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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와 대환란/휴거·4

휴거에 대하여… (유동근 목사)

 

 

 

휴거에 대하여 …

 

성경에는 휴거의 사상이 있다.

휴거(rapture)란 주 예수님께서 재림(parousia)하실 때

이 땅에 살아남아 있는 믿는 이들에게서 발생한다.

 

사도 바울은 휴거에 대하여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라(고전 15:51)”

고 휴거의 사상을 전달한다.

 

여기서 마지막 나팔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 중

마지막 나팔로 보아야 하며

결과적으로 성도의 휴거는 대환난의 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시

지상 재림 직전의 일이 됨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도

휴거에 관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는 역시 주님이 강림하실 때

살아있는 성도들에게서 발생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에 보면 살아남은 자들이 주님 재림시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상기 말씀들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을 종합할 때

교회의 휴거는 환난 후에 이뤄지지만

(죠지 뮬러, A.B. 심슨, 제임스 라이트, 뉴톤,

A.J. 고든, 무어헤드, 헨리 프로스트 등),

신실한 자들은 환난을 피하고

환난 전에 휴거된다는 것이 성경적인 견해다.

(눅 21:36, 계 3:10, 14장 전체 참조

-Hudson Taylor, Robert Chapman,

Robert Govett, G.H. Pember 등).

 

마태복음 24장에는 주님의 재림 때를 언급하고 있는 바,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다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했는데

곧 휴거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데려감을 당한다(paralambano)라는 헬라어는

다른 성경구절에서 다 적극적인 용법으로 쓰여진 단어다.

 

요한복음 14장 3절의

‘처소를 예비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영접하여’

라고 할 때 영접한다는 말이나

마태복음 17장 1절의

‘주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라고 할 때의 ‘데리시고’ 등에 쓰여진 말이다.

 

이는 다 주님이 믿는 이들을

데리고 가실 때 쓰는 말이므로 적극 용법으로 사용됐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사용한 ‘파라람바노’는

주님의 재림과 환난의 때를 말하므로 더 적극적인 말로 쓰였으며,

결국 휴거에 해당하는 말이다.

 

또한 버려둔다(마 24:40)는 말은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에서 쓰였는데

이는 소극적으로 쓰였다.

 

이 구절의 해석에서 주님에 의해 버려둠을 당한다고 할 때

그 말은 절대로 적극적으로 볼 수 없는 단어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들은

도적이 어느 시에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과 연결돼 있는데,

주님은 도적같이 오셔서 귀한 물건을

훔치러 오시는 분으로 비유돼 있다(마 24:43).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적을 맞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을 깊이 이해할 때

도적을 맞아야 축복이 된다.

 

진짜 강도라면 도적을 맞지 말아야겠지만,

여기서는 도적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도적을 맞아야 축복이 된다.

 

주님은 귀한 보물을 훔치러 오신 분이다.

그분은 깨어 기다리는 신실한 성도를 보물로 여겨 훔치실 것이다.

이는 40절과 41절의 데려감을 당하는 것에 이어 하신 말씀이다.

 

어떤 도적이 집에 들어가서

귀하지 않은 물건을 도적질하겠는가?

 

우리가 만일 주님의 눈에 귀한 보물같이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날 주님에 의해 데려감(도적질)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손에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좋은 것이며

주님의 것이 되기 위해 그분께 도적질 당하는 것은

해가 아니라 도리어 축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 땅에서 생명의 성장과 변화를 체험하지 않고

귀한 보물로 변화되어 있지 않다면

주님은 결코 우리를 훔치러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데려가고 훔쳐가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휴거다.

 

생명의 성장과 변화를 통해 그분을 닮아가고

진정으로 깨어 기도하며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다면

주님은 약속대로 그분의 말씀대로

시험의 때(대환난)를 면하게 하실 것이다(계 3:10, 눅 21:36).

그리고 하늘의 시온산인 보좌 앞으로 들어올리신다(계 14:1-5).

 

이것이 휴거이며, 사도 바울 같이 성숙한 사도는

이 땅에서 사역하는 가운데 휴거의 소망을 강하게 피력했다(고후 5:2-4).

 

오늘 우리는 모든 예언의 말씀의 성취를 볼 때

휴거의 시기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썩어질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을 바라며 사는 성도가 아니라면

휴거될 기대는 아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온 마음이 깨어서 주님만을 바라고 살며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을 때만이

어느 날 주님께로 들림받게 될 것이다.

 

구약의 에녹과 엘리야는

휴거의 예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실제로 없어지는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다.

 

신약에는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렇게 될 것이라 말한다.

또 곧 이어질 주님의 재림과 환난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

 

 

[유동근 목사 성경 칼럼]

 

- 유동근 목사 (온누리 선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