보다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신 말씀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이라.(사62:4)
유리 바다와 같은 곳; 유리가 아니라, ‘같다’는 바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빛같이 나타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공평한 의로 구속시키시는 ‘쁄라(?וּב?)’를 말한다. 이사야는 쁄라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젊은 청년이 처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만남”과 같이,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올라갔을 때, 첫 번째 밟는 땅이라 한다. 쁄라 땅을 밟을 수 있는 상태는, ⓐ.사람이 죽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육체와, ⓑ.죽어서 영만이 들어가는 두 가지 상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죽은 후에 육신은 땅에 묻어놓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그러나 음부(aδηs-헤데스)와 바깥 어두운 데로 일컫는 곳(βήμα-베마)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연단받는(βήματι-베마티) 사람들은 이곳 쁄라를 밟지 못했다. 다만 바깥 어두운 데로 가지 아니하고 직행으로 낙원과 왕국과 시온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 쁄라를 밟아보았다. 그렇지만 인류역사상 죽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육체와 함께 쁄라를 밟은 사람은 오직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 뿐이다. 그러므로 유리와 같은 바다는 하늘나라에 도착하는 관문 격이지만, 온전한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준의 영적 사람들만이 첫 발로 밟게 되는 땅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하나님과의 결합되는 장소를 이사야는 쁄라(ה?וּב?) 땅이라(사62:4) 하였고, 요한은 “유리 바다와 같은 곳”으로 설명하였다.
이 교훈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시온에 소망을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아들들에게 주시려고 창세전부터 준비하셨기” 때문이다(엡1:3-5).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만큼 온전하지 못해서 유리와 같은 바다를 건너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의 날이 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삶을 살다가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부활되고, 또 예수 안에서 삶을 살다가 어린양의 신부로 들림 받은 144,000명은 “불이 붙은 유리와 같은 바다”를 건너서 쁄라를 밟게 된다. 그 외에는 모두가 죽임을 당하고 이 바다를 건너간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성결이 없으면 “불붙은 유리와 같은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는 곳임을 말한다.
유리와 같은 투명함; 유리와 같은 바다라는 단어에 숨겨진 의미는 투명(Transparency)함에 있다. 깊은 속까지 보이는 것이 유리라는 속성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시온에서 인간의 심령을 살피심을 말하기에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계2:23)” 하였다. 불 심판을 앞두고 구원시킬 자와 저주할 자를 공평하게 가려내서 구원시킬 자들은 하늘나라로 끌어 올리심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유리와 같은 바다”라는 의미는 이사야가 말 한대로 “구원받고 하나님과의 결합되는 위치”임을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잘 지키면 정결한 ‘처녀’라 하고, 믿음을 잃어버리면 ‘이혼한 여자’ ‘과부’ ‘버림받은 여자’등으로 표현하신다. 쁄라를 유리 바다와 같다는 의미는 이러하다. 인간의 심령상태를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거룩함에 따라 구원을 결정하신다. 이러한 관찰은 ‘심령골수는 물론이요, 마음의 생각이나 뜻까지 불꽃같은 눈으로 인간의 속을 살피실 때(히4:12)’ 유리 안을 보듯이 투명하게 보신다는 뜻이다.
짐승과 그 이름의 수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2)
이 내용은 앞에서 여러 번 상고한 13장 1,15,17절 말씀이며 세 가지는 같은 의미임을 말한다. 대 격변이후에 지구정부가 시작되면서 사회는 혼돈상태였다. 그런 때에 사탄의 사상을 받은 지구주의자(Globalist)들이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새세계질서(NewWorld Order)였다. 지구주의자들 중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지구정부통치자로 나타난 인물을 적그리스도정부통치자라 한다. 지구주의자들은 하루속히 지구사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추진시켜왔던 새세계질서(NWO) 정책에서 ‘새시대비법(New age mystic)’은 기독교 탄압으로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세시대비법에는 여러 가지 조항들이 있으나, 그중에서 특별히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서 착안된 것이 ‘짐승의 표’ 또는 ‘666표는 짐승의 수’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말하는 “짐승과 그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라는 말은 이러하다.
