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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설교/추억의 설교

설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이중표 목사(한신교회)

설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이중표 목사(한신교회)  05.04.07

 


출처 = http://cafe.daum.net/vision12/DCt/24

 

이번 세미나 주제는 ꡒ교회발전을 위한 말씀개발ꡓ입니다. ꡒ설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ꡓ는 뜻입니다. 이번 기간 동안 목사님들이 놀라운 은혜를 받으셔서 먼저 설교가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금년 들어서 수양관에 들어와 제가 목회하면서 시작된 설교집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의 설교의 문제점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저명한 설교자 몇 분을 선정하여 그 분들의 설교집 전부를 탐독하면서 나의 설교와 비교연구를 하고 저의 약점을 보완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목사로서 설교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설교 사역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대의 효율적인 목표에 이르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목사는 설교가 끝나는 날 목회도 끝납니다. 설교할 수 있는 교회가 있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목사의 신성한 의무이며 또한 목회자의 지극한 행복이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역사상 위대한 설교자는 타고납니다. 한국교회에서 조용기 목사님이나 곽선희 목사님 같으신 분은 노력해서 된 분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2천년 교회사에 전무후무한 설교가입니다.

그 분의 사소한 것으로 시비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스펄전 목사도 23세에 당시 2만명 집회를 인도하니 위대한 사기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조 목사님을 어떻게 들어 쓰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곽선희 목사님은 아침에 45분정도 준비하면 설교가 된다고 합니다. 평소에 말씀으로 충만하다는 것이며 늘 받는 은혜가 크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조 목사님이나 곽 목사님과 같은 분들과 한 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이 기쁜 일입니다. 눈을 밖으로 돌려보면, 세계 교회사에 전무후무한 대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설교를 위한 노력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는 천부적인 재능과 탁월한 지성을 겸비한 하늘이 낸 설교자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천부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을지라도 이미 설교자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주신 은사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번 기간 동안에 은혜를 받아 설교자 비전과 능력, 그 영광과 행복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로 시작된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은 설교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이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장 우선하신 사역은 선포 곧 설교사역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부르신 것도 결국은 설교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 과정은 설교자로서의 훈련이요 교육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년 동안 신학교육을 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졸업하지 못하고 퇴학을 맞았고, 11명이 졸업하고 설교자로 배출되었습니다. 이 제자들의 설교를 함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설교가 없으면 교회도 없습니다. 설교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가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수제자로서 뛰어난 점도 있지만, 베드로가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는 것은 그의 설교가 누구보다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출신이 어부요, 학력으로 보아도 정규 학교에 다닌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사도행전 시대 교회의 초석을 놓고 초대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설교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설교가입니다. 그가 설교하면 사람들이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 초대교회는 부흥되었습니다. 사도행전 시대 초대교회를 살려 놓은 것은 베드로의 살아있는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연구하면 부흥의 비밀도, 목회의 원리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소명을 주실 때 ꡒ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ꡓ 물으셨습니다. 그가 사랑한다 고백할 때 ꡒ내 어린양을 먹이라ꡓ 하셨습니다. 그리고 ꡒ내 양을 치라ꡓ하셨고, 또 ꡒ내 양을 먹이라ꡓ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설교를 위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목양사역의 핵심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


교회의 발전사를 보면 교회는 설교와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신학자 포사이스는 ꡒ교회사는 곧 설교사다. 기독교의 성쇠는 설교와 함께 되어진 역사ꡓ라고 했습니다. 설교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복음이 어떻게 선포되었느냐에 따라 어떤 교회가 형성되느냐가 결정되었습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신앙과 인격, 그 영성과 신학으로부터 선포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설교 이상의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교회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진 다섯 시기가 있습니다. 바로 이 다섯 시기에는 각각 위대한 설교가 선포되었습니다. 그 첫 시기는 1세기 곧 사도행전의 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설교가가 있습니다.

둘째는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이 활약한 4세기요,

셋째는 앗시시의 프랜시스가 있었던 13세기입니다.

