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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반도2/위기의 한반도·5

[스크랩] 왜 한국군은 북의 남침땅굴을 부정하는가?

Why? 

한국군은 북의 남침땅굴을 부정?

 

  글쓴이 니시오까 쯔도무 등록일 2003-06-29 

     산께이 신문  

월간지 정론(2001년11월) 에 실린 기사 

일본 언론에 보도된 남침 땅굴의 전모

 

 

북한이 한국에 대한 기습공격을 위하여 남침땅굴을 계속 파온 것은 관계자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 국방백서(1997년판)도 「현재 북한은 휴전선지역에 20여개의 남침땅굴을 판 것으로 추정된다」고 써있다. 미군도 1975년에 「합계 14개 혹은 그 이상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제임즈 홀링스 워즈 중장 한미연합 제1군단 사령관 1975년 1월 30일 성명)고 하였다.

 

한국군은 지금까지 4개의 남침땅굴을 발견하고 있다. 그 4개는 모두 군사분계선으로부터2km의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을 훨씬 넘어 서울근교(제5땅굴)와 서울남방(제6땅굴)에서 북한의 남침땅굴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한국에서 제기되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금년 7월 23일, 한국국회의원회관 대 회의실에서 민간단체인「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관계자가 국회의원 5명과 각계인사 700명이 참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고발을 하였던 것이다.

 

그 주장을 소개하기 전에,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의 주요멤버를 거명 해보자.

 

정명환 : 전 제6사단장(예비역 소장, 제2땅굴 발견자)

정지용 : 전 보안사령부 대공수사관

이선호 : 전 국방대학교수(행정학 박사)

윤여길 : 전 국방부장관 과학보좌관(공학박사)

지만원 : 전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공학박사)

김철희 : 전 중앙정보부 정책심의관

강병규 : 전 국회의원(법학박사)

여영무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법학박사)

이 준 : 땅굴탐사전문가(전 경찰간부)전직이긴 하나 안보, 군사, 안보분야의 쟁쟁한 분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리스트는, 상기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모임이 금년 3월 국회에 제출한 청원서에서 취한 것인데, 나는(니시오까) 이 모임 전원에게 면회하여 자세한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하 본고에서는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을 「민간고발자」로 표기한다. 다만,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은 금년에 정식으로 결성되었으며, 그 이전에 남침땅굴 탐지작업은 상기의 정지용씨가 중심이 되어 행해졌으며, 본고에서 탐지작업을 기술할 경우「정지용씨 등」이라는 표현도 병용하였다.

 

(1) 군은 시종일관 사실무근이라고 부정

북한이 한국내부 깊숙이 남침땅굴을 계속 파고 있다는 문제 제기는 90년대 초부터 계속하여 왔다. 실제로 정지용 : 전 보안사 대공수사관 등은 이미 80년대 말경부터 독자적으로 탐사활동을 해왔으며, 그 조사를 토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잡지인 「월간 조선」이 1992년 5월호부터 4회에 걸쳐 연재 특집을 낸 바도 있었다. 이번에 새삼스럽게 그 4회에 걸친 월간 조선의 특집을 읽어 보았다.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조갑제 편집장이 팀장이 된 취재반은, 민간고발자의 주장을 그대로 쓰지 않고 대단히 신중히 검증을 진행하였다. 군부의 부정적인 견해도 상세하게 소개되고, 가지가지의 실험이 되풀이되어(그 중에는 정지용씨 등이 개발한 청음기가 정말 땅속의 땅굴 공사음이나 땅굴내의 사람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가도 이미 발견된 북한의 남침땅굴 안에서 군 당국 입회 하에 시험해 보는 실험도 포함된다), 다수의 전문가(일본인 음향분석전문가도 포함)의 견해, 탈북 귀순자의 증언이 모아져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후평리의 지하 110미터 지점에서 녹음된 TBM(자동굴착기)으로 땅굴을 팔 때에 나오는 기계음과, 두 사람의 인간목소리(「감전한다. 이것을 만지면 1만1천 감전한다」「예, 예」)는 과학적 분석결과, 조작한 것이 아닌 한, 「3.7 × 3.7m 의 땅굴에서 녹음된 것이다. 그 땅굴은 북한이 파고 있는 장거리 전략땅굴일 수밖에 없다」(월간조선 92년 8월호)는 것이었다

 

(주 1 ) :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정지용 등이 개발한 청음기는 땅속 암반에 생긴 금이 간 부분을 통해서 암반을 전해오는 소리를 상당히 분명하게 녹음할 수 있다. 그러나 공기를 전해오는 소리는 녹음할 수 없다.

 

② 일본인 전문가 스즈기 마츠미 씨 (일본 음향연구소장 : 전 경찰청 과학경찰연구소 음향전문가)의 음향분석결과, 사람목소리와 기계음은 3.77×3.77 미터 또는 3.77×7.54 미터로 5, 6미터 떨어진 곳에 벽이 있고 반대쪽은 계속 이어져 있는 땅굴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판명하였다.

 

③ 사람목소리를 방언학자나 북한으로부터의 귀순자가 분석한 즉, 북한 함경도 지방의 방언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는 11,000은「만 천」으로 발음되는데, 북한에서는 녹음된 대로 「1만1천」으로 「1」을 붙여서 발음한다.

 

④ 한국에는 11,000 볼트의 고압전류는 존재하지 않으나, 북한은 11,000 볼트가 있음이 땅굴공사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귀순자 김정민 : 전 사회 안전부 간부의 증언으로 판명됨.

 

⑤ 기계음을 들은 한국 TBM 기술자는 「틀림없이 TBM 소리다」라고 주장했다. TBM(자동굴착기)에는 3.7×3.7미터 정도의 땅굴을 파는 크기의 것이 있지만, 한국 내에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⑥ 김정민 은 「북한이 스웨덴에서 다수의 TBM을 수입하여, 그것에 의거 국내에서 제작도 했다」라고 증언함.

