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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성애 차별 급변… 초교 서류엔 '아빠·엄마 '대신' 부모1·2'

[세계는 지금] 미국, 동성애 차별 급변… 초교 서류엔 '아빠·엄마 '대신' 부모1·2'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입력시간 : 2014.03.23 2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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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라마 속 대통령도 양성애자로 묘사, 미국 정계의 권모술수를 그린 인기 드라마'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사진 맨앞) 대통령은 양성애자로 묘사되고 동성애 상황도 개인적인 취향인 것으로 가볍게 다룬다.
● 10년 새 여론 변화 놀라워
"성적 취향은 사생활일 뿐" 드라마 내용에도 무덤덤

"보수 결집 이슈로도 못 써" 공화당측 반대도 잠잠… 종교자유 문제로 접근 바꿔

● 내년 초 대법원 판결 관심
사법부 옹호 분위기 속 동성결혼 불허하는 州法 위헌성 여부 판단 예정


미국에서 요즘 가장 뜨는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즈(House of Cards)'와 '스캔들(Scandal)'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등장하는 권력자들이 하나같이 성적 소수자란 점이다. 조지 H 부시 대통령 시절이 배경인 '스캔들'에서 백악관 비서실장은 젊은 남자 파트너와 사는 동성애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팬이 된 '하우스 오브 카드'는 더 극단적이다. 다수당 하원 원내대표에서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에 등극하는 야망의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케빈 케이시 분)가 양성애자로 묘사됐다.
극중 둘의 성적 취향이 단순 사생활로 처리되고, 시청자들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 더욱 놀랍다. 미국에서 성적 소수자 문제는 이처럼 일상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한인 부모 가운데는 "사회 분위기만 보면 혹시 (애들이)배우자로 동성을 데려 오지 않을까 걱정 된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워싱턴 동성애자 집결지 게이게토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대사관과 음식점이 몰려 있는 번화한 듀퐁서클은 '게이 게토'로도 불린다. 워싱턴 동성애자의 집결지인 이곳에선 성적 소수자와 이들의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주변에 이들을 위한 전문 음식점, 바, 클럽이 수십 개 퍼져 있고 전미동성애자상공회의소도 자리해 있다. 전문 음식점 중 하나인 듀플렉스다이너는 동성애자들이 모여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편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뿐 일반 식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성애자 스포츠바인 JR바앤드그릴은 예쁘게 단장한 남성 바텐더, 음악, 손님들 행태 등 분위기가 생소했다. 바의 사방에 설치된 비디오 스크린은 그들만의 필요에 따라 다른 동성애자를 훔쳐보기 편하도록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매년 6월 동성애자 축제 '캐피털프라이드'가 열리는 이 듀퐁서클에서 수년 전 사건이 터졌다. 동성애자 구심점이자 상징이던 동성애 전문서점 '람다 라이징'이 문을 닫고 신발가게가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1974년 개점한 람다 라이징은 동성애 관련 TV광고를 처음 내는 등 오늘의 듀퐁서클을 있게 한 주인공이었다.

이 서점이 4년 전 자진 폐쇄한 이유는 '임무 완수(misson accomplished)'. 과거와 달리 이제는 거의 모든 서점에서 동성애 관련 책을 팔아 더 이상 전문서점이 필요하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실제로 백악관에서 가까운 일반서점인 반스앤노블의 한 켠에는 게이ㆍ레즈비언 코너가 당당히 마련돼 있다.

10년 만에 뒤집힌 여론

영화배우 톰 행크스가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 변호사로 분한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성적 소수자의 비참함을 연기한 게 1994년이다. 성의 정치시대가 막 개막한 90년대만 해도 여전히 가족의 가치는 숭고했다. 공화당과 보수진영은 동성애, 낙태 등을 핵심 이슈로 삼은 진보진영과 문화전쟁에서 승리하며 2000년대 초반 보수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불과 20년 사이 동성애자 문제는 어느 사회운동보다 빠르게 진전됐다. 2004년 워싱턴포스트와 ABC 방송 공동 여론조사에서 동성애 결혼 합법화에 대한 찬성은 38%, 반대는 59%였다. 그 10년 뒤인 지난 4일 발표된 같은 여론조사에서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찬성이 59%였고, 반대는 34%로 줄어 들었다. 사회 전반에는 이미 동성애 문제를 더 이상 보수층을 끌어 모을 이슈로 삼기 어려워진 분위기가 퍼져 있다. 동성애 논란은 이제 끝난 것인가라는 자괴감이 보수진영에서 터져 나올 정도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들어 동성애 지지자들은 연달아 정치적, 법적 승리를 거두고 있다. 정치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주도했다. 오바마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동성결혼 합법화 이슈를 던졌는데, 그때만 해도 오히려 보수층만 결집시키는 역효과가 우려됐다. 밋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가 이 문제를 건드리려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이 사안이 소수인종, 젊은이, 여성의 지지를 확산시키는 촉매로 작용하면서 오바마는 정치적으로 완승했다.