그리고 넷째로 루터, 칼빈이 활동하던 16세기요,

다섯째로 스펄젼, 브룩스 등의 설교시대인 19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설교가 쇠퇴하면 그 시대에는 교회도 침체되어 갔습니다. 교회가 카톨릭으로 교권화되면서 예배는 의식화(儀式化)되었으며, 공동체는 제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말씀이 약화되었고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강단의 설교와 그 시대 역사는 성쇠를 같이 했습니다. 설교는 기독교의 발전과 일치합니다. 설교가 있는 곳에 복음이 있고, 복음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사이스(P. F. Forsyth)는 ꡒ교회는 말씀과 함께 있고 말씀과 함께 죽는다ꡓ고 하였습니다. 과연 설교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생명입니다.

 

한 시대의 교회는 그 시대 목회자가 선포하는 말씀 그대로이며 강단의 설교 이상의 교회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는 강단에서 선포하는 설교에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로 그 사역이 시작되었고 제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막 1:15). 베드로의 설교로 초대교회는 그 문을 열었으며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습니다(행 2:14, 37).


목사의 일생의 사역이 강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강단은 목회의 생명이며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본질입니다. 목사에게서 강단의 실패는 목회의 실패인 것입니다. 목회자의 불행은 강단에서 실패하는데 있습니다. 목사는 설교에서 행복을 얻어야 하고 승리해야 합니다. 강단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에 운명을 걸고 설교를 살려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설교를 잘하고 못하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설교를 잘하고 사람이 적게 모이면 설교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리는 있지만 이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닙니다.

 

설교가 모이는 청중의 수와 어느 정도 관계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만 많이 모인다고 좋은 설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좋은 설교, 잘하는 설교는 살아있는 설교입니다. 살아있는 설교는 청중을 살립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 회개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살아있는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매력 있는 설교는 청중을 모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설교는 청중을 살려내며 교회를 살려냅니다. 흥미 있는 설교는 교회를 팽창시킬 뿐입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며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킵니다. 그리하여 세상까지 살립니다.


한국의 교회에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많고, 목사의 설교에 ꡐ아멘ꡑ 소리가 높아도 교인들의 변화된 모습이 없고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설교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할 때 주의해야 할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내 설교가 사람을 살리는 설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모이게만 하려면 청중의 생활 욕구에 맞추어 주면 됩니다.

 

그래서 교회성장을 위해서는 그 설교를 통해서 청중의 필요(Needs)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과연 한국교회의 경험으로서도 교회성장 대가들은 거의 다 청중의 욕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설교를 통하여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인간의 기본 욕구인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3박자 축복의 원리로 50년대의 가난하고, 배고프고, 병들어 신음하는 민초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시대의 갈급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게 했습니다.

김선도 목사님은 70년대 잘 살고자 하는 고도 성장 세대에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철학을 설교에 도입함으로 청중을 모아들였습니다. 곽선희 목사님은 80년대 경제 성장 이후 인간의 근본적인 공허와 내적 갈등, 치유를 갈구하는 현대인들의 심리 욕구를 충족시키므로 청중을 모아들였습니다. 또 신길동에서는 새로운 베뢰아 신학을 연구하여 귀신 들려 조상대대에 괴로워하는 민중을 끌어 모으는데 성공하여 세계적으로 큰 교회를 이룬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성장에만 초점이 맞춰진 설교에는 성도를 변화시켜 이 민족 역사를 살리고, 양심을 깨워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에는 그 메시지가 한계를 지녔습니다. 교회가 많은 물량을 갖고 청중의 니드를 충족시키는 설교에 만족하며, 오직 그렇게만 회중을 섬기려고 한다면 예언자적 증언은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70년대 유신시절 큰 교회들은 입을 다물었고, 80년대 군사독재시절 많은 목사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설교했으며 권력과 영합하였습니다. 이런 교회에 청중이 몰리고 있을 때 소수의 청중으로 역사를 이끌어 간 교회가 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민족 통일을 위해 사회 정의를 위해 예언자처럼 외치다가 감옥에 끌려가고 고난과 핍박을 당했던 교회와 주의 종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이들 교회와 목회자들은 한국교회의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 일부 교단 일부 지도자들은 저 부정했던 정권과 영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한국교회의 같은 지체인 기장 교회를 그 예언자적 사명과 역할을 인정하는 대신에 오히려 용공으로, 복음을 외도한 교회로 매도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정죄는 가슴 아프고 슬픈 일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부정한 정권과 부패한 사회에는 침묵하면서 형제 교회에는 상처를 냈을까요? 결국 정의를 위해 더 많이 고난을 당하고 의식 있는 사회인들을 개신교를 떠나 카톨릭으로 몰려가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신학적 입장에 있든 서로의 차이점을 다양성으로 인정하면서 살아있는 복음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살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복음을 말한다 할지라도 교인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제도적인 교회는 되나 참다운 그리스도의 증인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한국교회를 풍자하기를, ꡒ현대교회는 극장이 되어 버렸다. 거룩한 쇼를 상연하는 무대가 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음악과 위로와 기도와 죄를 사해주는 속량의 설교를 듣는다. 그리고 죄악의 거리로 돌아간다. 관중은 최신식으로 장식된 극장을 좋아하듯이 시설 좋은 교회를 좋아한다.