 

⑦ 테이프가 조작된 것이라고 하면, 3.7×3.7m 의 폐쇄된 공간에서 TBM을 가동시켜 북한방언을 사용하는 두 사람의 성우가 회화토록하는 대단한 작업을 한 것이 되는데,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땅굴발견의 상금은 의혹을 제기한 단계에서는 받을 수 없으며, 땅굴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비로소 받을 수 있으므로 테이프를 조작할 동기도 없다.

 

그러나, 한국군과 국방부는 그 고발을 시종일관 사실무근이라고 계속 부인하고 있다. 월간 조선과 정지용씨 등은 군 당국에 의혹지점의 굴착을 요구했으나, 응해지지 않았으며(군부는 3회 실시했다고 주장하나 정지용씨 등은 인정하지 않는다) 논쟁은 최종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은 채였다.

 

(2) 땅속의 괴음과 부자연스러운 물질

그래서, 「민간고발자」는 1998년부터 서울북방 50키로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12키로 지점에 있는 경기도 연천군에서 독자적인 조사를 실시, 굴착공사를 하였다. 상기의 「제5남침땅굴」이 이것이다. 그 부근에서도 이미 92년 월간 조선에 특집을 낸 시점에 주민이 지하에서 이상한 진동을 느끼고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증언이 있었고, 인간의 목소리도 녹음되었는데, 역시 군은 땅굴이 아니라는 견해를 공표했었다. 96년 6월부터 7월,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 174-1의 이승환씨 집 옆 논에서 이상한 거품이 자꾸만 떠올라 이씨의 장남 등에게 목격되었다. 97년 9월 중순 낮에 이승환씨 집이 몹씨 흔들려 텔레비젼 위에 놓아둔 병이 떨어졌다. 화장실 벽에 금이 갔다. 지진이거나 트럭이 라도 부딪친 것이 아닌가 라고 착각할 정도였는데, 가족이 밖에 나가서 보아도 아무 것도 없고, 옆집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동년 11월 밤 9시부터 다음 날 9시까지 이승환씨 집 지하에서 갱차가 이동하는 소리, 돌을 끌고 가는 듯 한 소리, 바위를 깎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정보를 입수한 정지용씨 등은 98년 9월 굴착공사장 앞마당에 지하 33미터까지 볼링하여 청음기를 설치한 즉, 1개월 후인 10월 9일 기계음 녹음에 성공하였다. 8일 저녁 8시경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녹음기가 다음 날 오전 8시에 60분 테이프 끝까지 녹음이 되어 있었다. 청음기는 소리가 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음으로 8일 밤부터 9일 새벽에 걸쳐 1시간 이상, 땅속에서 기계음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나(니시오까)는 그 테이프를 현재 갖고 있다. 「킨, 킨」이라는 소리(고압전선에 전류가 흐를 때 나는 소리에 유사하다)가 리듬을 갖고 계속된다. 「갈, 갈, 갈」무언가를 끌고 가는지, 무언가를 깎는 듯한 소리가 단속적으로 들렸다가는 끊겼다 한다. 또 모터가 회전하는 듯한「가, 가, 가, 가 ...」라고 하는 소리(TBM으로 땅굴을 팔 때의 소리와 비슷하다)도 가끔 들린다. 「커튼, 커튼」돌이 낙하하는 것 같은 소리도 있다. 소리는 몇 번인가 뚝 끊겼다가는 또 계속된다. 실제로는 청음기가 정지하고 있는 조용한 시간도 있었다. 이러한 괴음을 60분 테이프로 재생하면 새삼스럽게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10월 10일, 이 테이프와 그 동안의 경위를 기록한 것을 군에 제출했다. 그러나, 군내 담당부서인 육군본부 정보작전 참모부 탐지과는, 테이프는 조작한 것이라고 하여 일축하고 말았다. 그래서,「민간고발자」는 독지가로부터의 자금원조를 얻어, 독자적으로 굴착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최초는 이승환씨 집으로부터 500미터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의혹지점이 있는 임진강변에서 굴착작업을 개시했다. 개인지주가 없는 강변이기도 하여, 부르도저, 트럭 등 중장비를 사용하여 대규모 공사를 하였다. 먼저 노천굴식으로 깊이 24미터, 폭 50미터의 거대한 구멍을 판 후에 직경 2미터의 종갱을 지하 40미터까지 팠다.

 

그러자, 바위조각이 가득 찬 주위와는 전혀 다른 부분을 발견했다. 그 바위조각의 틈새에는 콘크리트와 비슷한 응고제가 채 굳어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또 바위조각을 제거하자 갈대줄기, 실, 은박지 등 자연 상태 에서는 절대로 지하에는 존재치 않는 것이 나왔다. 「북한 쪽에서 위장하기 위하여 땅굴을 다시 묻었다」고 판단한 정씨 등은 99년 12월 23일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하여, 북한의 남침땅굴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나(니시오까)는「그 응고제가 채 굳어지지 않은 것」을 실제로 만져 보았는데, 손가락으로 누르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만만한 것인데, 도저히 자연물질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또 갈대줄기, 실, 은박지도 찬찬히 살펴보고 만져 보았는데, 지하 40미터 지점에 어떻게 이것이 있었는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은박지 일부는 지금 니시오까가 갖고 있다.) 그러나, 군 측은 기자회견장에서「공간부분은 단층현상에 의한 암석의 자연 파쇄로 보여 지며 시멘트 성분은 보이지 않는다.「북한으로부터의 거리나 깊이로 보아 땅굴 굴착은 어렵다」 등으로 땅굴 설을 부정했다. 그 때문에 남침땅굴 발견보도는 일본 산께인신문 12월 24일부 이외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자금부족 등으로 동 지점에서의 작업은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999년 12월 문제의 이승환씨 집 앞에서도 직경 25센치의 종갱을 지하 40미터까지 파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지하 36미터 지점에 물이 차 있는 커다란 공동이 발견되었다. 현장에서 밀착취재를 하고 있던 SBS (한국 3대 TV방송국의 하나) 취재진이 내시경카메라와 일반카메라로 수중촬영에 성공하고, 전문가에 의한 화상분석을 거쳐 2000년 3월 2일 SBS뉴스로 「연천군 지하에서 인공땅굴 발견」으로 보도했다. SBS는 3월 5일, 「뉴스추적」이라는 특별 프로그램에서 방영했다.

