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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설교·6/장죠셉목사님

주의 재림과 신부로!....

 

                      주의 재림과 신부로 데려감과 남겨지는 대환난


   어느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마24:3) 그때나 지금이나 신실한 사람들은 주님의 강림과 마지막 때에 될 사건에 관심을 갖는 것은 성서적인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날 환난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하셨습니다.(마24:29)

 

사도 요한은 주님의 강림에 앞서 하늘의 징조를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고 각 섬들이 제 자리에서 옮겨진다" 했습니다.(계6:12~14)

 

주님의 강림

 

   우리가 신앙고백으로 암송하는 사도신경에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 합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강림은 다음 세 가지에 목적에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잠자는 신실한 성도들의 부활시킴에 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신실한 성도들을 데려감에 있습니다.

셋째는; 신앙이 온전치 못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대환난에 남겨서 육신을 심판하심에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주의 강림과 부활과 휴거를 알리는 내용은 많습니다. 열처녀 비유에서는 데려갈 자들과 버려둘 자들은 설명하면서 신랑을 주님의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강림이라는 적극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는 주의 강림과 주 안에서 잠자는 자들의 부활과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자신를 성화시킨 신실한 성도들의 휴거라는 주제로 다루고 있으나 대환난에 남겨질 자들에 대하여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달리 마태복은 24장 37~41절과 누가복음 17장 27~35절만이 주님의 강림과 성도들의 휴거와 대환난에 남겨질 자들이라는 세 가지를 함께 취급하고 있습니다.

 

(마24:37~41)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리라. (눅17:27~35)

 

   '임함'이라는 파라오우시아'강림, 재림, 내림, 현존' 등이므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강림 또는 재림이라 하겠습니다. '데려감'이라는 파라남바노는 '데려가다, 인수하다, 영접하다, 받다' 등이므로 어린양의 신부로 인정됨으로 땅에 남겨두지 아니하고 하늘로 데려감입니다. '버려둠'이라는 아피헤미'버리다, 포기하다, 가게하다, 이혼하다' 등이므로 어린양의 신부로 오지않기 때문에 데려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가도록 버려둔다는 뜻입니다. 

 

(살전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은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관련 성구=고전15:23, 살전2;19, 4:16, 5:23, 살후2:8, 약5:7~8, 벧후1;16, 3;4, 요일2:28)

 

   심판주의 강림에는 주의 강림과 성도의 부활휴거, 세 가지는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또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되려면 부활의 주인이 강림해야 부활이 됩니다. 그리고 데려감을 받으려면 데려가실 분이 오셔야 휴거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 셋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있다면 사두개인들 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인류를 영원히 타는 유황불로 보내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완악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아니하고 어두움과 합세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만 해 왔습니다. 회개라는 돌이킬 기회를 주면서 오랜기간을 참았으나 당신이 정하신 때가 되었기에 강림하여 환난으로 순종치 않는 자들의 육신을 심판을 하셔야만 됩니다. 때로는 이러한 대환난에서 재앙들이 어떻게 자비가 되고, 사랑이 되는가? 라는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결이라는 속성(성품)은 죄를 용서하실 수 없는 속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악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속성입니다. 쓰레기 같은 존재는 유황으로 타는 불에 넣어서 태워야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속성중의 자비라는 다른 속성은 벌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속성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당신의 자비를 나누어주어야 된다는 속성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성결의 수준까지 이르지 못했다 하여 유황으로 타는 불에 넣어버리면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 폭군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성결(Holiness)의 속성은 죄를 용납할 수 없고, 다른 자비(Mercy)라는 속성은 용납해야 된다는 상충되는 속성에 (Righteousness)라는 속성이 중재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Justice)는 옳은 것은 보상하고 잘못은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자신의 영을 성결하게 준비한 자들에게는 보상으로 부활과 휴거라는 긍휼을 베풀어서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죄악으로 자신의 영을 더럽힌 자들에게는 부활과 휴거에서 탈락시켜서 벌하심으로서 성결을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평한 공의(Justice)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런데 믿는 자들이 불순종하고 의로운 세마포를 더럽혔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계13:8). 그러므로 죄 지은 자일지라도 대환난에 남겨서 회개시키고 회개가 된 자들만 끌어 올려서 유황불 못으로 가지 않게하기 위해 대환난이라는 고통으로 구원키십니다.

 

   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비록 행위가 악해서 휴거에서 탈락은 되었지만, 그래도 예수 이름을 믿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황불 못으로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 이름을 부른 자들을 유황불 못으로 보내지 않으시려고 대환난에서 진정으로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죽게 해서라도 당신의 성결을 보호하시고 하늘나라로 끌어 올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서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시도록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성결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대환난에 남기십니다.