 

온갖 세상에서 죄를 짓고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천당 입장권을 얻어야겠기에 교회의 사람 숲 속에 숨어서 속량의 은혜극을 즐기는 유랑교인이 되어간다. 교인은 관중이 되어간다. 보수를 받고 예배극을 돕는 단원은 늘어가나 진정한 희생과 사랑의 성도는 날로 그 수효가 줄어간다.ꡓ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설교가 죽어 가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끄는 설교와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는 다릅니다.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새벽 특별집회를 열었답니다. 먼 곳에서 오는 분들은 버스를 대절해서 참석을 하였는데,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교인들이 버스에서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려고 야단법석이 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답니다. 서로 싸움이 나고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것을 본 그 목사님은 새벽집회를 아무리 해도 저렇듯 성도들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목회가 무얼 해온 것인지 회의가 들어,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설교하고 나면 교인들이 은혜 받았다고 얼굴이 훤하게 상기되어 인사를 해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들려오는 실망스러운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런 변화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볼 때 ꡐ나는 살아있는 말씀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강단 무대에서 쇼를 한 것은 아닌가?ꡑ 생각하면서 목회자로서의 무능함을 자탄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살아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ꡒ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ꡓ(행 2:37)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그 마음이 찔렸습니다. 어찌할꼬 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초대교회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베드로와 같은 살아있는 목회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설교자가 살아야 한다
살아있는 설교자에게서 살아있는 말씀이 선포됩니다. 살아있는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자기 몸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ꡒ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ꡓ(행 2:32) 증언하였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아있는 설교자로 섰습니다.

 바울은 ꡒ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ꡓ(빌 1:21), ꡒ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ꡓ(갈 2:20)라고 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사는 설교자는 살아있는 말씀을 선포하게 됩니다. 진정한 설교는 그리스도가 바로 설교자요, 그리스도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설교는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진리의 전달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필립 브룩스(P. Brooks)가 ꡒ설교는 인격을 통한 진리 전달ꡓ이라고 말한 것이 옳습니다. 죠지 휫필드는, ꡒ많은 설교가들이 성공한 것은 그가 바로 설교였기 때문이다. 사자란 자기 안에서 메시지가 이미 구체화 된 사람을 말한다.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그들 자신이 곧 설교가 되는 것이다ꡓ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스펄젼은 ꡒ설교는 자신의 전 인격으로 설교하는 것ꡓ이라 했고, 본회퍼는 ꡒ복종하는 하나의 행동이 백 개의 설교보다 낫다ꡓ고 하였습니다. 강단의 소리가 메아리로 끝나지 않고 역사의 현장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자신의 삶을 제물로 삼을 때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이 설교자에게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살아있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까닭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가 살아있는 것은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의 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때부터 입만 열면 살아있는 설교가 나타납니다.


오래 전 저희 교회에 있던 부목사 중 하나가 설교를 하는데 그 안에 복음이 없어요. 듣는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전하는 그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ꡒ도대체 무슨 말씀을 전한 것인가?ꡓ 물으니 ꡒ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ꡓ 하는데 전부 인간의 말입니다. 설교 끝난 후에 교역자들이 모여 평가 시간을 때때로 가집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에게 ꡒ오늘 설교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ꡓ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신학생이 ꡒ복음에서 외도한 것 같습니다.ꡓ 그럽니다. ꡒ그래, 복음이 무엇인가?ꡓ ꡒ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입니다.ꡓ ꡒ왜 그렇게 된 것 같은가?ꡓ ꡒ별세가 안되어서 그런 것 같은데요?ꡓ 그래서 ꡒ자네가 도통했구먼!ꡓ 하고 웃었습니다.


