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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윤동주/시인 윤동주

[스크랩] 생애를 통해 보는 윤동주 시 두 편 / 이혜선

생애를 통해 보는 윤동주 시 두 편

                          -참회록과 쉽게 씌어진 시

                                            이혜선(시인, 평론가, 문학박사)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는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참회록」 1942.1.24.

 

나는 윤동주의 시를 좋아해서 1980년대부터 관련된 여러 자료를 모으고(당시에는 자료가 귀하고 또 미약했다), 논문도 썼다. 그런데 얼마나 수박 겉핧기 식으로 그의 시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고 미안한 노릇이었다. 지금이라고 그의 시를 그 몇 십분의 일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그 시를 쓸 당시의 시인의 처해 있던 상황을 - 그 엄혹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넣고 생각해보면, 생각은 깊고 촉수는 예민한 시인이 자유가 없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내느라고 얼마나 괴로워하며 이 시를 썼을까 하는 생각에 절절이 가슴 아픔을 금할 수가 없다.

잘 알다시피 동주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낳고 자라서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1938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태평양전쟁 발발로 인한 전시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1941년 12월 27일에 졸업했다.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하려 했으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렵겠다는, 제자의 앞날을 염려하는 스승의 만류로 뜻을 접고 돌아와 「간肝」을 썼다.(1941.11.29.) 동양의 ‘구토설화’와 서양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연결시켜,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준 푸로메테우스처럼 자신을 민족과 인류의 제단 앞에 바치고자 하는 희생의식과 그 좌절을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는 출간하려던 19편의 시를 3권 필사하여 스승 이양하교수와 1년 후배이며 누상동 하숙집에서 함께 하숙하던 지기지우(知己之友) 정병욱에게 각각 한 권씩 증정했다. (필사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면 「十字架」「슬픈 族屬」「또다른 故鄕」의 제목 위에 X표가 쳐져 있다.)

전쟁체제가 굳어지면서 조여 오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윤동주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뇌하다가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일본 유학을 위해서는 그동안 미루어오던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1월 29일 그는 유학수속을 위해 연희전문학교에 창씨계(創氏屆)를 제출했는데, 그 닷새 전인 1월 24일에 위의 시「참회록」을 썼다. <윤동주문학관>에 진열된 참회록 육필 원고의 아랫부분에 그의 당시의 심경을 따라가 볼 수 있는 낙서들이 있어서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오래된 원고지에 희미하게 보여서 잘 분간하기도 힘들지만 “渡航證明, 上級, 힘, 生, 生存, 生涯, 文學, 古鏡, 悲哀, 禁物‘ 詩란?” 특히 “詩란?”이라고 쓰인 아래에 “不知道”라고 씌어 있었다. 상급학교 유학을 위해서는 일본으로 가서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고 그러려면 도항증명이 필요한데 그 모든 수속을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부지도(不知道)란 ‘옥불탁불성기(玉不琢不成器) 인불학부지도(人不學不知道): 옥은 쪼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한다’ 라는 예기에 나오는 명언이다. 눈앞의 생존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인간의 도리를 알아 앞으로 더 큰 일을 해야 하는 생애와 시를 위해서는 조선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안으로만 접어야 하는 그 굴욕감과 무력감이 얼마나 시인을 짓눌렀을까?

‘시인이란 슬픈 천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 그것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식민지의 모든 물자를 긁어모으면서 조선청년들을 죄다 학도병으로 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전시체제였으니...

이로 미루어 볼 때 동주가 유학을 결심하기까지, 유학수속을 위해 그동안 미루어오던 창씨개명을 결심하기까지(물론 어른들의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창씨계를 제출하고 그야말로 “윤동주尹東柱”라는 이름이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로 바뀐 후의 심경 등을 따라가다 보면 참회록이 얼마나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씌어졌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문학관에서 그의 연희전문 학적부에 “尹東柱”라는 이름을 빨간 붓으로 두 줄로 그어놓고 그 옆에다 “平沼東柱”라고 쓴 것을 유리 넘어로 보았을 때 내 가슴도 얼어붙은 듯 아팠는데 본인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일본의 마수가 계속 조선인의 숨통을 죄어오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체제에 이름과 성마저 바꾸고 순응해야 하는 ‘이다지도 욕’된 삶이지만, 그 욕된 삶은 자신의 잘못으로 초래한 결과가 아니라 ‘어느 왕조의 유물’로서 받은 결과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자신과 민족의 ‘욕된 삶’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믿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그 즐거운 날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님도 알고 있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시인은 ‘나의 거울’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고 있는 것이다. 손바닥뿐만 아니라 발바닥까지 동원해서 닦는다는 것은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심정으로 전심전력, 온몸으로 닦는다는 것이다.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은, 시인이 「십자가」에서 노래한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처럼, 「쉽게 씌어진 시」에서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처럼 모두 민족의 제단에 자신을 바쳐 자신의 희생이 최후의 것이 되도록, 그 이후에는 다른 누구의 희생도 없이 민족의 새아침이 올 것을 믿는 자기희생과 희망의 함의인 것이다. 그 즐거운 날이 오면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라고 오늘의 치욕적인 삶을 다시 참회한다고 해도 그 일은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심훈의 「그날」처럼 윤동주의 「참회록」도 광복의 ‘그날’에 대한 신념으로 쓰여진 것을 알 수 있다. 식민지 청년의 고통을 누구보다 처절하게 앓고 있는 시인의 고뇌가 핏빛으로 배어나는 시이다.

