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에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7~9).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5~17).
성경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 일관성 있게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꾸준히 말하여 왔다. 그러나 학자들이 이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아직도 다양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명료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서는 그동안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장하여 온 바와 같이 에덴에서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이상적인 낙원을 창설하셨다. 그리고 그 곳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각종 나무를 심으시고 사람으로 돌보게 하셨다. 이 낙원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인간에게 자유와 함께 규율을 주셨다. 그것은 동산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여기에서 생활하기로 초청받은 사람은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될 일에 대하여 미리 경고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경고를 범하여서 죄를 짓고 말았는데, 이 벌로 인하여 아담은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결국 낙원을 상실하고 말았다.
낙원의 주인
성경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이 낙원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토마스 모어는 인간의 경제생활의 공평성을 제도적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후에 이 이론이 공산주의 기초가 되었다. 소비분배의 균형을 포함하여 생산조직의 균형을 주장한 것은 공산주의 이론인데 이 꿈은 지난 20세기 말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플라톤은 ‘이상국’을, 유대인은 이사야 2:4에서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의 나라”에 대한 꿈을 말하였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을 지키는 동물의 왕국에 더 이상 물리적인 힘을 추구하는 것이 막을 내리고 사자들이 어린이와 뛰놀고 뱀의 굴에 손을 넣고 뒹구는 참된 평화의 그림을 전하였다(사 11:6-9).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이 에덴을 조금씩 경험하기 시작하였으며(행 2:43-, 4:32-), 요한도 그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는 사망이 없고 고통도 없는(계 21:4) 낙원을 소개하였다. 주기도에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는 다시 회복되는 낙원을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누구에게나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고 주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 하시며, 또 하나님 나라는 너희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가 이 인간 사회에 올 수 있는 것임을 미리 암시한 것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그 낙원을 창설하시고 인간을 거기에 두시고 이것을 가꾸고 돌보라고 하셨다. 창세기의 기록자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에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창 2:8에 이 낙원은 “하나님이 손수 창설하셨다”고 하였는데 이 창설하다의 본래의 뜻은 식물을 ‘심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을 심으시고 거기에 사람을 살게 두셨다(창 2:8). 이는 겨자씨를 심어주신 예수님의 비유와도 일치한다. 겨자씨란 일년생 식물로써 처음에는 작은 씨앗이지만 점점 자라서 온갖 새들 곧, 세계 모든 민족이 깃드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씨앗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이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책임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이 동산에 두시고 “이것을 지키고 돌보라”(창 2:15)고 함에서 잘 나타나 있다. 씨를 뿌린 농부가 경작을 잘해야 하듯이 이 하나님의 나라도 사람의 노력에 따라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다. 바람이나 수분, 태양 등으로만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에덴이란 곧 신적인 소재와 인간의 성의가 있고 책임 있는 관심이 서로 합하여져야만 비로소 낙원이 되는 것이다.
낙원의 근본 원칙
예수님이 공생에 동안 선포하신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주제는 바로 구약의 야웨 하나님의 통치 개념에서 온 것이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는 정의와 평화의 원칙에서 시작된다고 선언하였다(사 9:7). 예레미야도 ‘공평과 정의’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원칙이 된다고 말하였다(렘 23:5). 하나님이 에덴을 세우셨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주권이 거기에 세워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에덴의 창설자가 통치하실 나라의 헌법의 기본 강령은 공평과 정의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에덴을 돌보고 지킨다는 말의 본래의 뜻은 우리가 역사적 현실에 있어서 공평과 정의가 훼손되지 않도록 잘 지키고 잘 돌보고 이를 키워 간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어떠한 역사적 현실에서도 공평과 정의만 바르게 자라가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통치 세계가 자연히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을 말함이다.
남을 멸시하지 않고 존경하는 사회, 남을 천대하지 않고 대접할 수 있는 사람,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너무나 흔하게 보았다.
예수님은 매일 같이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그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의 질서를 세우고 공평의 혜택을 입게 하였다. 예수님의 활동하시는 역사에서 우리는 불공평이나 불의를 찾아볼 수 없다. 예수와 함께 있었을 때에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고 만족하게 살 수 있는 상태였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공평과 정의는 매일 매일의 기도에서 솟아 오른 것이다. 예수님은 매일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그는 보냄을 받은 자이었기에 그를 보내신 분의 주권과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권위 아래에 자신을 두었고, 오직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을 힘써 붙들고 죽기까지 복종하였다(요 5:19-21, 히 5:7-9). 하나님의 주권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비록 하나님이 그 동산의 주인이시라도 그 동산을 지키는 인간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내부의 어두운 요인으로부터 낙원이 손상되거나 훼파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책임이 부여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란 힘쓰는 자에게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마 11:12).