복음은 복음을 담고 있는 설교자가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곧 별세를 체험하여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별세의 복음은 별세한 설교자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은혜로운 설교하려면 그 전에 먼저 은혜로운 설교자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말하려면 복음이 내 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설교가 비쳐 목사가 ꡒ목사님은 오늘 설교를 몇 시간 준비했습니까?ꡓ 질문을 받았을 때, ꡒ40년 준비했습니다ꡓ고 대답했다지 않습니까? 설교자는 그 인생의 전부가 모두 설교를 인격적으로 준비한 과정이 됩니다.


제가 국가 조찬기도회 설교에서 대통령을 울렸다 하는 말을 듣고 한 후배가 물었습니다. ꡒ목사님, 그런 설교는 어떻게 준비합니까?ꡓ ꡒ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울고, 대통령이 당한 고난과 그 상처를 생각하며 마음으로 울었더니 그런 설교가 되었나 보다ꡓ 대답하였습니다.

 

둘째, 말씀을 살려야 한다
사도행전 2:37절은 ꡒ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ꡓ 하였다고 말합니다. 청중은 ꡒ이 말ꡓ을 들었습니다. ꡒ이 말ꡓ은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살아서 마음을 감동하는 ꡒ이 말ꡓ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앞서 36절은 ꡒ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ꡓ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그 내용이 바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의 말씀입니다. 설교가 살았고, 그 내용이 살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공부를 못한 사람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설교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의 설교 속에 케리그마가 있습니다.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분석하여 보면 베드로는 구약을 해석하거나 인용할 때 그 초점이 예수님에게로 향합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2장 27절은 구약의 시편 16편 10절 ꡒ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ꡓ의 인용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말한 주의 거룩한 자가 누구입니까? 사도행전 2:31절에 ꡒ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자기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ꡓ 하였고, 32절에 ꡒ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ꡓ 하였습니다. 구약이 구약 자체로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요 언약으로서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다윗의 시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사도행전 시대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전파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주님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때 그 증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ꡐ어찌할꼬ꡑ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를 증거하는 것이요, 그때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성경이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인 것도 성경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있는 까닭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도 성령이 충만한 이후에야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렸는데, 그 때부터 성경 속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그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 속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그것이 케리그마 설교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에는 혈맥이 있고, 대지에는 산맥이 있고, 지하에는 수맥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도맥이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의 맥이 전 성경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를 찔러도 예수의 피가 흐르고 생명이 솟아오릅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만나야만 그 설교는 복음이 됩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누구를 만나도 그 속에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모든 사건이 말해질 때 그것이 복음이 되고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말씀이고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임재한 공동체요,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예수를 증거하지 않으면 목사가 아닙니다. 강단에서 설교한다고 목사가 아니요, 안수 받았다고 목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진짜 목사입니다.


오래 전에 후배 목사와 있었던 일입니다. ꡒ요즈음 교회가 부흥되는가?ꡓ ꡒ아무리 설교해도 교인들은 졸고 영 힘이 듭니다. 설교는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큰 고민입니다.ꡓ ꡒ어떻게 설교하는가?ꡓ ꡒ히브리어, 헬라어 원문 보면서 신학적, 철학적, 문학적으로 충실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ꡓ 설교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구나 싶어 요령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ꡒ한국교회에서 목회 잘하는 목사님들의 설교집은 읽어보는가?ꡓ ꡒ남의 설교집은 왜 읽습니까?ꡓ 이게 교만입니다. ꡒ이 사람아, 남의 설교를 읽어야 내 설교를 하는 것이네. 다른 설교를 알아야 하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소설 수백 권 이상 읽어야 소설을 쓸 수 있다네. 자네가 남의 설교를 읽어보지 않고서는 설교에 발전이 없네.ꡓ 충고를 하고 얼마 있다가 그 후배를 다시 만났습니다.