 

윤동주의 이러한 자기희생의식은 만16세가 되기 전(1943년), 은진중학교 시절에 쓴 「초 한 대」라는 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북간도의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받던 독립운동가 외삼촌 김약연의 영향과, 명동소학교시절부터 받은 민족교육과, 조선땅에서 보다는 비교적 자유롭고 민족의식이 유달리 강하던 명동촌의 교육환경 아래서 ‘나라와 민족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자라면서 익혀진 민족의식과 자기희생의 의지가 그의 시 편편마다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봉투(學費封套)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쉽게 씌어진 시」 1942.6.3.

 

동주는 1942년 4월에 도쿄의 릿교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하고 다카다노바역 근처의 하숙집에서 동문인 백인준과 함께 하숙생활을 했다. 그 해 10월 1일 교오또의 도오시샤대학으로 전학하기 전까지 이 시기에 쓴 시 5편을 서울에 있는 친구 강처중(姜處重)에게 편지로 보냈다. 그 중의 한 편이 「쉽게 씌어진 시」이다.

우리가 지금 ‘육첩방은 남의 나라’ 라는 구절을 읽으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남의 나라임이 분명하니까.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시를 가르칠 때 ‘시인은 아마도 일본으로 유학을 간 모양이지요’하고 서두를 뗀다. 그러나 그 때의 시대배경을 생각하면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없는 시이다.

일본은 1910년 한일합방을 한 후 1911년부터 일본어를 국어로 정하고 우리말은 ‘조선어’라고 하여 선택과목으로 밀어내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한민족 말살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1938년 이후 부분적으로 시행되던 조선어 교육마저 폐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해 초등학교 어린 학생마저 조선어를 사용하면 벌을 주는 등 우리 언어말살을 꾀했다. 이와 함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동아일보〉〈조선일보〉등 한글로 발간되는 신문과『문장』등의 한글로 된 잡지를 전면 폐간시켰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해 민족얼을 위해 우리말 연구를 하던 국어학자들을 죄다 감옥으로 보냈다.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자 마지막까지 이름에 조선어가 남아 있으니 그것조차 없애려고 마침내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뿐만 아니라 황국신민화정책을 실시해 황국신민의 선서 제창,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고 이에 따라 조선인에게도 황국신민의 의무라는 징병·징용 등을 강제하였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조선어로 시를 쓰는 것만도 죄에 해당되는데, 일제가 내선일체 및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강화하여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없애버리고 일본정신을 가지도록 강요하는 것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일본의 심장부에서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했으니 조선의 민족의식이 뼈에 사무치는 표현 아닌가. 적극적인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일부 학자들이 윤동주의 시를 저항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상황을 간과한 너무나 단순한 논리이다.

그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사랑한 시인이었다. 시를 쉽게 쓰는 시인이 아니었다.

1948년 1월에 발간된 첫 번 째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의 발문에서 누구보다 동주를 잘 알고 아끼던 연전시절 친구 강처중은 동주가 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 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주권을 잃은 나라, 주권을 잃은 동족들이 식민지 압제 하에서 신음하면서 살고 있는데, 자신은 편안하게 고향의 부모가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가는 것이 얼마나 죄송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었을까? 늙은 교수의 강의란, 그것도 식민지 청년이 일본의 대학에서 들어야 하는 강의란, 자신과 자신의 동족-‘슬픈 족속’이 처해 있는 상황과는 동떨어진 공허한 탁상공론이거나 어쩌면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결코 따를 수 없는 아픈 내용이었을 것이다. 공출과 징용과 징병과 여자 정신대까지, 조국의 어진 겨레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온통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데, 자신은 한가하게 ‘대학 노-트’나 끼고 다니며 시를 씁네 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미안하고 자괴감 느끼는 일인가. 그 모든 상황을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니 결코 쉽게 씌어지지 않은 시를 두고 청년 윤동주는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윤동주의 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부끄러움의식’은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글로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천명’의식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다. 한 집에서 같은 해에 태어나서 함께 학교를 다니며, 뜻하는 바를 활달하게 행동에 옮기고 독립의식 고취를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는 고종사촌 송몽규가 옆에 있어서 더욱 느꼈음직한 예술가적 정신이다.

