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종들은 이 경고를 선포할 때입니다
이 일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7:9-10)
심판주께서 모든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다 차서 심판주가 오심을 알지 못하고 준비하지 않았다가 대환난에 남겨지겠기 때문입니다. 대개는 예수를 믿으면 다 대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주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9절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대환난에서 죽임을 당고 흰옷이 입혀졌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 (믿는 사람)을 보겠느냐?(눅18:8)
인자가 올 때와 믿음을 보겠느냐는 중간에 접속사격으로 ‘세상에서’란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야 됩니다. 세상이란 말의 뜻은 하늘 위에와 땅 아래를 제외하고 마귀가 주관하고 있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천국과 음부에서도 지상의 재난을 알며, 마귀들도 주님의 심판을 알고 그들대로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땅에 있는 인간들만은 주의 심판 때를 모르고 있다는 경입니다. 왜 모를까요? 벌거벗은 탓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믿는 성도들과 가르치는 지도자들이 준비는 안 시키고 오히려 반대만 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재림은 심판에 있음을 모르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벌거벗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고(눅18:8), 벌거벗은 사람들에게는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계3:3) 이러한 사람들이 주님이 오신 후에 대환난이란 심판을 받게 되며, 그 수는 사람이 능히 셀 수 없다는 숫자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666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려고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사람들에게 대하여 주시는 말씀이 9-17절입니다.
1. 얼마나 많습니까?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7:9)
앞에서는 한정된 숫자에 대하여 말하고, 여기에서는 능히 셀 수 없는 무한정의 수를 무리라 하였습니다. 이 계수(Counting)는 인간편의 한계이고 하나님편의 한계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히 세시고 또 하나님은 정하신 숫자를 알고 계십니다. 계시록 5장11절에서 “내가 또 보니 만만이요 천천이라” 하였으므로 인간으로서는 셀 수 없지만 천사들을 세시는 하나님은 그 숫자를 셀수 있다고 보아야 됩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이 말씀과 9절의 말씀과 비교하면 예수께서 공중재림하시는 것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상에 남아서 대환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라는 경고입니다. 여기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666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므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666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수와 받는 수를 합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대환난에 남겨지겠습니까?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공중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부활/휴거 후에 일어날 사건입니다. 그때는 모든 나라가 영토와 주권까지 세계정부에 넘겨주게 됩니다(계17:13). 그리고 모든 국민은 그들에게 노예가 되고 그들에게 혹사를 당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지 않은 숫자까지 포함시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환난에 남겨지겠습니까?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7:9)
인간의 능력으로 셀 수 없는 흰옷을 입은 자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믿는 기독교인들이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대환난에 남겨지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배워서 그런줄로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환난에서 죽임을 당하고 인간의 능력으로 셀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예수를 믿었으나 벌거벗었던 숫자라는 사실을 숨기려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은 목자라면 요한에게 주신 계시록을 많이 읽어서 양 무리들에게 올바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요한에게 계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들도 자신이 섬기는 목자가 ‘보라’는 요한계시록을 보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속히 될 일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확인하고 목자가 속히 될 일을 가르쳐주도록 유도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바른 해석인가도 확인하고 바르지 않을 때는 바르게 가르치도록 유도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도인 자신도 복을 받지 못하겠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됩니다
흰옷을 입은 숫자는 주님의 재림이전부터 입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데 교회의 흰옷을 입은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행위가 있었기에 모두 휴거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숫자는 어떻게 흰옷이 입혀졌겠습니까? 14절에서 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ale으면서도 이 흰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 것입니다. 이런 숫자를 인간의 능력으로 셀 수 없다면 주님께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잘못 가르친 목자는 회개하고 바로 가르쳐야 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셀 수 없는 무리들이 대환난에 남겨져서 죽임을 당해야 된다는 사실을 바로 인식해야 됩니다. 또한 의지가 약해서 666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흰옷을 입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영이 영원한 유황불 못으로 떨어질 때 하나님께서 목자들에게 그들의 피 값을 찾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잘못 가르친 목자는 회개해야 됩니다. 왜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숫자에만 집착하고 질적 양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였고, 또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지옥자식이 되게한다.’ 했듯이 오늘날에는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24:15)
그때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종려가지를 들려있습니다. 종려가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때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입성 때 왕으로서의 승리를 보여준 것처럼, 이들도 죽임을 당하기는 했으나 예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믿음의 승리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666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고 예수라는 이름을 굳게 붙잡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냐 적그리스도냐? 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2. 구원은 예수의 주권입이다
승리자들은 하나님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경배합니다. 그들의 경배는 죽임을 당하기 이전의 생각을 바꾸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를 갈망하지 않았던 탓으로 대환난에 남겨졌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제 구원받고 보니 인간인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만이 자신의 구원자임을 고백하는 내용이 10절의 말씀입니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7:10)
이 많은 영혼들의 외침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리고 그들의 외침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몇 가지로 분류해서 상고하면, 첫째는 자신들이 신뢰했던 인간인 목사가 구원자가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목사를 신뢰했다는 말은 목사는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인데도 미련하게도 목사의 말만 들은 것은 목사를 예수님 이상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가짜 신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짜 신자들은 옳고 옳지 않음도 분별하지 못하고 목사의 지시대로 맹목적으로 따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흰 세마포를 입지 못했다가 대 환난을 통해서 목사의 가르침이 잘못임을 깨닫고 예수님께로 돌아서고 죽임을 당할 때 흰옷이 입혀진 것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받은 것에 감사해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경배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의지로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보혈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에 관해서는 사람들은 몇 만년 살 것처럼 세상에 쌓아두려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예수님보다 자신을 더 위했기 때문입니다. 이 뜻은 성경의 말씀에서 복 받는 신자가 되려면 ‘속히 될 일에 관해서 많이 듣고 행하라’ 하였는데도 듣지도 아니하고 행하지도 아니한 것은 자신의 의지 탓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무형으로 목사를 우상화 시켰고, 자신을 우상화했다는 것입니다. 우상화했다는 말은 예수님보다 목사나 자신을 더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잘못을 늦게나마 깨닫고 돌아섰기 때문에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때 어린양의 피로서 자기 영을 깨끗하게 씻어주면서 흰옷이 입혀주신 일에 대한 감사함을 경배하는 장면입니다.
