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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윤동주/시인 윤동주

[스크랩] 윤동주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시인

1917년 北間島(븍간도)의 명동촌서 출생. 아명은 해환(海換). 1936년 광명학원을 거쳐 1941년 연희전문 문과 졸업. 일본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 수학. 1943년 귀향 직전 항일운동 혐의로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에서 옥사. 작품으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또다른 고향, <쉽게 쓰여진 시, <늘과 바람과 별과 시등이 있고,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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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4년 6월호(2014, June)

 

 

 

시인 윤동주(1917 ~ 1945). 그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당시 명동 학교 교사이었던 윤영석 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그를 매우 사랑하던 할아버지는 교회의 장로였다. 그 해 고종 사촌 형 송몽규가 윤동주보다 석 달 앞서 태어났는데, 몽규는 동주의 삶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이다.

함께 학교를 다니고 문학 수업을 했으며, 민족 의식을 갖고 독립 운동을 구상하기도 했다. 나중에 일본 경도로 유학가서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복강 형무소에 함께 수감되었고, 한 달을 사이에 두고 옥사하기까지 그들은 사촌 형제지간이라기보다 죽마고우이고 평생의 동지였다.

윤동주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민족 의식이 강했던 북간도의 분위기 속에서 중학교 시절까지 보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이이생활》이란 어린이 잡지를 정기 구독했으며, 명동 소학교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내는 문학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중학교는 송몽규와 함께 선교사가 운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 중학교를 다녔다. 이 시절 《동아일보》 신춘 문예 꽁트 부문에 몽규의 '술가락'이 당선되었다. 이 일은 동주를 분발시켜 이때부터 습작 시노트에 시를 쓴 날짜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해 몽규는 학업을 중단하고 김구 선생이 주관하던 낙양 군관 학교에 입학,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러나 현지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년만에 돌아와 '요시찰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

이때 윤동주도 1935년에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인 숭실 중학교에 편입했다가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그것에 대한 항의로 이듬해에 자퇴했다. 그래서 동주는 용정의 광명 중학부에, 몽규는 평양 대성 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재개했다. 그리고 1938년, 나란히 연희 전문 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이들이 연희 전문을 택한 것은 이 학교가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이어서 민족 의식을 가진 많은 교수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 윤동주는 생전에 문단에 발표를 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한 적이 없는 무명의 문학청년이었다. 용정 광명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카톨릭소년》에 동시 몇 편을 발표했고, 조선일보와 연희전문의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에 시 몇 편이 실려 있을 뿐이다. 해방후 1947년 경향일보 2월 3일자에 시인 정지용이 생애를 덧붙여 쓴시「쉽게 씨워진 시-고 윤동주」가 실려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지 시작했다.

연희 전문에서의 4년은 윤동주의 삶에 의미 있는 기간이었다.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전념하여 오늘날 남아 있는 주옥 같은 시를 남겼다.그래서 1941년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 했으나 일제 말기의 험악한 분위기와 경제적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3부를 만들어 존경하는 이양하 교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나머지 한 부를 가졌다.

1942년 졸업 후, 그는 송몽규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몽규는 경도 제국대에, 동주는 경도 동지사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1943년 7월 여름 방학을 맞아 귀향길을 서두르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요시찰 인물'로 몽규와 그의 주변 인물을 1년 동안이나 감시하여 독립 사상을 가진 몽규와 동주를 잡아들인 것이다.

갖은 악형 속에서 1944년 4월 몽규는 2년 반, 동주는 2년의 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들의 죄명은 독립 운동이었고, 특히 '조선 학병들은 일본이 약해지거나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조선 출신 군인으로 목숨을 바쳐 궐기해야 한다'는 일본의 징병제에 대한 생각이 옥살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에는 윤동주는 복강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시신을 수습하러 간 아버지와 당숙이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송몽규는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그 주사 때문에 동주가 죽었고 자신의 몸도 이 꼴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몽규도 한 달 뒤에 숨을 거두었는데 그들은 일본의 간악한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어 체포된 지 1년 반만에 독립의 한을 품고, 향년 28세의 일기로 원통하게 이승을 하직한 것이다.

해방 후, 윤동주의 시 중 〈쉽게 쓰여진 시〉가 연희 전문 친구들의 주선으로 처음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이후로 1948년 정병욱이 간직하고 있던 19편의 습작시 등 30여 편의 유고를 모아 생전에 고인이 제목으로 뽑아 두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이름의 유고 시집을 내게 되어 윤동주 시인의 존재를 후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지성인으로서 암담했던 조국과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는 민족의 고통을 알면서도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의 성찰 즉, 자기 반성이 지배적 정서를 이룬다. 또한, 시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영혼의 순결함도 엿볼 수 있다.