 

그러나 시인은 부끄러움에만 빠져 있지 않는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라고 스스로를 민족의 제단에 올려놓는다.

이 불행한 시대에 가득한 어둠을 내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시인은 ‘아침’의 새 빛과 광명을 위해서 희생하는, 그 최후의 사람이 ‘나’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홀로 침전’한다고만 생각했던 부끄러운 현실적 자아이지만, 한 편으로는 등불을 밝혀야 하는 최후의 나 -내면적 자아와 합일하는 ‘악수’를 ‘눈물과 위안’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분리된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로 고통스러워하는 의식은 「또 다른 고향」등 시인의 다른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만큼 윤동주는 식민지청년의 고뇌를 뼈 속 깊이 앓고 있었으며, 매 순간마다 자신을 민족의 제단에 바치기를 각오하고 시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유학시절에 씌어진 이 시가 윤동주의 시집에 들어가서 독자들에게 읽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연전시절 기숙사의 같은 방에서 지낸 친구 강처중 덕분이다. 1948년에 출간된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잘 알다시피 그 중의 19편은 정병욱이 윤동주의 필사본 시집을 우여곡절 끝에 잘 보관했다가 세상빛을 보게 한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12편은 동주가 필사본 자선시집을 엮기 전에 쓴 시로 자선시집에 빠진 시와, 자선시집을 엮고 나서 졸업 무렵에 새로 쓴 시「간」「참회록」등 서울에서 쓴 시와, 유학시절에 일본에서 써서 편지로 보냈던 「쉽게 씌어진 시」「흰 그림자」「사랑스런 추억」「흐르는 거리」「봄」등, 모두 강처중이 보관했던 작품이다. 광복 후 경향신문 기자로 있던 강처중이 1947년 2월부터 3-4차례에 걸쳐 윤동주의 시를 경향신문에 게재하여 윤동주를 세상에 알렸다. 이어서 정병욱 윤일주 등과 1948년 1월에 윤동주의 시집을 출간하고 그 서문을 정지용이, 발문을 강처중이 썼다. 그런데 윤동주의 시를 말할 때 왜 정병욱만 거론되고 강처중의 이름은 없는가? 경향신문 기자였던 강처중은 사회주의 활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로 인해 강처중은 남쪽에서 기피인물이 되었고 모든 공식문서에서 삭제되었다. 그리하여 1955년 2월 윤동주 서거 10주년 기념 증보판 시집이 정병욱과 윤일주의 손에 의해 출간될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었다. 정지용은 전쟁 당시 월북했다는 이유로, 강처중은 좌익인사라는 이유였다.

 

1946년 19세의 나이로 단신 월남해서 강처중을 찾아가 윤동주의 모든 유품을 물려받았던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수차례의 개정판에서 두 사람의 흔적을 지웠다가, 1983년 10월 10일 간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개정판에서 강처중을 ‘서울의 한 벗’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어떤 문건이나 서적에서도 완벽하게 지워졌던 그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송몽규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1988년 간행)이었다. 그리고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관객들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다음 백과사전』‘강처중姜處重’ 참고)

이처럼 민족내부의 갈등으로 죄익인사들은 그 존재조차 지워지고 1988년 해금(解禁)될 때까지 이름조차 거론하지 못했던 것이 그동안의 우리나라 현실이었다.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을 다녀와서 동주의 시 두 편을 그가 살아내었던 엄혹한 시대배경과 그의 생애를 추체험(追體驗)하면서 다시 한 번 감상해보았다. 그리고 정병욱이 보관했던 육필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19편에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12편의 시를 더하여 31편으로 1948년 1월 동주의 시집 초판본이 출간되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한 연희전문시절의 친구 강처중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연전을 졸업한 후 사상과 의식이 익어가던 시절의 동주의 절창 12편이, 강처중이 없었더라면 빛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의 노력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다시금 옷깃을 여미게 된다. 우리 민족과 국문학사를 위해서도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이러한 좋은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강처중이 좌익인사라는 이유로 그동안 그 존재조차 지워져야 했던 우리 민족사의 비극을 아프게 체감할 수 있었다.

불행했던 시대에, 시대와 민족을 앓으며 자신을 민족의 제단 위에 놓기를, 자신이 그 최후의 희생자가 되어 이후부터는 민족의 새 아침과 광명이 열리기를 염원했던 순결한 젊은 영혼 윤동주의 시가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민족의 노래로 되살아나고 향유되고 있음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우리 민족이 이어지는 한 겨레의 가슴에서 영원히 꽃피어나고 또 새로운 열매를 낳기를 소망한다.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김혜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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