 

이에 대해서 군은, 3월 3일과 4일 현장조사를 하고, 4일에 「발견한 것은 땅굴이 아니라 파쇄층 (종갱공사 때문에 암반의 약한 부분이 무너져 생긴 자그마한 자연공동)이며, 땅굴의 가능성은 전혀 없으므로 굴착의 필요없음」이라는 공식견해를 발표했다. 이 군의 발표에 대해서 시민단체 「보수국민연대」가 현장조사가 불충분하고 최초부터 부정적 결론을 전제로 하는 의혹이 있다고 하여,「땅굴진상규명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동 위원회는 독자적으로 수억원의 자금을 모아 4월 SBS 가 촬영에 사용한 종갱을 직경 60센치로 확대하여 지하 41미터까지 관통케 했다. 공사 때, 36미터에서 39미터의 지점까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쑥 내려가는 이상현상도 일어났다. 그리고 잠수부를 종갱에 넣어 확인작업을 행하였다. 종갱 속의 물이 탁해져 있었고 확인작업은 매우 곤란했었으나, 펌프로 수중의 진흙이나 바위 파편 등을 빼내는 등의 노력을 계속하여 마침내, 잠수부가 땅굴에 직접 들어가는데 성공하고 수중카메라로 땅굴 내의 촬영을 하였다. 잠수부의 투입은 합계 66회, 비디오촬영은 13회에 걸쳐 실시되었다.

 

벽에는 자연히 생겼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직각의 단면이 발견되었다. 바닥부분이 평평한 상태라는 것도 판명되었다. 최종적으로 확인된 땅굴은 지하 36미터 지점에 천장이 있고, 높이 2.2미터, 폭 2.5미터, 이승환씨 집 앞에서 남쪽, 임진강 방향으로 7미터 뻗어있다. 가장자리는 바위조각으로 묻혀 있었고, 내부는 물이 차있는 상태였다. 종갱 가까이 있는 몇 개의 장소에서 볼링을 해보니, 땅굴이 이어지는 곳에는 지하 35˜36 미터에서 각 2미터는 전혀 아무런 저항 없이 쑥 들어가 땅굴을 관통했다.

 

주목되는 것은, 60센치 종갱으로부터 남쪽으로 25.4미터 즉, 발견된 땅굴의 남단으로부터 18미터 지점에서의 볼링에서도 마찬가지로 지하 35-36 미터에서 약 2미터 아무런 저항 없이 들어간 점이다. 즉, 땅굴남단이 막혀 있는 것은 위장이며, 실제로는 남쪽으로 쭉 뻗어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군 발표의 「파쇄층」일 가능성도 검토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무너진 바위가 공간을 메워져 있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것은 존재하지 않고 또 높이와 폭이 거의 일정한 공간이 계속되어 있어 자연히 생긴 것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자연동굴이 아닐까하고도 검토되어 수중에서 촬영한 비디오를 많은 전문가에게 보였다. 한국 내의 땅속에서 발견된 자연동굴은 1. 용암동굴, 2. 석회동굴 의 두 종류뿐이다.

 

먼저, 1 에 대해서는 화산암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용암이 굳어진 때처럼 벽면이 매끈하지 않으므로 있을 수 없다. 또 2 에 대해서도 이 지역이 편마암지역이며, 그 가능성은 매우 작으며 종유석 등이 일체 보이지 않고 또한 벽면이 울퉁불퉁한 것으로 보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감정결과가 나왔다.

 

(3) 군의 공식견해에 「민간고발자」가 반론

2000년 7월 28일, 이상과 같은 조사결과를 전문가의 감정의견, VTR테이프와 함께 군에 제출하여, 전면적인 굴착공사실시, 혹은 해군의 잠수전문부대에 의한 현장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군은 8월 19일 「땅굴이 아니다」라는 공식견해를 발표했다. 군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전문기관(대한광업진흥공사, 농업기반공사,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정밀분석을 의뢰한 결과 첫째로, 땅굴 굴착시의 증거가 되는 삭암 및 발파 흔적, 경차의 레일, 전기환기시설, 유기물 등의 흔적이 발견되어 있지 않으며 둘째로, 만약 땅굴이라면 남쪽과 북쪽 중 어느 한쪽으로 쭉 연결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양쪽 모두 자연 암벽의 형태로 막혀져 있다는 점(신고자가 주장하는 땅굴의 크기 : 2.5×2.2 ×7m)

 

셋째로, 장시간의 양수작업을 해도 물이 계속 차 있고 내부의 암석이 무너져 있는 것으로 보아 땅굴 굴착에 부적절한 단층 파쇄 지역임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물이 차 있는 상태에서 북한군도 땅굴을 굴착할 수 없다.) 따라서, 신고자 등이 땅굴이라고 주장하는 공간은 종갱공사 및 양수작업 과정에서 바위조각과 진흙이 지상으로 방출되었을 때에 형성된 공간이라고 판단되며, 민간인 공사업자도 「종갱공사 때 지하로부터 주먹정도 크기의 돌이 차 1대분 나왔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신고자가 주장하는 지하에 땅굴이 있다면은, 그와 같이 진흙이나 돌의 파편이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고 지하공간(땅굴) 지역에 떨어져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국방부 「최근의 제5,6 땅굴 발견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에서 번역)

 

이 견해에 대해서「민간 고발자」는 다음과 같이 반론하고 있다.