시인 윤동주의 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암흑기에 시작되었다. 그는 1936년부터 창작을 시작했지만, 그의 주된 작품들의 창작 시기는 1941년 이후이다. 대표적인 작품 <서시>를 비롯해서 <별 헤는 밤> <길> <십자가> <새벽이 올 때까지> 등이 모두 그렇다. 그의 시는 서정적이고 감각적이며 겸허하기까지 하다. 대화의 상대를 높이는 존대어가 많이 쓰이며, 하늘, 바람, 별들 외에도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사물들이 시적 소재로 많이 쓰인다. 다른 문학인들의 잇따른 친일과 변신은 우리 문학의 암흑을 한층 두텁게 했으며, 그러한 시기에 용기와 신념, 그리고 타고난 시인으로서의 천명을 다해 아름다운 언어의 목소리로 우리의 내면에 침전하고 있던 삶의 의지와 저항의 목소리를 일깨웠던 것이다.

시인 윤동주의 보석 같은 시를 되뇌며 우리는 늘 그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문학 속에 있는 시인이 시인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학 안에 있는 윤동주의 삶을 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또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늘 자신을 돌아봤던 겸손한 시인이다.

1941년, 연희전문 졸업반이었던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자작시집을 발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검열을 염려한 스승의 만류로 출판을 포기한다.

우리가 잘 아는 〈서시(序詩)〉가 바로 그 시집의 서문에 해당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서시는 시인으로서, 식민지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윤동주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모두 반영되어 있다. 시인 윤동주는 서시에서처럼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하고자 괴로워 했으며",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는 소명의식과 그런 그의 결의처럼 그는 암울하고 서글픈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그는 차디찬 후쿠오까 형무소 감옥에서 요절했다. 그는 자신의 시와 행동을 일치시켜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살다 멀리 외롭고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序詩) 전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윤동주 시인. 그는 매우 내성적이며 온순한 성품이었으나 또한 자신의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조선어 말살 정책을 폈던 일제 말기에 우리말로 시를 쓰며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려 하였고, 시대의 풍파에 견고하게 견디어 나가는 자신의 삶을 자아 성찰의 시로써 다져 나갔다. 그리고 민족과 정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속죄양으로 살 것을 다짐했다.

그후 끝까지 우리 시를 지킨 그는 시대적 고뇌를 거칠고 폭력적인 혁명이 아니라 곱게 여과하여 애틋하고 한 맺힌 감정으로 시를 쓰며 단순한 민족정신이 아닌 보다 더 큰 도덕가치관으로 일제 암흑기를 살아간 시인이다.

그의 작품들을 두고 단편적으로 윤동주가 저항시인이냐 아니냐 하며 따지는 문제는 어찌 보면 불필요한 논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존재론적 고뇌를 아름다운 서정으로 표현된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예지 그리고 자신의 힘을 일깨우며 아름답고도 투명하고 결곧은 결정체들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시가 쓰여진 시기가 일본 강점기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던 만큼, 역사적 애환과 맞물려 훨씬 더 중충적이고도 풍부한 모습으로 읽혀진다.

일제 암흑기 속에서 예민한 감수성을 시로 풀어 놓았던 윤동주는 시적 성취의 높이만큼이나 극적이었던 삶을 시와 맞바꾼 것일까?

그는 정지용과 백석의 영향으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고 맑고 고운 동시를 남겼으며, 순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시인 윤동주는 스물여덟의 짧은 삶을 마감하기까지, 일제에 강점되어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의 아픔에 괴로워했으며,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뭔가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반성 그리고 다짐을 반복하며 별처럼 노래하다 별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은, 시인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 말이라고 하겠다.

 

 

 

 


ㅡ참고문헌ㅡ

≪참고문헌≫ 김흥규, 문학과 역사적 인간, 창작과 비평 1980, pp.112-160.

≪참고문헌≫ 박호영, 한국현대시인론고, 민지사, 1995, pp.184-194.

≪참고문헌≫ 권영민, 윤동주 연구, 문학사상사, 1997

≪참고문헌≫ 이건청, 윤동주-신념의 길과 수난의 인간상, 건국대학교출판부, 1998.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김혜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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