ⓐ 짐승(θηρίον-데리온)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Ideology)을 말한다. 지구정부 통치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때문에 그는 적그리스도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 그의 우상이라는 εiκόνοs(에이코노스)는 어떠한 물체가 아니라 행위에서 갖고자하는 갈망을
말한다. 그리고 경배라는 αuτοw(아우토우)는 재귀동사로서 ‘스스로 함께, 또는 그와 같이’
이므로 자기 유익을 위해 갖고자 하던 것을 취함이 경배이므로, 지구정부가 시행하는 그러
한 제도와 문화에 굴복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생이 경배이며, 이것이 우상에게 경배함(eκ τήs
εuκόνοs αuτοu-스스로 그녀(사탄)을 닮은 생을 살아가다)이다.
ⓒ 이름의 수는, 지구주민신분증(666)을 짐승의 이름으로 계수하면서 사람의 손에 Chip을 넣음
을 말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양육시키고 보호한 지도자들이 있게 되는
데, 그들이 곧 두 증인으로서의 대환난사역자들이다. 그들은 제7장에서 말하는 144,000인
이며, 각기 맡겨진 임무가 다른 12지파별로 구분되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기고 벗어
난 자들과 두 증인으로서의 사역자들이 사명이 끝나고 죽임을 당할 때, 그들이 죽은 것이 아
니라, ‘3일반’이라는 3년 반 동안에 죽임을 말한다. 그렇지만 두 증인으로서의 사역자들은
부활되어 하늘나라로 끌리어 올라갔으나, 여기에서 이기고 벗어난 자들은 부활되지 못하고
다만 영만이 하늘나라 유리와 같은 바닷가에 서있는 모습을 말한다.
이기고 벗어난 자들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2)
이기고 벗어났다하여 저들이 처음부터 믿음이 온전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는 출석했던 사람들이다. 1년에 한두 번 또는 매주일에 예배에 출석은 하였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행위의 온전함이 없었던 자들”이었다(3:2). 그러면서 저들은 “회개하지 아니했고, 살아보려고 일깨지 아니했던” 자들이었다(3:3). 믿음이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한 상태이면서도 잘 믿는 줄로 착각하였던 자들이다. 그러기에 대환난에 남겨진 것이다.
신자들이 믿음이 온전치 못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대환난을 겪으면서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이름을 붙들고 죽임을 당한 믿음, 곧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을 때, 기쁨으로 하나님과의 결합되는 장소가 유리와 같은 바닷가라고 이사야는 말한다(사62:5). 유리와 같은 바다는 ‘소망’으로 건너야할 쁄라(ה?וּב?)다. 지금까지 이 바다를 건너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문으로 들어와서 시온으로 향하여 믿음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여러 가지 유혹에 이끌려서 뿔라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쁄라 앞에까지 갔다가 되돌아섰다.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는데, 시온에 들어갈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쁄라를 건너가지 않으려하는 것이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3-5)
유리바다에 서있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신앙적으로는 무지했던 사람이었다. 시온으로 향하여 쁄라까지 오기를 싫어서 유리와 같은 바다를 건너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느니라.”하였다(잠13:4). 신앙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이 불붙는 유리와 같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물어보면, 이렇게 말한다. ― 나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을 믿는다. 그리고 그의 율법에 대한 자신의 순종을 은혜롭게 받아주심으로써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시고, 저주에서 건저주실 것을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로를 통하여 자신이 종교적 행실들이 아버지께 상달되게 하시며, 이로서 자신은 의롭게 됐다. ― 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 자신의 것이지, 우리의 의는 아니라는 사실을 왜곡하지말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은 행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도적질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신앙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스스로 환상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신앙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거짓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은 행하
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행한 행위로 이루신 의를 도적질해서 자신에게 적
용시키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러한 믿음은 기만적인 것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 날에 스스로의 [불]의로 인