 

당국이 비디오테이프의 정밀분석을 의뢰한 기관은 대한광업진흥공사, 농업기반공사,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모두 다 정부투자기관이며, 정부의 압력이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어용기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객관적 공신력과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민간기관이나 외국의 기관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도 함께 비교분석하여 최종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민간탐사자가 자문을 구한 민간의 대학교수와 전문가는 이구동성으로 땅굴이라고 긍정한 것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국이 말하는 증거로서의 발파 및 삭암 흔적은 잠수부의 증언에 의하면, 땅굴 벽면의 비스듬한 부분에 불규칙한 울퉁불퉁한 곳을 발견하고 비디오화면에도 그와 같은 흔적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갱차의 레일이나 전기환기시설의 흔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상대방이 갱구를 열어 내려올 것을 알면서 바보가 아닌 이상 현장에 남겨둘 리가 없는데 이는 허무맹랑한 지적입니다.

 

앞에서 언급했지 만은 이 땅굴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지는 혹은 또 하나의 지선일지도 모르는 장소인 임진강변에 부분 굴착한 땅굴 속에서 무엇보다도 확고부동한 증거품인 북한 작업원이 사용한 은박지와 실 뭉치를 유류품으로 수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도 유류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조작한 것이라고 누명을 씌우는 당국의 처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다 확실한 증거는, 이승환씨 집 마당을 파내려 가서 부딪힌 지점을 중심으로 7m 깊이의 땅굴 양측을 바위조각과 인공물로 차단 봉쇄한 후, 구멍을 만들어 물을 주입하는 위장공작을 완전히 행하고 있음을 수중에서 잠수부가 확인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인위적으로 물을 주입한 땅굴 속의 현장을 조사 조차하지 않고 자연암석으로 막혀져 있는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웃음거리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볼링작업 시 바위조각과 진흙이 지상으로 분출한 것은 북한의 작업원이 우리가 파 내려가는 지점을 먼저 알고 위장공작으로서 땅굴 (2.5×2.2×7m 규모의) 양측을 사전에 차단봉쇄 하였기 때문에 밀폐된 갱내의 공기압력에 의해서 바위조각이 분출케 된 현상인 것입니다. 만약, 양측이 봉쇄되어 있지 않은 개방상태의 공간에 종갱이 도달했다면 바위조각은 위로 분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보아 위장공작으로 양측을 봉쇄한 땅굴의 존재는 너무나 명백한 것인데도 이것을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 「국방부의 땅굴징후 부인에 대한 반박성명」에서 번역)

 

이 양자의 주장을 제3자적 입장에서 읽으면, 적어도 북한의 땅굴의혹을 부정할 수 없으며 철저한 현장조사를 요구하고 싶다. 그런데, 군은 조사 계속의 필요를 일체 인정치 않는다. 군측이 왜 완고하게 땅굴의 존재를 계속 부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 배경이 생각된다. 그것은 잠시 후에 상세하게 말하고 싶다.

 

(4) 사람목소리가 분명하게 녹음되었다.

필자 는 그에 앞서, 또 하나의 의혹 지역 「제6땅굴」에 대하여 경과를 개관코자 한다. 장소는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지화리, 서해(황해) 해안에서 불과 400m, 해발 20m 의 자그마한 반도의 가장자리나, 군사분계선에서 직선거리로 63키로, 서울은 판문점으로부터 약 40키로 이므로 여기까지 북한의 땅굴이 와 있다고 하면은 이미 서울로부터 10키로 이상 남쪽까지 침투한 것이 된다.

 

1999년 9월 우물 파는 업자가 지하수맥을 찾기 위하여 볼링작업을 하였던 바, 지하 30-40m 사이에서 볼링장치가 3m 정도 갑자기 낙하하여 지하공간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래서 콤푸렛샤를 사용하여 그 공간에 공기를 계속 주입했으나 몇 시간이 지나 전량이 흡입되어 공간이 매우 큰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 상기 연천군에서의 탐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 이 정보를 입수한 「민간고발자」는 11월 현장조사를 하고 업자가 만든 지하 70m 볼링구멍에 청음기를 설치하였던 바, 11월 7일오후 3시경 기계음과 고압전류의 유동음이 녹음되었다. 부근을 민간수맥탐사 기술(다우징)을 사용해서 조사한 결과, 1.5키로 정도 동쪽으로 간 지점에서 같은 크기의 지하 공동 징후가 나타났다. 그곳에 지하 40m 의 볼링을 4개하여 청음기를 설치하였던 바, 2000년 2월 14일 야간에 「대감께서 총리가 되십니다」라고 하는 사람목소리가 분명하게 녹음되었다. 대감이란 이조시대의 고급관리(정2품 이상)을 호칭할 때의 존칭인데, 현재도 직위가 위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아첨하여 말할 때에 사용되기도 한다.

