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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윤동주/시인 윤동주

[스크랩] 평론가 이야기 장석주 (작가)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윤동주는 자신을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내몰고,/時代(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最後(최후)의 나>라고 표현했다. 그는 시대의 어둠속에서 <이 지나친 試鍊(시련),이 지나친 疲勞(피로)>를 온몸으로 견디며 책을 읽고 사색을 하며 시를 썼다. 시를 쓰는 것은 시대의 어둠 속에 작은 <등불>을 하나 내다 거는일이었다.

대옹아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일제의 강제 징병,강제 공출,국어사용 전면금지,창씨개명 등으로 식민지 지배의 <어둠>이 깊어질 때 <나는 이 어둠에서 胚胎(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생존하나보다>고 썼다.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던 그 어둠 속에서 언젠가 홀연히 닥칠 <아침>을 기가리던 윤동주는 해방을 불과 6개월 남긴 1945년 2월 16일,차디찬 이국의 감옥에서 뜻모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다. 1943년 7월,사상 불온,독립운동의 혐의로 체포되어 후코오카 감옥에 수감된 윤동주는 불같이 행동하는 실천적 인간형이기보다는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이국소녀들의 이름이나 비둘기,강아지,토끼,노새,노루와 같은 이름을 불러보던 다정다감한 청년. <죽는 낡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사람들이 호구지책,안락함,사유재산에 집착할 때 그는 고요한 내면에 병균처럼 침윤된 시대의 어둠을 조용히 응시하며 <인생은 살기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썼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尹永錫(윤영석)과 독립운동가,교육가로 이름이 높았던 金躍淵(김약연)의 누이인 金龍(김용)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이주민들이 모여살던 전형적이 농촌마을 명동촌은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몇몇 선각자들이 들어오면서 기독교와 교육,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변해 있었다.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의 집은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북쪽 울밖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나무가 있는 과원,동쪽 쪽대문 밖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보던 바로 그 우물.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추억)처럼 사나이>가 비쳐 있던 그 우물이다.

오똑하게 쪽 곧은 콧날,부리부리한 눈망울,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투명한 살결,다정한 옷매무새의 미남 청년 윤동주가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스물두살 때인 1937년이었다. 그는 문학공부를 원했지만 부친 윤영석은 의학을 전공하라고 해서 한동안 갈등을 겪었다. 윤동주가 식음마저 전폐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자 조부 윤하현과 외삼촌 김약연이 나서서 윤영석을 설득했다. 마침내 윤동주의 문과반 진학 허락이 떨어졌다.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윤동주는 강의 외의 시간은 주로 산책로 독서로 소일했다. 이무렵 윤동주는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서정주 등의 시를 열심히 읽었고,외국 문인으로는 도스트예프스키,앙드레 지드,발레리,보들레르,라이너 마리아 릴케,프랑시스 쟝 콕토 등에 빠져 있었다. 책을 읽다가 답답해지면 황량한 서강 들판과 인적없는 창내벌(지금의 창천동)을 어둑어둑 해질때까지 혼자 걸으며 시를 구상했다.

윤동주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선천적으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무렵 우리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았어.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어. 세수는 골짜기 아무데서나 하고,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조반을 마친 다음에는 학교로 나갔지. 하학후에는 소공동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나가 충무로 일대의 책방들을 순례했어. 至誠堂(지성당),日韓書房(일한서방),마루젠(丸善),群書堂(군서당)과 같은 신간서점과 구서점들을 돌고나서 음악다방에 들러 차를 마시며 새로 산 책들을 펴보곤 했지. 가끔은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기도 하고,다시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 관훈동 헌책방을 순례하고 돌아오면 이미 어둑해져 거리에 전기불이 환하게 밝혀졌지.」 연희전문 4학년이 되면서 기숙사를 나온 윤동주와 함께 누상동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생활을 했던 연희전문 2년 후배 정병욱의 회고다.

1941년,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그동안 썼던 시 19편을 묶어 자필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3부를 만들었다. 한권은 자신이 갖고,한권은 연희전문의 영문과 교수이던 이양하에게,또 한권은 정병욱에게 주었다. 이 시고를 받아 읽은 이양하는 출파늘 보류하도록 권했다. 「십자가」「슬픈족속」「또다른 고향」… 등 여러 편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며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는 윤동주의 신변에도 적지 않은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윤동주는 이양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 이후 윤동주 자신의 시고와 이양하의 시고는 사라져 행방을 알 길이 없게 되고,정병욱에게 주었던 시고만 그의 모친이 명주 보자기에 싸서 장롱 속 깊이 감춰두었던 덕분에 해방 후인 1948년 1월30일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와 빛을 보게 되었다. <詩人(시인)>이란 슬픈 天命(천명)>을 안고 살았던 윤동주의 시세계를 지배하는 정서는 부끄러움과 죄의식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척박한 식민지 현실이라는 테두리와 내면세계 사이에 있는 모순과 부조화는 식민지의 지식인 청년 윤동주를 심각한 자기혐오와 수치심에 빠뜨렷다.

그의 시에 중요한 심사으로 등장하는 <우물>과 <거울>은 바로 개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히,종족,역사라는 큰 틀에 비추어 자기를 바라보는 자기응시,자기성찰의 매개적 상징물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王朝(왕조)의 遺物(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 끊임없이 윤리적인 자기완성을 꿈꾸었던 청년시인은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한점의 욕됨조차 용납되지 않으려 했다. 도오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집에다 귀향을 알리는 전보를 치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그 귀향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쿄오토경찰서에 검거되어 수감된 것이다. 사상범으로 피체된 그들의 죄명은 일본 형사의 취조서에는 <독립운동>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후 윤동주는 2년,송몽규는 2년6개월의 언도를 받고 후코오카(福岡)형무소에 수용되었다. 명동촌의 집으로 윤동주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통지서가 날아들었다. <2월16일 동주사망,시체 가지러오라.> 부친 윤영석이 당숙 윤영춘을 대동하고 윤동주의 시신을 인수하러 후코오카 형무소로 떠난 며칠뒤에 다시 <동주 위독함,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만약 사망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아니면 큐우슈우제국대학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때늦은 우편물이 도착했다. 윤동주의 죽음은 후코오카 형무소의 施藥室(시약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은 때문이었다. 다름아니라 일제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세균실험용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윤영석이 후코오카 감옥에 갔을 때에도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명이 강제 주사를 맞기 위해 ?첸嬋?앞에 줄 서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윤영석은 그 행렬속에서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발견했다.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동주도 그 모양으로…』 송몽규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느꼈다. 23일후 송몽규도 죽었다. 윤동주의 시신은 큐우슈우 제대(九州帝大)에서 방부처리를 해놓은 탓에 말끔했다. 윤동주의 시신은 만주의 용정 동산에 묻혔다. 그의 장례는 3월 초선 어느날 심한 눈보라 속에서 치러졌다. <어느 隕石(운석)밑으로 홀로걸어가는/슬픈 사람>처럼 그는 갔다.


- 장석주·작가-
출처 :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inspace0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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