해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의롭다 함을 주는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율법에 의해 상실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의란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순종을 받아들여서 의롭다 함을 주시도록 만드는 행위계약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율법에 대한 개인적 순종이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하지는 아니하고 말로만 믿는다던 사람들이 대환난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신앙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의로 인하여 자신이 의로워 졌다’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된다고 ‘믿음’만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두아디라교회는 다른 교회가 갖지 못한 ‘믿음’이 좋아서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으면서도 휴거에서 탈락되는 모습을 보일뿐 대환난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제일 이라며 ‘사랑’만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다른 교회가 갖지 못한 ‘사랑(άϒαπη)’이 있었음을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도 받았으나 휴거에서 탈락되었고 또한 대환난에 남겨졌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소망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아니한다. 예수님은 시온을 얻고자하는 소망이 없으면 시온을 얻지 못한다 하셨고, 바울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의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강림을 소망하는 자들에게도 휴거의 면류관을 주신다 하였다.(딤후4:16)
여기서 ‘불이 불은 유리와 같은 바다’ 가에 서있는 자들은 지구상에 대격변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천국을 향한 소망을 가지지 아니했기 때문에 대환난에 남겨졌었다. 그러한 그들이 두 증인으로서의 사역자들로부터 올바른 가르침과 인도함을 받으면서 그동안에 잘못 배웠고 또 자신들의 신앙이 잘못이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잘못을 깨닫고 돌아선 행위가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아니했고, 이마에나 손에 666표를 받지 아니한 믿음으로 성숙된 것을 이긴 자라 한다. 이처럼 성숙된 믿음을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공중강림 이전에는 천국을 향한 소망을 가지지 않아서 환난에 버려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저희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너를 버려진 자라 칭하지 아니하고, 다시는 황무지라 칭하지 않는다.”하시면서 헵시바(ץ??)와 쁄라(ה?וּב?)에 관한 설명을 하였다. 헵시바는 ‘하나님의 기쁨이 그에게 임한다.’는 뜻이다. 뿔라는 ‘결혼한 여자’라는 뜻이므로 대 환난에서 이긴 자들이 유리와 같은 바닷가에 서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사62:1-)
어린양의 노래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 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 하리이다 하더라.(15:3-4)
지구정부가 강요하는 통치자 경배사상과 지구주민신분증(666)을 거부하는 믿음을 이긴 자라 하였다. 믿음에서 이긴 자들이 ‘불이 섞인 유리바다가’에 서서 구원을 시켜주신 어린양에게 감사의 찬양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저들이 부르는 노래를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라 하였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아올 때에, 앞에 놓여진 홍해로 다 죽임을 당하는 줄로만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세의 노래에 대하여 홍해를 건너고 애굽 군병과 병거를 수장시켰을 때에 불렀던 구원의 노래라고 해석했다(출15장). 모세의 노래는 그가 죽기 전에 지어서 백성들이 부르게 하였었다. 그러므로 홍해사건은 모세가 죽기 40년 전이므로 유리바닷가에서 부르는 노래는 모세의 노래가 아니다. 모세의 노래에 대하여 모세 자신이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하라”하면서(신31:19),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하였다(신31:22). 그리고 신명기 32장 1- 43절까지 쓰인 노래가 모세의 노래라 하였으므로, 홍해를 건널 때 불렀던 모세의 노래는 아니다.
환난에 남겨져서 지구정부 통치자숭배제도와 666문화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박해를 받고 소망이 끊어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육신이 죽임을 당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끄럽게나마 구원을 받게 되었기에 어린양에게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노래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가르쳐주었던 노래처럼 어린양에게 감사와 찬양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린양의 노래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주심을 깨달아야 된다. 어린양의 노래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 몇 가지는 이렇다.
① 첫 번째로 어린양의 노래는 7장 10절에서 노래하는 의미를 말한다.
② 두 번째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주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자라하였다.
③ 세 번째로 어린양이 구원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다는 것이다.
④ 네 번째로 어린양을 만국의 왕이라 하였는데, 이는 만왕의 왕임을 말한다.
⑤ 다섯 번째로 주의 길은 의롭다.
⑥ 여섯 번째로 적그리스도의 이름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예수의 이름에 있음을
말한다.
⑦ 일곱 번째로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만을 영화롭게 해
야 된다고 말한다.
⑧ 여덟 번째로 거룩함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양만이 거룩함을 말한다.
⑨ 아홉 번째로 어떤 인간도 의로울 수가 없고 오직 어린양만이 의로우시다.
⑩ 마지막으로는 만국이 다 와서 주께 경배해야 되는데, 어두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은 적
그리스도정부 통치자를 경배하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었음을 말한다.