사법부도 동성애 옹호 분위기

보수층이 이전과 달리 목소리를 낮추는 결정적 이유는 무엇보다 법적 패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연방대법원은 연방 결혼보호법에서 결혼 개념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규정한 것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결혼을 더 이상 이성 간 결합으로만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대법원 결정이 동성 결혼을 불허한 주의 법까지 위헌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96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이 법을 제정하고 17년간 진행된 미국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힘을 얻은 동성애 권리운동은 이후 더 활발해지면서 영역도 다양해졌다. 동등한 민권법 적용, 이성부부와 동등한 법적 혜택과 권리 인정, 자녀를 보유할 권리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여파로 초등학교 학생 서류에는 아빠 또는 엄마만 둘 있는 동성애 가족을 배려해 '아빠' '엄마'란 표현이 '부모1' '부모2'로 대체됐다. 양성인 학생에게 남녀 화장실 사용을 모두 허용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등장했다. 오바마 정부는 대법원 위헌결정에 따른 첫 조치로 지난달 동성 부부에게 일반 부부와 동일한 혜택과 권리, 보호를 제공하는 지침을 내렸다. 동성 배우자가 경찰, 소방 업무 중 사고를 입을 경우 다른 배우자에게 동일한 보상금, 혜택이 주어지고, 법정에서 동성 부부가 상대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도 허용됐다.

에릭 홀더 법무장관은 이 지침을 발표하면서 여성ㆍ남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를 뜻하는 'LGBT'의 권리확대를 위한 노력을 50년 전인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에 비교했다. 미국 국가인권위원회(HRC) 채드 그리핀 위원장은 "오늘날 미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또 공정하다는 이상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평가했다.

보수진영도 프레임 바꾸기

동성애자에 대한 여론의 극적인 변화와 일련의 법적 승리로 공화당의 반대는 누그러져 있다. 그러나 케이블TV 폭스뉴스의 미디어분석가 하워드 쿠르츠는 "보수주의자들이 새로운 방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려 한다"고 말한다. 동성애 논쟁의 프레임을 찬반이 아닌 종교 자유문제로 바꾸려는 시도가 그 중 하나다. 보수적인 남부의 '레드 스테이트'들은 오는 11월 중간선거 때 동성애 차별을 양심, 신념의 자유 문제로 끌고 간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아직 성적 소수자에 대한 반응이 지역별 편차가 매우 크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뉴욕 맨해튼의 지하철에서 놀랍도록 말끔한 동성애 파트너가 애정표현을 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텍사스 오스틴의 교실에서 동성애를 옹호하는 말을 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일이다. 오바마 정부가 러시아의 동성애자 차별법을 외교적으로 문제삼고 있지만 정작 미국도 텍사스 루이지애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유타 등 무려 8개 주에서 러시아와 거의 동일한 동성애 조장금지법을 두고 있다.

그러나 프레임 변화의 일환으로 가장 최근 추진된 애리조나주의 동성애자 차별법은 지난달 말 결국 폐기됐다. 업주들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동성애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한 이 법은 남부의 보수적 분위기 속에 의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주지사는 전국에서 비난여론이 쏟아지자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승부는 내년 초

동성애 지지자와 반대자,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마지막 승부는 내년 초 벌어진다.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을 불허하는 주법의 위헌성을 이때 판단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50개주 가운데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주는 아직 17개 주와 수도 워싱턴에 불과하다. 대법원 결정을 앞두고 버지니아, 유타, 오클라호마, 켄터키, 오하이오주 등에선 하급심 연방법원들이 잇따라 동성결혼 불허가 결혼 평등권에 위배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랑하면 결혼할 수 있고, 주정부가 이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재판 과정에서 네바다, 펜실베이니아 등 주정부들은 아예 변론을 포기했다. 뉴욕타임스의 보수적 칼럼니스트 로스 다우세트가 결국 50개주에서 동성결혼이 허용돼 이성간 결혼이 하위문화로 전락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지금 미국의 분위기를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