 

성도의 부활

 

주님께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하셨고, 또 "볼 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 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계1;7)

 

   각 사람과 찌른 자들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각 사람은 대환난에 남겨지는 사람들이므로 이론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사람은 로마군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과 마태복음은 "찌른 자들"이라고 복수로 표기 했습니다. 그렇다면 복수는 누구이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찌른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까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찌른 사람은 무지기수로 많을 것입니다.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때에 휴거보다 먼저 부활을 언급합니다.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나야 됨은 썩은 그들의 뼈와 살이 회복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실 때에 새로운 피가 채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사망의 연대에 따른 시차문제도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휴거자 보다 부활될 자를 먼저 언급한 것 입니다. (관련 성구= 마22;23,28,30~31. 막12:18,23. 눅14:14,20:27,33,35~36. 요5;29,11:24,25.행1:22,2:31,4:3,33,17:18,23:6,8.롬6:5,고전15:12~13,21,42.빌3;10.딤후2:18,히6:2,11:35.벧전1:3,3:21.계20:5~6)

 

휴거

 

(마24: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에크렉토우스)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4방에서 모으리라.

 

   주의 강림과 함께 천사들을 지구촌 곳곳으로 보낸다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택한 자를 찾기 위함입니다. 헬라어에서 택함을 '에크렉토우스' 합니다. 의미는 믿는 신자들 중에서 '뽑는다'는 단어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휴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휴거되겠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붙어있는 사람이라야 됩니다.(고전15:23)

 

   사도 요한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 곧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게 보전시킨 사람만을 뽑는다고 합니다.(계14:3~4).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휴거는 내가 원하는 마음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휴거시켜 주실 주인이신 주님으로부터 귀중한 존재로 인정받아져야 된다고 하십니다. 귀중함이 뽑는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항상 귀중함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됩니다.

 

(살전4:17) 그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첫째부활의 절정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부활된 사람들이 뼈와 살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을 때 비로서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순) 라 합니다. 은 '동시에, 함께, 같이'라는 With together라는 말이므로 구름위로 끌려 올라가는 때는 동시입니다. (관련성구= 마24:40~41, 눅17:34~36, 살전4:14. 고후12:2)

 

   형용사 에크렉토스믿는 신자들 중에서 '뽑힌 자, 선택된 자, 탁월한 자, 귀중한 자'이므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신자들 중에서 특별히 뽑아서 휴거시킨다는 말입니다. 휴거는 예수를 믿는 다고 교회에 출석한다고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휴거될 수 있을 만큼 자신을 거룩하게 성화시킨 신자라야 됩니다.

 

   영과 혼과 몸이 흠이 없어야 된다고 합니다.(살전5:23).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어야 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자이어야 되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처음 익은 열매로서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붙어있어야 됩니다(계14:4). 이렇게 되려면 본인의 행실로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브씨노스)가 입혀져 있어야 되고, 의로운 면류관(스터파노스)이 씌워져 있어야 됨은 필수 조건입니다.(계19:8. 약1:12)

 

(고전15:52)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죽었던 자나 살았던 자일지라도 변화가 되어야 됩니다. 변화라는 알라쏘는 '바꾼다, 변형시킨다, 변경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왔을 때 만났던 예수님의 변형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능력입니다. 이처럼 변화 받으려면 현재의 삶에서 변화, 곧 성화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성화가 되지 못하면 그날에 변화받을 수 없고, 변화되지 못하므로 휴거에서 탈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의라는 행위(엘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주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계3:2~3)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된 것을 굳게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못하였노니 그러므로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행위, 행위로써 성화가 됩니다. 행위에는 내적행위와 외적행위로 나누어지며, 둘을 행실이라 합니다. 먼저 내적행실은 시기, 질투, 분노, 옳지 않은 생각, 등 마음가짐이라 합니다. 외적행실은 말과 행동입니다. 이러한 내적 거룩함과 외적인 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지 못한 육신과 마음은 그날에 변화되지 못합니다. 스스로 변화되지 않으면 그날에 대환난에 남겨지게 됩니다.

 

대환난

1. 대환난에 남겨지는 원인

 

   앞에서 대환난에 남겨지는 원인은 행위 때문이라고 성경은 경고하였습니다. 그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대상을 보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휴거되지 못하고 대환난에 남겨지는 원인을 예수님께서 설명하십니다.

 

(계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이것들'은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전체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더하다' 앞에 부정사 '티스'가 있으므로 '더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실하고 더하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고통으로 더한다고 경고했기 때문에 대환난의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육신과 영혼의 고통으로 나누입니다. 육신의 고통은 대환난에 남겨져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영혼의 고통은 예수를 믿었던 자이기 때문에 음부로 보내지 아니하시고 바깥 어두운데로 쫓아내서 그곳에서 이를 갊이 있는 고통을 말합니다. 

 

   그러면 더하는 범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해석상의 표현을 잘못하거나 또는 명칭이나 지명들에서 표현상의 오류는 고의가 아니라 실수이므로 더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한다는 '에피테세이'는 '습격이나, 도전하는 자'라는 뜻이므로 예언의 말씀에 고의적으로 도전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예언들 중에서;

 

  (1).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받으면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계14:10~11)하셨는데, 666표는 상징이므로 받아도 좋다고 가르치는 것은 예언을 주신 주님께 도전하는 사람이므로 이런 사람은 대화난에 남겨집니다. 