자유의 제한성
에덴이 인간의 낙원으로 창설되긴 했지만 처음부터 인간에게 그 자유의 제한성을 규제하였다. 낙원이라고 해서 무한대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나무 열매는 네가 자유스럽게 먹지만 다만 선악과나무 열매는 먹지 말아라(창 2:16,17).” 이 금령을 바르게 식별한다면, 누가 무엇을 먹고 안 먹고가 문제가 아니라 왜 인간이 이 금령을 순종해야 하느냐 하는 금령의 근거와 이유를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법을 세우신 것은 다만 인간을 위해서였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이 세워 드리고 인간은 그 주권에 복종하는 것이 정당한 관계성임을 알게 함이다.
에덴에서 인간은 선악과나무 이외의 다른 모든 열매는 먹을 수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하나님의 금지된 나무에게까지 침범할 수 있는 자유는 아니다.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자유와 금령’으로 구별되었다. 하나님의 금지령은 그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나 침범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통치하는 곳이다. 이 주권은 사람들의 자유의 남용으로 침범되거나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죄의 본질
칼빈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인간은 그 창조주에게 반역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전 인류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했다. 원죄론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원죄란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한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시작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는 비정상적인 관계를 가졌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는 일들이 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죄는 숙명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인류의 조상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에덴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해도 범죄자는 이곳에서 살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셨다(창 3:24). 낙원을 지키고 돌보야 할 사람이 낙원에서 나갔는데 더 이상 낙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인간의 역사적인 현실을 이루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종교 등 인간 삶의 분야 전반에서 죄를 추방하지 않고서는 그 나라가 올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에덴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았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다시 회복하려고 한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에덴동산이란 곧 거기에서 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정의와 공평의 원리를 돌보고 지킴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도록 하려면 우리 모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막 1:15).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을 종 되었던 땅 이집트에서 특별한 은총으로 그들을 불러내시지 않았던가?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주님이시고, 그들은 야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하나님이 베푼 특정한 땅에 들어가서 살아 갈 그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일컫는 다윗이 왕도를 지키고 그를 부르신 하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그 기름부음에 합당한 정치를 하였는데, 그가 비록 사람들에게 윤리적으로는 흠이 많았지만(시대마다 다른 상대적인 가치관이 있겠지마는) 그는 그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항시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 자신과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여쭙고 기다렸다. 다윗이 섬기는 백성들은 다윗이 곧 하나님의 심부름을 잘하는 청지기라고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치다고 할까?
다윗의 시대는 발람이 노래한 그 것에 잘 나타나 있다(민 24:3-9). 그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맛보았다. 이스라엘은 무적의 왕국이었다. 물질이 넘치고 국방도 철통 같았다. 그 누구도, 어떤 선지자도 아브라함의 축복(창 12: 3)이 이뤄졌음을 의심치 안았다. 그러나 다윗이 돌아가고 솔로몬이 국정을 맡았을 때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매번 침범을 당하였다. 다윗이 신앙적인 태도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켰다면 솔로몬은 이성적인 합리적인 정치를 꾀하였다. 그의 지혜와 수완은 신앙적인 차원을 넘어버렸다. 그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군주체제를 이루었고, 따라서 완전한 독재정치가 되고 말았다. 그는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많은 외국 출신 처첩을 거느렸고, 그들이 가져온 이방신앙을 받아들여서 결국은 백성들로부터 반대에 부딪쳤고, 하나님의 은총과 기적을 높이 숭상하여온 야웨 경외심을 내치고, 전통적인 왕도를 이탈하여 자기의 정책, 자기의 법을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보다도 앞세웠다.
솔로몬 이후 이 백성들은 왕도를 지키는 임금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제대로 나타나는 날을 경험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 같이 흐르게 되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사슴이 목말라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이 그대로 지켜지며 주인 되신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공평과 정의가 이뤄져 참된 평화가 이뤄지는 낙원을 매일 꿈꾸었다. 바로 이 에덴이 그들이 꿈꾸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은진교회 주홍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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