 

또 현재 북한에는 「총리」란 직위가 있다. 나(니시오까)는 그 테이프를 갖고 있으며, 이것을 쓰면서 다시 재생해 보았다. 몇 번 재생하여도 그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린다. 도대체 누구 목소리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북한병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으며, 만약 그렇다면 서울을 훨씬 넘어선 지역까지 북한의 땅굴이 들어왔다는 것이 된다. 테이프를 되풀이 해서 들으면서 강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지용씨 등은 2000년 8월 이상과 같은 상황을 보고서로 기록해서 증거테이프와 함께 국가정보원에 제출하여 조사를 요청하였던 바, 담당은 국방부라고 하면서 서류가 그쪽으로 돌려져 10월 17일 군사전문가에 의한 현장조사가 행해져「북한이 굴착한 땅굴의 징후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이라는 결론이 공표되었다. 자세한 논의에 대한 소개는 생략하지만, 문제의 테이프에 관해서 국방부는「조작」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

 

신고자가 땅굴탐지 중에 지하로부터 기계음과「대감께서 총리되십니다」라는 음성을 녹음했다고 주장하여 제출한 테이프는 한국표준과학연구소에 의뢰하여 분석한 결과, 기계음과 「대감께서 총리되십니다」라고 하는 음성은 지하에서가 아니고 지상에서 조작하여 녹음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국방부「최근의 제5, 6 땅굴 발견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에서 번역)

 

이에 대하여 「민간 고발자」측은 다음과 같이 격렬하게 반론하고 있다. 신고자가 수개월간의 야간잠복 청음결과 녹음한 귀중한 지하의 인간 육성을 당국이 조작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천벌을 받아야 할 일이다. 표준과학연구소 라고 하는데서 어떠한 과학적 근거로 지상에서 조작하여 녹음한 것이라고 단정하였는가, 부당천만한 일이다. 만약, 신고자가 그와 같은 것을 행하는 범죄집단이라고 확신한다면 어째서 그것을 고발하여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국방부의 땅굴징후 부인에 대한 반박성명」에서 번역)

 

(5) 자동굴착기를 둘러싼 논쟁

또 하나 군과 「남침용 땅굴을 찾는 사람들」이 격렬하게 대림하고 있는 논점을 소개한다. 그것은 TBM(자동굴착기)에 관해서다. 북한이 군사분계선지역을 훨씬 넘어서 땅굴을 파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한가라는 근본문제에 관하여「민간고발자」는「북한은 TBM을 300여대 보유하며 그것을 사용하여 남침땅굴을 파고 있음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는데 대해서, 국 측은「TBM 은 남침땅굴 굴착에 사용되고 있지 않다」고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북한이 TBM을 사용해서 땅굴을 굴착하려면은 여러 가지 기술적인 제한사항이 있습니다. 먼저 TBM(전단면 굴착기)은 규격이 직경 2.6˜8m 까지 다양하며, 1대당 도입가격도 크기에 따라서 30˜100억원이며, 장비의 길이가 직경 3m 의 경우 127m (무게 200톤)이며 장비조립 시 최소한 직경 100m 이상의 공간과 1개월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고, 굴진능력은 암반의 경도에 따라 다른데 평균 1일 15m 이며, 1대당 장비수명은 15km 이고 반드시 입구를 팔 때 장비의 정치를 위해서 보조 갱(파이롯트 갱) 10 - 20m 정도가 설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장거리 해저땅굴에 TBM 사용 시 제한사항을 보면, 첫째는 TBM을 이용하여 땅굴을 파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에 정밀지질조사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되며, 지하지질구조 수맥의 상태를 알지 않고서는 절대로 장거리 해저땅굴 굴착은 불가능합니다. (중략)

 

둘째는, 단일 갱으로 63km 까지 땅굴을 파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TBM 은 구경 3m 일 경우, 장거리 단일 갱의 굴착 시에 장비의 특성상, 후진이 불가능하여 장비의 수명이 15km 로서 추가장비의 투입이 곤란함으로 장비를 갱내에 묻어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참고로 영국,프랑스 유로 터널도 공사 중에 TBM 6대가 갱내에 묻어져, 한국에도 20대 밖에 없는 고가의 TBM 을 하물며 북한이 300대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만약 북한이 63km 의 장거리땅굴을 팠다고 하면은, 그 안에서 나오는 버럭 만으로도 70여만 입방미터(63km×구경 3m×체적비 1.75) 이며, 이것은 5톤차량으로 20만대를 훨씬 넘는 엄청난 양이며, 우리쪽 감시수단에 발견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이외에도 장비조립 및 보조 갱 설치, 대규모 단층대 통과를 위한 물대책, 붕괴대책, 땅굴을 파는 동안의 환기, 배수, 전기시설 등의 노출이 불가피합니다. 북한이 장거리 땅굴 굴착 시 TBM 을 사용하지 않았던 또하나의 증거는, 북한의 개천 - 대성호 간 수로공사(1999년 11월 착공, 현재 진행 중인 평남 개천 - 남포시 대성호 까지의 관개수로공사이며 길이 160km 구간에 90개소의 땅굴을 통과)이며, 땅굴 굴착 시 지금도 재래식 방법인 착암기를 사용한 구멍 뚫는 작업 → 폭파장진 → 폭파 → 인력과 갱차를 이용한 버럭 처리의 과정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국방부「최근의 제5, 6 땅굴발견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에서 번역)

 

이에 대하여 「민간고발자」는 다음과 같이 재차 반론한다.