 

한국교회의 유명한 목사님들 설교집을 몇 권 읽긴 읽었는가 본데 하는 말은 이랬습니다. ꡒ내용이 있어야 읽지요. 설교가 유치하던데요.ꡓ ꡒ똑똑히 듣게. 유치하고 내용 없는 설교 같지만 거기에는 사람이 몰리고, 자네와 같이 유식한 설교에는 사람이 떨어지는 이유는 생각해보지 않는가?ꡓ 재차 강하게 이야기 하니 자극이 되었는지, 다음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ꡒ시험삼아 유명한 분의 설교집을 읽어보고 한 편을 그대로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은혜 받았다고 야단입니다. 그런 식으로 4주를 했는데, 교인들의 얼굴이 다 달라졌습니다. 이제 요령 파악이 조금 됩니다. 성경대로 쉬운 설교를 하니까 교회가 부흥됩니다.ꡓ


은혜 받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은혜 받는 설교를 하려면 ꡒ이 말씀ꡓ을 선포해야 합니다. ꡒ이 말씀ꡓ을 설교자가 먼저 듣고 선포해야 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해야 합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두 가지 경우입니다. 전하는 자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든가 아니면 전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ꡒ이 말씀ꡓ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ꡒ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말씀ꡓ입니다. ꡒ이 말씀ꡓ을 하신 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지고 광채가 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눅 9:28). 베드로는 ꡒ이 말씀ꡓ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증거해야 합니다. 목사는 그 메시지의 중심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언젠가 교인 한 분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ꡒ목사님, 저는 주일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목사님이 주신 말씀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을 만난 것이 저희 가정에는 최대의 사건입니다. 목사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사랑하는 목사님 건강하세요.ꡓ 강단에서 설교한 것이 저 자신입니까? 그 설교가 제 말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전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행복하게 산다면서 감사하니 이것이 기적 아닙니까? 예수님 덕택에 목사는 천사가 된 셈입니다.


셋째, 청중을 살려야 한다
한국교회 강단 거성들의 설교 내용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한결같이 성경만을 기초로 삼았다. 둘째,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설교의 과녁으로 삼고 있다. 셋째, 심판과 은혜의 양 주제가 있다. 넷째,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고 적극 참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섯째, 세속적 체험을 설교학적으로 활용한다. 여섯째,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끝없이 말씀의 내용을 새롭게 하려 한다.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설교를 업그레이드시켜야 합니다. 여기서는 그 두 번째 특징에 주목하여 보겠습니다.


ꡒ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ꡓ
베드로의 설교에도 사람들이 마음에 찔렸다고 합니다. 목사는 마음의 설교를 해야 교인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기억할 때, 설교자로서의 베드로가 살았고, 그 설교에 생명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 그 마음을 찔렀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찔렸다 할 때 쓰인 헬라어는 ꡐ카라누쏘ꡑ인데 그 의미는 ꡐ푹 찌르다, 기절시키다, 강타하다, 바늘로 찌르다ꡑ입니다. 매우 강렬한 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듣는 청중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찔렀습니다.


설교는 선포한 후에는 청중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일지라도 전달되지 않는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폴 틸리히는 ꡒ전달되지 않은 메시지는 메시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관심은 크리스챤 메시지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전달하느냐에 있다ꡓ고 했습니다. 목사는 마음의 설교를 해야 합니다. 머리로 설교하면 머리로만 듣습니다. 무식하게 설교하면 유식한 사람이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행동에 초점을 맞추면 그 설교를 듣는 청중이 제한됩니다.

 

그러나 가슴을 향한 설교는 누구나 듣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식의 과다에 상관없이 가슴으로 하는 설교는 다 듣습니다. 사냥할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사냥할 때 포수가 표적을 머리에 두면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몸에 표적을 두면 맞추어도 잡기 힘듭니다. 그러나 가슴에는 맞추기도 쉽고, 맞으면 그냥 거꾸러집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도 말씀을 머리에 쏘려고 하지 마십시오. 손과 발에 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가슴에다 쏘아야 합니다. 가슴은 심장이요 마음입니다. 마음에 쏘면 찔림을 받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마음에서 나간 설교입니다. 마음에서 나간 설교만이 마음을 찌릅니다. 마음에 적중하는 설교를 하려면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설교는 마음을 움직이고 반드시 감동을 줍니다. 설교는 하나님 마음의 중심에서 출발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문자화된 하나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인격화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설교는 언어화된 하나님 마음입니다. 설교를 통하여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의 마음에 담아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 마음이 담기면 그 마음이 인간의 깊은 마음으로 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마음이 칼로 찌르는 감동을 받았던 예수님 당대의 사람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 우리 전하는 말씀이 살아있는 성령의 검이 되어 오늘 우리의 회중의 마음을 감동할 것입니다.


