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세이크 자라, 유태인의 가장 오랜 정착촌
동예루살렘을 신설할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좌파들과 오바마에 이어 유럽연합의 주요 축인 스웨덴에서도 갈 수록 강경하게 튀어나오고 있다.
스웨덴은 이미 유럽연합에다, 구약의 무대인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수도로 하는 것과 이스라엘의 국경을 1967년 전쟁 이전으로 되돌릴 것을 입법화하는 안을 제출한 상태다. 노르웨이는 그 안에 반대 입장을 밝혔지만, 다른 유럽 연합 참가회원국들은 동조하는 입장이다.
12월1일, 아랍 폭도들 [ 일명 ; 환영 위원회 ]과 미국인, 스웨덴인들이 동예루살렘 지역에 있는 세이크 자라 구역 정착촌에 몰려가 돌팔매질을 벌였다. 이유는 한 이스라엘 가정이 화요일 새로 이사해 들어갔다는 것 때문이다. 경찰이 출동하였으나 이미 한 이스라엘 경비원이 돌에 맞아 피를 쏟았다. [참조: 사진]
공격을 당했던 집은 다가구형 주택으로 거기 살던 이스라엘 가정들은 일 개월 이전부터 이어진 아랍폭도들의 공격 및, 경찰의 안전 우려에 의한 대피 요청 때문에 해당 가옥을 비운 상태였다. 거기에 아랍폭도들은 법원의 퇴거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머물러 왔다.
유엔은 이번 사건에 반기문 사무총장 명의로 성명하기를, 이스라엘 측이 피점령 동예루살렘구역"안의 팔레스타인을 이웃한 이스라엘 정착인들의 정착 때문에 파괴와 강제축출 사태가 벌어진 일은 매우 유감이라고 표명했다.
구예루살렘 구역안에 있는 세이크 자라는 바카, 르바임 계곡과 더불어,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오래 된 인간거주의 흔적을 갖고 있는 장소다. 손도끼와 도편의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영국인들이 들어왔던 영국자치 시절에, 이미 세이크 자라 구역을 소유지로 거기 살고 있던 유태인들 수백가정이 영국으로부터 퇴거하라는 압박을 강요 당했다.
로마 시대 거듭 고토에서의 유태인 추방이 있었지만, 10,11 세기에도 거슬러 가면 예루살렘에는 카라이트 유태인들(중동지역 거주)이 예루살렘 구역에서 페르시아의 법을 지키면서 살았던 것으로 나온다. 특히 그들은 기드론 계곡의 서편 능선 일대를 소유했다. 또 이 때에도 각국으로 흩어졌던 유태인들의 예루살렘으로의 순례여행은, 특히 신년과 유월절 기간에, 줄이어졌다.
1400년대 잇슈부(이스라엘 고토로의 유태민족 정착 / 뜻: 올라가기)가 시작될 때, 스페인 거주 유태인이었던 세파르딕 유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1434년 유럽에서 퍼지던 흑사병이 예루살렘에도 퍼졌을 때 유태인 공동체 안에서만 90명이 죽었다고 나온다. 유태인들은 모세율법 이래로 위생이 어느 이방민족보다 탁월하였음에도 90명이나 사망했다는 것은 이 당시 이미 유태인들의 예루살렘 공동체가 수백명 이상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1492년과 1498년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서는 카톨릭을 지지하던 왕가에 의해 세파르딕 유태인들에게 엄청난 박해가 벌어졌고 몰수와 학살, 추방이 있었다. 이 일 후에 스페인 전반도가 오래도록 이슬람의 손아귀에 점령되고 참혹한 역사를 겪게 된다.
1700년에는 1,500명의 공동체를 거느린 아쉬케나지 유태인(러시아와 동유럽 지역)들이 랍비 예후다 헤 하싣의 지도하에 예루살렘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의 예언대로, 일일이 각 토지에 돈으로 값을 주고 구입한 땅에 정착했다.
그리고 이런 유태인들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으로의 이민은 특히 17, 18세기에는 더욱 본격적으로 활발해졌으며 그들은 예루살렘과 티베리아스, 헤브론, 사페드 지역등을 중심하여 모였던 것이다.
1808년이 되자 그 간 정통 유태교 위주의 에레츠 이스라엘 귀환운동에서 벗어나와 비정통 유태교인들에까지도 알리야 운동은 확산되었고 그 영감은 빌나의 탁월한 랍비 가온[Gaon of Vilna]이 불어넣었다. 가온은 비록 고토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유태인들은 여러 그룹으로 고토로 들어갔고 처음에는 무슬림들의 조직적인 테러를 겪었으나 그 후 모기와 전염병, 지진이 예루살렘에 창궐하게 되면서 이슬람의 훼방이 잦아들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유태인들은 옛 주인을 기다리던 그들의 옛땅에 주거를 틀었다.
1880-1903년사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점령하이던 이스라엘 고토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은 적어도 35,000 명 이상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 인구가 7십만명이었으며 - 1919년 영국자치부터 독립 직전까지 알리야한 유태인들의 수는 약 48-50만명이다 - , 독립 직후 일어난 아랍의 침략전쟁과 중동 아랍구역안에 천년 이상 살아오던 유태인들 구십만명이 쫓겨나 - 전재산을 약탈당하고, 그들은 한 푼 없이 쫓겨났다. - 신생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 안전하게 추가 인구로 자리 잡았다.
이런 알리야 역사 속에서 어제 유혈극이 난 세이크 자라 섹션은 적어도 백년 이상 세파르딕 공동체와 크네셋(1920년 설립) 이스라엘인들이 돈을 주고 합법적으로 구입하여 거주해온 알리야 정착촌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지역이다.
세이크 자라 공동체가 시작된 년도는 1891년이다. 당시 이웃하던 시몬 핫자딕 공동체, 나할랏 시몬 공동체와 어울려 건설되었다. 당시 이곳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살던 아랍가구수는 지금의 중동 왕실가인 후세이니 가문의 6가구 뿐이었다.
1948년 독립 후 세이크 자라는 고립한 섬 처럼 되었으며 거기 요르단 정부에서 팔레스타인 28 가구를 들여보냈다. 4차 제네바협정에 의해 이 곳에서의 영구적 소유권 이전은 불법화되었으며 요르단은 적몰 재산 관리구역으로 감시에 들어갔다. 1967년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세이크 자라는 다시 이스라엘 통치하에 들어갔다.
수백년동안 세이크 자라에 주로 거주한 민족은 유태민족이 많았고 유일하다시피 했다. 아랍이 점령한 것은 1948년부터 1967년 간의 단 20년 동안이다. 성경은 일년을 이천년으로 해석한다.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와 흡사한 세이크 자라 섹션인 것이다.
세이크 자라는 예루살렘 경전철 일호선의 중앙에 있는 역이다. 거기에 단 20년 불법적으로 요르단이 감시했다는 이유 하나로, 유엔과 반기문과 유럽연합과 아랍과 팔레스타인이 전부 빼앗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2009.12.03. 파아란 한은경.
관련사진] 현장
*** 중동의 돌팔매질은 처절하다. 한국에서 생각하듯 단순한 어린아이 돌팔매로 보면 시각 잘못이다.
삼천년전 이스라엘은 내전이 일어났을 때 베냐민지파의 돌팔매전사들 수천명에 의해 동족 6만여명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윗은 돌팔매질로 삼미터 거구의 골리앗을 단방에 죽였다.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반유태 테러와 지하드 일환으로 돌팔매질과 총잡이를 배운다.
돌에 맞은 이마를 이스라엘 경비원이 어루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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