 

자동굴착기는 고가이긴 하나, 스웨덴을 비롯하여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서 그 동안 사온 자동굴착기는 1970년 중반이래, 300여대에 달한다는 것은 한국의 해외주둔상사가 당국의 지시에 의하여 끈질기게 추적 조사한 결과, 이미 전 정권 때에 명백해진 사실이다. 북한은 군사력에 대한 정치적 기반이 개인 독재에 의해 강력히 지탱되고 있는 곳임으로, 권력자가 마음만 먹으면 자원배분은 간단히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황해도 일대에는 폐광이 많으며 버럭의 대부분은 폐광에 묻었기 때문에 노출하지 않고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며, 나머지는 해안의 간척지 매립에 투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적접 아산만에 이르는 해저지질을 탐사하지 않아도 해외에서 자료를 획득하여 지질구조를 연구파악해서 충분히 공사에 착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과학기술은 핵무장을 하고 대륙간 탄도탄을 발사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60여 km 의 해저땅굴하나 파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 「국방부의 땅굴징후 부인에 대한 반박성명」 에서 번역)

 

이 TBM 을 둘러싼 논쟁을 일독하고 국방부 주장의 근거가 박약함에 놀랄 뿐이다. 일본의 민간연구자인 니시오까도 북한이 TBM 을 갖고 있다고 하는 정보를 다수 갖고 있다.

 

예를 들면,

 

① 본고에서 앞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김정민 : 전 사회안전부 간부는「북한이 스웨덴으로부터 여러 대의 TBM 을 수입하여, 그것에 의거 국내에서 제작도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월간 조선 92년 8월)

 

② 한국육군본부는 1975년 북한이 스웨덴으로부터 TBM 을 5대 구입했다고 확인했다.

(정명환 : 전 육군 제6사단장이 니시오까에게 말하였음.)

 

③ 1992년 한국무역상이 윤여길 : 국방부 장관 과학보좌관에게 「북한은 89년부터 91년 간에 러시아의 무역상을 통하여 스위스로부터 TBM 을 108대 도입했다」고 증언했다.

 

④ 1984년 5월 18일부 한국일보가 워싱턴 포스트를 인용하여 「북한은 비무장지대 지하에 폭 4m 의 크기로 10개˜20개의 땅굴을 새로 파고 있는 징후가 있다. 미국 군사위성의 분석으로는, 북한은 기존의 땅굴과는 달리 다이나마이트를 폭파해서 파는 것이 아니고 땅굴 굴착 시 소리가 작게 나는 신형 자동굴착기를 사용하고 있다」라고 썼다.

 

또「한국에도 20대 밖에 없는 고가의 TBM 을 북한이 300대나 보유하고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북한의 개천 - 대성호 간 수로공사에서도 TBM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라고 하는 국방부의 주장은 북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북한 경제가 현재와 같이 곤궁한 커다란 이유의 하나는, 군사비에 터무니 없는 금액을 사용하여 일반 부분이 피폐한 때문이다. 북한이 한정된 외화를 사용해서 TBM을 수입했다면은, 그것은 군사용에만 사용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판단은 북한 연구의 초보의 초보다. 김정일이 지금 국민의 15% 를 아사시키면서도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6)「땅굴이 나오면 나는 군복을 벗겠다.」

그러면, 왜 한국군은 「민간고발자」의 구체적이며 상세한 지적을 계속 부정을 하고 있는가? 그것을 생각해 보자. 먼저, 본고 첫머리에서 언급한 한국국방백서(1997년 판)의 땅굴에 관한 기술을 다시 보자. 관련부분 전문을 인용한다.

 

약 10만명에 달하는 북한 특수전부대는 유사 시 전,후방 지역에 대량으로 침투하여, 남한 전역을 동시에 전장화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은 모든 전선에 걸쳐 땅굴을 굴착하여, 개전 초기 특수전 부대를 대규모로 은밀히 침투시킨 가운데 전면적인 기습공격을 기도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휴전선 지역에 20여개의 땅굴을 굴착한 것으로 판단되며, 지금까지 우리 군이 발견한 제1,2,3,4 땅굴은 모두 전선지역의 주요 접근로 상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군은 적어도 16개 정도의 미 발견 땅굴이 있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미군 군사위성 등에 의해서 확인된 땅굴의 입구가 그 근거이다. 미 발견 땅굴을 하루라도 빨리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점에서는 한국군도 「민간고발자」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한국군이 「땅굴은 모두 휴전선 지역에 굴착되었다」고 보고 있는 점이다. 「민간고발자」는 수십 km 에 걸친 장거리 남침땅굴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군측에서는 부정하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민간고발자」는 의혹지점의 전면적 굴착 등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며, 군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왜 군이 「민간고발자」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계속 부정하고 있는가.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문기관으로서의 자신이다.

 

방대한 예산을 갖고 최신설비를 사용해서 땅굴탐사를 하고 있는 군 담당자로서는 자기들이 조사한 결론을 확실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민간인들이 자기들을 앞질러서 땅굴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을 것이다. 정지용씨는 1993년이래,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관계자를「직무유기」로 검찰에 고소하는 등 격렬한 대립을 되풀이 해왔다. 그 때문에 군은, 정지용씨 등에게 한층 더 악감정을 갖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군측은 정지용씨 등의 활동에 대해서「상습신고자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남침땅굴은 유사시 전쟁의 승패와 국가존립에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이며, 군은 결코 작은 징후도 간과하지 않고 전기한 바대로 남침땅굴의 징후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서 철저히 확인하고 적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신고자들은 군의 조치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북한군이 깨닫고 위장공작(다시 묻음)을 했다」 또는「군이 다른 곳을 시추했다」,「군이 신고자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반드시 굴착해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등 사실을 왜곡, 억척으로 주장하여 군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금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해서 되풀이된다고 하면은 과연, 상습신고자들의 저의가 어디에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국민여러분은 근거 없는 허구의 신고자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말고, 군이 조기에 땅굴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신뢰와 성원을 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국방부 「최근의 제5, 6 땅굴발견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에서 번역)

 