영국의 대설교가 존 스토트 박사는「설교자의 자화상」이란 책에서 설교자를 아버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이해하듯이 설교자는 청중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설교를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설교자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유리방황하는 양무리들을 볼 때 긍휼히 여기셨고 민망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능력이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열정이 있었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교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ꡒ나는 설교자들이 마치 벌떼들과 맞싸우는 듯 동작을 취하는 것을 보고 싶다ꡓ고 했습니다. 설교자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설교의 열정은 큰소리로 외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설교를 화난 사람처럼 악쓰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교회에서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당장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렇지만 열정이 없으면 안됩니다. 요한 웨슬레는 ꡒ당신의 설교에 불을 붙이라. 그렇지 않으려거든 당신의 설교를 불 속에 던지라ꡓ 하였습니다.


설교는 그 메시지 내용이 좋다 하더라도 전달이 되지 않으면 은혜를 끼칠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단순 명쾌하고 확실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명쾌하게 전달하면 설교는 반드시 은혜가 됩니다. 얼마 전 어느 교단에서 기도회로 모였는데, 설교하시는 분이 ꡒ여러분은 성령 받아야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ꡓ라고 강조했습니다. 애매한 표현입니다. 그냥 강요할 뿐이지 감동으로 전달되지 않는 공허한 표현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감정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조국을 위해 우셨고 바울 사도는 교인들을 위해 우셨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도 교인들을 쳐다보면 눈물이 납니다. 눈물은 성도들의 메마른 심령을 적시는 하늘의 단비입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목회는 하기 어려운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감동이 됩니다. 어머니의 눈물로 자녀를 보듯 교인을 보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 그 어떤 프로그램이나 설교도 마음에 감동하지 못하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아까 제가 설교집을 검토하여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큰 문제는 감동력의 약화였습니다. 1, 2, 3, 4권은 문장이나 편집은 세련되지 않은데 지금 읽어도 감동이 되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나중 설교집으로 가니까 경험과 예화도 많고, 신학적으로나 문장으로는 잘 다듬어졌는데 감동이 못 미칩니다.

 

 ꡒ세월이 흘러 늙으면 이렇게 되나? 물러가야지ꡓ 처량한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ꡒ이대로 주저앉으면 나는 죽는다ꡓ는 심정으로 새롭게 공부하고 기도하며 설교를 살려가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금년 들어 내 일생 목회에 가장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설교 동역자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살아있는 설교자가 되도록 먼저 자신이 은혜받는 일에 힘써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 성자 예수여, 그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오 성자 예수여, 그 복음 받기를 원합니다.


목사가 받아야 할 최고의 은혜는 별세의 은혜입니다. 이때 예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삶으로 고백하는 별세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별세의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다른 이들에게 별세의 은혜를 선포할 것입니다. 자기 속에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예수를 증거할 것입니다. 예수가 자기 속에 살아있는 사람만이 살아계신 예수를 증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첫째 조건은 하나님의 임재를 날마다 체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사에는 평양성의 새벽을 깨운 종 최권능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일본 검사들의 심문과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맞을 때마다 ꡒ예수 천당ꡓ 하였습니다. 보다 못해 옆에 있던 한국인 순사가 ꡒ목사님, 아프다고 소리쳐야 좀 봐주지 않겠습니까?ꡓ 하니 ꡒ나는 예수로 차서 건들기만 하면 예수가 나온다ꡓ 하였답니다. 오직 예수로 충만한 설교자에게서는 살아계신 예수가 증언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3년 동안이나 따르면서 말씀을 들었고 능력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닷가에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고서는 예수로 충만했습니다. 입을 열면 예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 충만이요, 예수 충만은 말씀 충만입니다. 고기 잡던 어부가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입을 열면 예수가 증거 되고 한번 외칠 때 3천명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있습니까? 이보다 더 큰 감격이 있습니까? 이보다 더 큰 행복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목사는 설교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영광스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설교에서 행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소홀히 하는 것은 주님의 소명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목사는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설교하다가 과로에 쓰러져 죽는다면 순교의 영광을 볼 것이요, 목숨 걸고 설교하여 산다면 위대한 설교자가 될 것입니다. 설교 때문에 행복한 목사만이 행복한 교회를 만들 것이요, 주님과 더불어 행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