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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설교·8/박종순목사님

붉게 물들어 가는 초중고생들/세계에 북한군 남침 알린 죽미령고개 전투

초-중-고 학생들 51%가 ........6.25 북의 남침 모른다.

1058명 초-중-고 학생들 여론조사에서 과반인 51.3%가 6.25 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51%가 넘게 북한의 침입을 모른다고 답했다. 특 북한 김정일 정권이 얼마나
나쁜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49%는 6.25를 러시아, 미국, 일본, 한국이 625를 일으 켰다고 대답했다...
이거 학교 교육과정에 문제가 있는것 아닌가? 사람들 소문 듣기에는 학교 교육과정에서
6.25를 뺏다고 하는데... 맞는지? 10년동안....

그러면 정부는 빨리 뜯어고쳐야 한다....좌파정권이 10년동안 우리나라를 빨갱이
만들려고 작정한 것이다.... 이러다가 우리나라 북한한테 그냥 주는것은 아닌지?......
2000년 6.15 회담때는 김대중이 김정일 하고, 한국에 미군이 철수되면 우리나라
평화통일 하자고 회담했다고 하던데.. 통일부는 왜 이런 사실을 국민한테 알리지 않는지?
우리나라 공산주의 만들려고 작정한거 아닌가? 촛불시위에 초중고생들이
나오는거를 보아도 이상하다.
그거 모두 사실이면 모두다 구속 시켜야 한다.....왠 날벼락인가?
우리 국민들 다 이민 가기를 원하는가?

 

 

 

세계에 북한군 남침 알린 죽미령고개 전투
[정일화 칼럼] 스미스부대 540명 가운데 4일 아침 첫 전투에서 180명 전사

<미군들은 의미를 알고 있다>

북한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남한을 침공하자 한국을 돕기 위해 맨 처음으로 달려와 장렬한 전투를 벌인 미24사단 21연대 1대대(스미스부대) 전몰장병 추도식이 4일 상오 10시 오산시장 주최로 죽미령전투현장에서 열린다. 대한민국이 잊어서는 안 될 유엔군의 첫 전투이지만 휴전 후 상당기간동안 이곳 주민들 중심으로 간소한 추도식을 했을 뿐이었다. 그 뒤 기념탑이 세워지고 오산시가 추도식을 주관하면서 죽미령전투의 의미가 좀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금년 58주년기념행사는 국내인사 1백여명, 그리고 인근 미군부대 장병 등 유엔군관계자 1백여명이 참석한다.

초청자 명단에 한미안보연구회(회장 김재창 예비역대장)도 들어 있어 화환을 보내고 임원들이 참석한다. 추도식에 참석하는 미군들은 죽미령전투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어 늘 참석자들을 놀라게 한다. 미군들은 대체로 비번이거나 부대에서 개별적으로 외출허가를 받아 나온 자발적 참석자들인데도 죽미령 전투를 세밀히 알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한국에 배치된 후 한반도전적지 탐사프로그램에 따라 전쟁교훈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 어떻게 미군이 싸웠고 왜 성공했고 실패했는지를 배운다고 했다.

죽미령 전투는 한국인에게 6 25전쟁을 올바로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전투이지만 안타깝게도 “6 25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며 미군은 대한민국을 도우러 온 것이 아니고 분단을 영속화하기 위해 온 제국주의 군대”라는 잘못된 선동정치가 의미를 흐리려 하고 있다.

<3가지 교훈>
죽미령 전투는 세계사상 가장 신속하게 국제기구(유엔)가 침략자를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그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가장 신속하게 미군이 파견된 전투였다. 세계사상 이렇게 빨리 침략자를 막기 위해 국제기구가 활동한 일은 일찍이 없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없을지 모른다. 스미스부대의 장렬한 전투가 바로 이런 정신을 말해주는 것이다. 오산 죽미령 전투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적어도 3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이 전투는 나라를 세우고 있으면서 탄탄한 국방준비 없이 안일하게 지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북한인민군이 2백대의 소련제 신형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한반도공산화를 위한 무력침략을 시작했을 때 대한민국은 쇠몽둥이로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듯 그저 쓰러지고 넘어질 뿐이었다. 전선은 무너지고 3일 만에 서울이 침략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국군은 한강다리를 끊고 남쪽으로 도망했지만 인민군은 곧 다리를 고치고 탱크로 추적해 와 온 나라가 넘어지고 있었다. 비참했다.

둘째는 북한인민군의 남침은 불법침략이라고 유엔이 규정하여 유엔군이 조직하게 한 결정도 빨랐지만 그 선발대로 미24사단 21연대 1대대병력의 진군은 무모할 만큼 빨랐다. 이런 신속함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유엔군 본부대가 오기 전 부산앞바다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스미스부대가 장렬한 죽음의 전투를 해 냄으로써 온 세계가 인민군 불법침범을 알게 되어 대한민국을 도우려 왔다. 찰스 스미스중령(웨스트포인트 출신. 당시34세)은 특공대 540명을 이끌고 태풍으로 부대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전선을 비행기와 기차. 자동차로 죽을힘을 다해 달려 오산까지 올라온 후 여기서 침략군과 격전을 벌였다. 처음부터 죽음의 전투였다. 북한군 선발대는 탱크 33대를 앞세우고 죽미령고개를 넘어 전진해 오고 있었고 스미스 부대는 유효한 탱크파괴무기도 갖추지 못한 채 불법 남침군을 대적했다. 540명 중 7월4일 아침 전투에서 1백80명이 전사했다. 이들의 전사소식이 미국본토와 전세계로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을 구해야 한다는 소리가 강하게 퍼져 갔다.

셋째는 자유를 지키는 대가가 얼마나 큰 의지와 대가를 필요로 하는 가를 알게 한다. 스미스부대의 540은 탱크를 앞세운 수 천명의 인민군선발대와 처음부터 상대가 안되는 약한 부대였다. 그러나 미군부대는 인민군을 사정거리 안에 끌어 들여 총공격을 했다. 포지원부대를 이끌고 있던 페리소령은 스미스중령이 형편없는 패배를 하고 후퇴할 그때까지 적진을 향해 대포를 쏘아댔다. 105밀리포를 인민군탱크를 바로 코앞까지 끌어들여 공격하여 4대를 파괴했다. 스미스와 페리는 뒤에 장군으로 진급하여 퇴역한 후 한국에 온 일이 있는데 “그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죽어간 부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고 말했다.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일들>
죽미령전투지를 방문할 때마다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때 전사한 병사들은  대학생을 포함한 19 또는 20세의 꿈 많은 청년들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의무병제도였으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거나 대학에 입학한 후 징집되어 한국전에 투입되었다. 미국대학 중 하바드대를 비롯한 오래된 대학치고 한국전 전사자의 이름이 구내의 어느 벽엔가 새겨져 있지 않은 대학이 없다. 이들은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명령에 따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뿌리고 죽어갔고 그 부모들은 어린 자식을 이국땅에 묻은 한을 지니고 평생을 살았다.

우리는 얼마나 그 청년들의 죽음과 부모들의 한을 기억하는가.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회에서는 매년 기념행사 때 한국전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를 초청하여 친부모 이상으로 예의를 다하는 모습을 본다. 우리는 진정 이들의 슬픔을 돌아본 일이 있는가. 진실로 대한민국 국민은 본래 은혜를 모르는 그런 민족이 아니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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