그러나, 정씨는 92년에 월간 조선이 대 캠페인을 해도 군이 부정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어 고발이라는 수단으로 나온 것이다. 정씨의 형사고발 전부터 군측은 완고한 태도를 계속 취해왔다. 예컨대, 1992년 정지용씨 등의 남침땅굴발견신고를다각적으로 검토하여,「상당히 근거가 있다」고 국방장관에게 보고한 윤여길 : 국방부장관 과학보좌관(육군사관학교20기 졸업)이, 김진영 : 육군참모총장을 개인적으로 만나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였지만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땅굴이 나온다면 내가 군복을 벗겠다」고 하면서 정지용씨 등을 일방적으로 공격하였다고 한다. 재차 김진영 참모총장을 면회하여 보안사령부의 어떤 장교가 입수한 땅굴 징후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전했던 바, 그 장교는 상사로부터 질책되고 땅굴조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또 당시 권영해 : 국방부 차관(후의 안기부장)에게도 땅굴에 관한 정보를 전했던 바, 그 자리에서 그날 중으로 부하를 현장에 보내서 조사시키겠다는 대답을 받았지만, 오후 늦게 취소되었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7) 땅굴 수사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윤여길 전 국방장관 과학보좌관에 의하면 놀랍게도 당시 군내에서는 땅굴의 의혹에 관하여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장교는 반드시 불이익을 받는다고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주 2)

 

(주 2) 본고 첫머리에서 소개한 7월 23일의 세미나「북한의 테러도발 반세기」에서 윤여길씨가 발표한 논문「북한의 남침땅굴과 핵미사일, 그리고 통일전략」에서.

 

따라서, 이미 92년의 단계에서 군 수뇌부는 장거리 땅굴은 없다고 하는 강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것은 대체 어째서일까. 군의 땅굴조사를 의심하여 독자적으로 조사를 전개하였던 윤여길씨는 얼마 후에 국방부장관 과학보좌관을 면직케 된다. 그 배경에 관하여 윤여길씨는 전기(주 2)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시, 한국군내에서는 북한의 남침땅굴을 탐사하거나 이에 대하여 긍정적인 인간은 모두 제거 해버리는 상황이었다. 참으로 놀랄만한 김일성의 대남 적화통일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땅굴 1개를 완공하는데 수억달러씩 투자되어 장시간이 걸린다. 그것이 한번 발견되면 쓸모 없게 되는데도, 이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김일성이 얼마만큼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기에 자신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6.25(한국전쟁) 이후, 구축해둔 강력한 간첩망임에 틀림없다. 과거 냉전시대에 소련과 민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영국, 독일 등에서 장관 클라스 이상의 거물 간첩이 다수 체포되고,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베트콩의 스파이였으며, 레바논의 제마일대통령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미국 CIA 의 급료를 받고 있었던 스파이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남북이 같은 민족이어서 간첩침투가 용이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단 한사람의 거물간첩이 체포된 일도 없지 않은가. 이것도 또 김일성의 놀라운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간첩이 한국군내에 침투하여 땅굴탐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런 일이 있을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큰일이다. 현 단계에서 나(니시오까)는 이 주장의 진부에 관하여 판단을 내릴만한 충분한 재료를 갖지 못하고 있다.

 

(7)「미끼로 이용한 땅굴」의 의혹도 다만,「민간고발자」등은 구체적으로 간첩침투의 사례를 들고 있다. 여기서는 그것을 소개해둔다. 이미 발견된 제3땅굴과 제4땅굴은, 북한으로부터의 귀순자가 가져온 정보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제3땅굴은 1974년 9월에 한국에 귀순한 K씨 (노동당연락부 소속), 제4땅굴은 1983년 5월에 귀순한 신중철씨 (인민군13사단 참모장)가 정보제공자이다. 그 공적이 인정되어 K씨는 보안사령부(현재의 기무사령부) 대공수사관으로, 신씨는 육군정보사령부 장교로 등용되어, 한국군의 땅굴탐사에 과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한국군과 정보당국은 발견된 땅굴의 징후에 관해서 이 두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 진위를 판정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두 사람의 공통된 견해는 북한의 남침땅굴은 휴전선부근에만 굴착되어 있으며,장거리 땅굴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중철씨가 2000년 7월, 중국에 출국한 채 그대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는 이용원에 근무하고 있던 여성을 동반하고 있으며, 한국의 가족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전 재산을 처분했었다. 그는 95년에 예편될 깨까지 정보사령부 장교로서 각 사단을 돌면서 작전계획에 관한 어드바이스를 하여 중요 기밀을 다수 보았기 때문에 위장 귀순이었던지, 동반한 여성이 북한에서 온 간첩인데 그녀에게 포섭되어 한국 내에서 재 전향 되었는가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민간고발자」들은 신씨와 K씨가 땅굴탐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위장 귀순해 온 북한의 간첩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의 정보제공에 의해서 발견된 제3, 제4땅굴은 일부러 북한측이 발견케 한 미끼 땅굴이었다는 가능성이 높다고 다음과 같이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북한의 땅굴 특징은 대피소가 많이 굴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모터, 굴착용 장비, 폭발물 등을 대피소에 보관하지 않으면, 레일로 계속하여 버럭을 운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2 땅굴에는 그와 같은 대피소가 곳곳에 굴착되어 있다. 그런데, 제1, 제3, 제4 땅굴에는 없다. 의혹이 생길 제목이다.