 

  (2). 또 다른 유형은 예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사도 요한에게 주실 때, 인간으로서 설명하지 못할 말씀으로 주신적이 없는데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666 짐승의 표를 상징이라고 고집하며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예언을 주신 주님께 대항하고 공격하는 사람이므로 대환난에 남겨집니다.

 

(계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제하지 말라는 경고는 제하는 사람에게는 육신의 고통과 영혼의 고통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아페레는 '반역하고, 멀리하고, 끊어버리다' 등으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제한다는 의미는 예언의 말씀에 반역하며, 기록된 예언이 전달되지 못하게 끊어놓으려고 읽지 않고, 듣지 못하게 가르치지 않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고의 메시지를 듣지 못해서 지키지 못함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이유야 어찌되었던 우리 교계에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1).계시록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고, (2).어떤 부문은 수용하고 어떤 부문은 수용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가장 많은 경우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보내어 지시" 하였으므로 종들은 읽고 전해서 성도들로 듣고 지키게 해야 됩니다. (3).그런데 읽지 않았고, 가르치지 않은 것은 곧 예언서 자체를 폐기시킨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완전히 제하여 버린"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4). 그것은 예언의 말씀을 포기하도록 만든 행위입니다. (5).예언의 경고를 끊어버리고 전달되지 못하게 대항하는 행위입니다. (6).따라서 성도들은 듣지 못한 것도 예언의 경고가 전달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성도들로 하여금 계시록을 멀리하게 만들어 놓은 행위이므로 휴거에서 제하여 버리기 때문에 대환난에 남겨집니다.

 

   다음은 계시록 1장3절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듣고 지키어 행하면 복을 받는다 했습니다.(계1:3). 반대로 읽지 않으므로 인하여 지도자는 종말에 대하여 몰라서 가르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복을 받으려면 읽으라 하셨는데 읽지 않았기 때문에 대환난에 남겨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가르쳐주는 지도자가 없으므로 종말에 대한 내용을 몰라서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환난에 남겨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행하지 않으면 주님이 강림하심을 모른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믿음의 결과는 자기 육신만을 위하였고 하나님을 위하는 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내쳐서 대환난에 남겨지는 것입니다(계3:16). 그리고 사단에게 미혹당한 생에서 돌이키지 않은 연고로 주님께서 대환난에 던지기 때문에 남겨지는 것입니다. (계2:22) 

 

2. 대환난에 남겨지는 대상

 

(1).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마7:23, 3:41). 불법이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서 벗어나면 불법입니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를 경고하라 하셨고, 또 666 짐승의 표를 받지 말도록 경고하라 하셨기에 그것을 경고하는 사역을 못하게 휘방하며 상징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불법입니다.


(2). 넘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마13:41.18:7. 눅17:1). 넘어지게 한다는 뜻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잘못 인도하는 행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추상론 때문에 신자들이 대환난에 남겨지면 그것은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3). 무익한 사람입니다 (마25:30). 무익하다는 뜻은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수행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지도자들이 많이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라고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선한일, 곧 영혼 구원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입니다.


(4). 남을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롬14:10). 판단(크리마)은 판결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별은 하라 하셨지 판단하는 권세는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유야 어찌되었든 누구든지 믿는 성도를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가 심판주의 자리에 앉은 교만 때문입니다. 입버릇처럼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사람은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5). 심판주의 오심을 가르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마24:51). 이러한 지도자를 외식하는 자라 하였으므로 형식에만 치우치고 맡겨진 신자들을 대환난에 남겼기 때문에 악하다 합니다. 심판주의 오심에 관한 메시지를 분류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나라 1,2,3,층천과 예루살렘 도성이 어떻게 조상되었는지, 바깥 어두운 곳엔 어떤 사람들이 가며 그곳이 어딘지, 음부에는 누가 가며, 그곳은 어딘지, 그리고 심판주가 오시기 전에 어떻게 살아야 하며 대환난에 남겨졌을 때 어떻게 될 것과 왜 짐승의 표를 받으면 안 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가르침을 말합니다. 마지막에 대하여 경고하지 않는   지도자들입니다.


(6). 거짓말을 지어내는 사람입니다 (계22:15). 거짓말로 지어낸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준 진리를 비진리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가르치는 많은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성경은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해 말씀으로 주신 하나님의 명령인데, 이 명령을 바꾸는 것이 비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위배되는 학설을 만들어 내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7). 의로운 세마포 옷이 입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마22:12~13). 앞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유형으로 인하여 의롭지 못했기 때문에 의로운 세마포 옷을 입혀주시지 않아서 벌거벗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흰 세마포 옷을 입지 않은 존재는 살수 없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면 대환난에 남겨지는 것입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