어린양의 노래; ‘불러 가로되’는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주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하였다(7:10). 지구상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혼돈(Chaos)상태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나타나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속이면서 인류를 구하겠다고 장담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속으면서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를 구세주로 생각하고 그를 따랐지만 결국은 인간의 삶이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뒤돌아 볼 때, 자신들을 구원시키신 분이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이기에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어린양 앞에서 큰 소리로 그리스도 예수에게 감사하며 찬양하는 노래가 어린양의 노래라는 말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 구절에 대하여 이사야는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이사야가 증거 한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입증시키는 노래다(사9:6). 짐승의 사상을 받아들인 자들은 어린양이신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전능자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를 전능자요 하나님이라고 속였는데, 믿음을 이기고 유리바닷가에 서서 보니 어린양이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깨달았음을 고백하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다.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다: 욥은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일을 행하시느니라.”하였다(욥37:5). 하나님은 못하심이 없으시다. 이러한 전능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세상에만 얽매여 살다가 환난에 남겨졌을 때, 살 소망도 없었다. 지구정부주의자들이 시행하는 제도 사회(Systemic community)에서 통치자의 이름으로 계수되는 666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였다. 바라는 것이 있었다면 통치자를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들이 강요하는 지구주민신분증이 되는 666표를 받지 아니하고는 살수 없는 사회였다. 그러나 두 증인으로서의 사역자들의 가르치는 대로 그런 것을 거부하며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아무런 고통 없이 영이 하늘나라, 곧 유리 같은 바닷가에 섰을 때는 신기하고 기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국의 왕이시여: 이는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라고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심을 설명한다(계17:14). 또한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함에서도 입증시키시므로 어린양을 만왕의 왕이시라고 찬양 드리는 것이다(사9:6).
주의 길은 참되다: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셨다(요14:6). 하늘나라로 가는 길은 예수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갈수 없으므로 예수만이 영생을 주는 길이시다. 모든 인간은 다 거짓되고 속되었지만 예수만은 진실하게 구원을 시키시므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만이 진실한 의가되므로 참된 길이라는 것이다.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저들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는 지구정부통치자가 두려움의 존재였었다. 그를 숭배하고 그에게 굴복하지 아니하거나, 그의 이름의 수를 받지 않을 때는 사정없이 처벌하였다. 그리고 지구주의자들이 시행하는 지구계엄령(Global martial law)에 따르지 아니하면 가차 없이 처벌하는 지구정부통치자의 이름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두려운 이름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의 입에서 말 한마디만 하면 지구정부도 망하고, 예수의 입에서 한 마디만 하여도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도 죽이는 이름이 어린양의 이름이라는 말이다. 사탄도 마귀도 귀신들도 다 예수님의 이름을 두려워한다. 믿는 성도들이 어두움의 권세를 쫓아낼 때도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는 것은 그것들이 예수 이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증거한다.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1:16) 또한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하였으니 예수 이름이 더 두렵다는 고백이다. (19:15)
영화롭게 하라: 말라기 선지자는 어린양은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시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영화롭게 하라 하였다(말2:2).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면 영혼의 축복을 받게 되지만, 마음에 예수를 두지 아니하고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것에게 경배하였으나,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쏟아지므로 유황으로 타는 불 못이라는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어떠한 고통과 박해가 있을지라도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를 영화롭게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마음에 두고 예수를 영화롭게 함으로서 구원을 받고 유리바닷가에 서서 어린양에게 감사하며 찬양의 노래를 한다.
주만 거룩하시다: 아무런 흠 없이 깨끗함이 거룩함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하였다(히7:26). 거룩함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내재적인 결과이다. 마음의 생각에 시기와 미움과 불평과 질투 같은 악함이 있고, 더러움이 있으면 결코 거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악함이나 더러움이 없으시므로 어린양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찬양한다.
주만 의로우시다: 거룩함은 내재적인 결과이나, 의는 외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의는 사람이 행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옳음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다”는 뜻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심판은 공평하시므로 의롭다는 뜻이다. ‘의’에는 상 주심과 벌하심으로 나누어진다.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분이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해야할 의무가 피조물에게 있다. 그러나 조물주가 심판하는 권세를 제2위격인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으니 어린양이 하시는 일이 의롭게 나타났다고 찬양하는 것이 어린양의 노래다.
만국이 주께 경배한다: 시편기자는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하였다(시86:9). 마지막 때는 생명을 얻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주께 경배하게 된다. 환난 때에는 사람들이 지구정부 통치자 곧 짐승에게 경배하고 그에게 굴복하였지만, 구원의 은총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경배를 드려야 될 대상은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가 아니라,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과 어린양이시라고 찬양하는 노래다.
이 단원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어떠한 황경일지라도 짐승에게 경배하거나 짐승의 이름으로 계수되는 666표를 받지 말아야 된다는 교훈이다. 그런 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의 이름을 마음에 간직해야 된다는 교훈이다. 그리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지구정부가 강요하는 제도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경고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8)하셨음을 깨닫고 날마다의 삶에서 예수 이름만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야 된다. 그 길만이 사는 길이요 믿음으로 이기고 벗어날 수 있다는 교훈이다.■
가져온 곳 : 블로그 :churchofpraise| 글쓴이 : 장죠셉| 원글보기
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 장죠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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