 

두 번째 의혹이 있다. 제3땅굴은 제1사단 지역에 있다. (판문점 부근) 측량기술자라는 상기 김부성씨가 자신이 백양목 나무를 기준으로 측량하였기 때문에 장소를 정확하게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굴착했으나 땅굴은 위치를 찾지 못하여 초조한 북한이 감히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일부러 멀리서도 들을 수 있도록 대형폭발물로 폭파를 행하였던 것이다. 소리가 들릴세라 약한 도화선으로 한발씩 주의 깊게 폭파해 가는 저들이다. 얼마나 큰 폭발물을 사용 했길래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제3땅굴은 발견된 것이다. (폭발은 땅굴 바로 가까이 팠던 시추공 입구의 비닐뚜껑이 멀리 날아갈 정도였다. 정지용씨에 의하면, 땅굴내부를 조사해 보면 폭파된 장소는 땅굴의 앞부분의 벽이 아니고 앞부분에서 조금 북쪽의 장소였으며, 이미 한국군의 시추 파이프가 2개 땅굴을 관통 했었다고 한다. 즉, 땅속의 북한측은 한국군이 바로 가까이에서 탐색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 땅굴을 굴착해 가는데는 직접 관계없는 커다란 폭파를 한 것이 된다. : 니시오까 보충설명)

 

제4땅굴은 강원도 양구에 있다. 신중철씨가 장소를 정확히 보여줄 수 있다고 하여 시추를 했으나 땅굴은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파보니 3개의 시추파이프가 땅굴을 관통해 있었지만 신경이 둔해서인지 땅굴임을 알지 못하였다. 또 초초해진 북한은 이번에는 3개의 시추공을 통해서 소리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모터의 소리를 크게 틀었던 것이다. 그 모터의 소리에 의해서 제4땅굴은 발견된 것이다.

 

땅굴의 정보를 제공하였으므로 그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K와 신중철은 땅굴계의 제왕이며 애국자로서 숭배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위장 귀순자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북한은 왜 그들을 위장 귀순자로 이용하여 땅굴의 위치를 가르쳐 준 것일까. 땅굴의 본질을 속여 땅굴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주어, 땅굴탐사를 조직적으로 방해코자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왜곡된 지식은 「4km 론」이다. 휴전선으로부터 4km 이상 남쪽으로는 절대로 땅굴이 없다는 이론을

고정화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군은 그들의 말만을 믿고, 휴전선 4km 이내에서만 시추공 여기 저기서 행하는 것을 되풀이하였다. 그럼으로서 4km 보다 후방에서의 정보제공 땅굴의 징후는 무조건 압살해왔다. 속여넘긴 것이다. (지만원「충격! 군 내부의 간첩, 군이 속고 있다」동씨의 개인 홈페이지 에서 번역)

 

만약, 소개한「민간고발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안전보장은 대단한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황장엽 : 전 북한비서, 이철수 : 전 북한군 대위를 비롯한 다수의 귀순자가 김정일은 개전후 3일부터 1주일 내에 한국 거의 전 국토를 점령하는 전격 기습작전을 세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한국 내부 깊숙이 장거리 남침땅굴이 침투되어 있는가의 여부다.

 

앞에서 인용한 국방백서는,「약 10만명에 달하는 북한 특수전부대는 유사시 전 후방지역에 대량으로 침투하여 남한 전역을 동시에 전장화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은모든 전선에 걸쳐 땅굴을 굴착하고, 개전 초기 특수전부대를 대규모로 은밀히 침투시킨 전면적인 기습공격을 기도하고 있다」라고 써 있다. 땅굴은 전선지역 밖에는 없다고 하는 한국군은 특수전부대를 후방에 침투시킬 수단은 점수정, 복엽기 AN2(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등을 생각하고 있으며,그것에 대한 대책은 취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만명의 특수전부대가 땅굴을 사용하여 서울 중심부나 미군기지, 한국군 기지 등에 갑자가 나타난다면은,「1주간에 한국의 거의 전 국토를 점령」은 호언장담이라고만 할 수 없다. 니시오까는 1993년 한국에 귀순한 전 노동당작전부 공작원에게 장거리 땅굴의 존재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공작원은 1987년부터 1993년, 북한의 공작원 양성학교인 「김정일 정치군사대학」에서 훈련을 받았었는데, 거기서의 교육 중에 땅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1960년대, 전선의 30여 사단에 각각 1-3개의 땅굴을 파라고 명령했다. 68년의 프에블로호 사건에서 전쟁이 가까웠다고 하여 빨리 팔 것을 명령하여 공사가 본격화했다. 70년대말 이제 곧 한국에 침투할 수 있게 된다. 86년에 노동당 대남 공작부서(3호청사)가 김일성에게 땅굴을 공작원 침투용으로 사용케 해달라고 서류로 정식 상신했으나,「땅굴은 다대한 비용을 들여서 겨우 만든 것이며, 지금 공사 중인 것도 있다. 그것이 어디선가 발견된다면, 끝장이다. 이것은 전쟁에 사용하는 것이며, 공작원용으로는 쓰게 할 수 없다」라는 교시가 있었다. 88년에 몇 개가 완성했다.

 

공작원은 완성한 땅굴이 장거리 땅굴인지 어떤지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3호청사 에서 관심을 가졌다고 하는것은, 전선지역이 아니고 수십km는 굴착된 것이 아닌가라는 자신의 판단을 들려주었다

 

본고를 여기까지 써오면서 최후로 니시오까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한국군의 주장이 옳고 제5, 제6땅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안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증거가 지금 있는 것이다. 한국군은 테이프 등의 증거를 조작한 것이라고 부정하고 있지만 만일이라는 것이 있다. 조작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함일지라도 현장의 대규모 굴착을 꼭 실시해주기 바란다. 안보의 원칙은, 「의심스러우면 철저히 확인하라」이다. 하루빨리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기를 통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 니시오까 쯔도무(西岡 力)씨 약력

1956년 동경도에서 출생. 1979년 국제기독교대학 졸업

지꾸바대학 석사, 연세대학 유학. 주한일본대사관 전문연구원

1984년 현대코리아연구소 주임연구원.

1990년부터 「현대코리아」편집장.

저서에 「김정일과 김대중」(PHP연구소)

출처 : 하늘향연
글쓴이 : 복있는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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