저들은 대환난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져버리지 않으려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저들은 자연적이거나 또는 어떠한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뜻, 곧 마귀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죽임일지도 하나님은 저들의 영을 받아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려주시면서 약속했다 때문입니다. 이 피는 생명을 살리는 피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피는 절대로 죽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살리심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피 값에 있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구원은 바로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시인하는 외침입니다. 이 외침은 심판을 재촉하는 외침이요, 이 외침은 장막절인 천년왕국을 이루시는 성부와 성자에게 찬양으로서 경배드리는 영들의 외침입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7:11)
5장13절에서는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바다에서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경배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정된 무리들만이 경배드리고 찬양하는 것을 보입니다. 천사들만으로 제한하여 경배드리는 것은 구원받은 영들을 담당했던 천사들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고하는 찬양입니다. 그래서 장로들과 네 생물들은 경배드리는 대상에서 제외되고 오직 천사들만이 주체가 되는 것은 그들의 영을 구원받도록 도와주었던 천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인간의 능력으로 셀 수 없는 무리라면, 경배행사에 참여하는 천사들은 죽은 사람들의 몇 배가 될 것입니다. 이토록 많은 수의 천사들이 드리는 경배를 살펴보면 인간을 구원하시는 권능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만 있음을 찬양합니다.
3. 저들은 누구냐?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7:13-14)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들은 온 세계에서 믿는 신자들 중에서 휴거되지 못하고 대환난에 남아서 박해를 당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수는 누구도 셀 수 없는 무리라 하였습니다. 10-12절에서는 천사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사명완수에 관한 보고였습니다. 그 일은 천사들이 했던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능력과 힘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었다고 경배했습니다. 그때 장로 중에 하나가 요한에게 알려주는 내용은 대환난기에서 부끄럽게 구원받은 숫자라 합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가로되.....(7:13)
이렇게 질문을 하는 장로는 누구입니까? 요한에게 질문하고 답하는 장로는 하나님보좌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24장로 중 하나입니다. 그는 천국의 입법부에 해당되는 장로중의 하나로서 천사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담당하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드리는 경배에서 아멘(ὰμήν) 다음에 그러하다고 화답했던 장로중의 하나입니다.
4.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냐?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7:13)
이들에 대하여 기존의 해석들은, ⓐ어떤 이들은 ‘위에 열거되는 열두지파 숫자인 144,000명’이라 합니다. 위에서는 숫자를 분명히 밝혔고 여기서는 셀 수 없다 하였으므로 그러한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이것이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믿기만 하면 다 휴거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본문은 ‘능히 셀 수 없는 숫자’라 하였으므로 위에서 말하는 144,000은 아닙니다. 또한 ‘대환난(Great tribulation)’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큰 환난을 헬라어 원전에서 형용사 ‘메가스(μέϒα)’와 명사 ‘더맆시스(θλίψι)’로 기록되었으므로 ‘대 진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이 다 휴거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속이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미혹시켜서 대환난에 남기려는 사단의 소리를 전달하는 입술임을 깨닫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장로가 말하는 ‘누구’는 지구정부 제도에 반대하고 죽임을 당한 영들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지구종부가 실시하는 제도에 굴복(경배)하라고 강요할 때 666표를 받지 아니하고 대환난에서 죽임을 당한 수입니다. 그 숫자는 누구든지 셀 수 없는 무리들입니다. 그런데도 목자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대환난에 남지 않는다고 가르쳤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는 지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를 믿었던 그 많은 사람들이 휴거에서 탈락되고 대환난에서 죽임을 당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보좌에서 볼 때, 요한에게 알려주는 장로의 말이 잘못입니까, 아니면 목사들의 가르침이 잘못입니까? 목사의 가르침이 잘못입니다. 하늘의 장로는 요한에게 “흰옷을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하고 물은 다음에 “이는 큰환난(Great tribulation)에서 나오는 자들”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휴거되고 대환난에 남겨지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지도자는 잘못을 깨달아야 됩니다.
예수의 대언이신 장로는 큰 무리들은 어떤 신앙인들이며 대환난에서 부끄럽게 구원받은 무리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대환난이란 무인가? 1장에서 “이 계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들은 대로 행하는 자가 복되다”는 경고를 여기서 답을 얻어야 됩니다. 왜 읽고, 듣고, 행하라 하였는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24:21)
예수님께서 창세후로 이러한 환난이 없었고, 후일에도 없다 하셨습니다. 대환난은 세기말을 장식하는 대환난입니다. 그러므로 대환난 때는 지구정부가 나타나고 그때는 누구든지 666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13장에서 경고한 내용이 이루어질 환난입니다. 그러면 대환난에서 나오는 무리와 앞에서 열거한 12지파의 수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일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7:9)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7:3)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144,000니이....(7:4)
12지파에서 인 맞은 자 144,000은 대환난기에 쓰임 받을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9절에서는 능히 셀수 없는 큰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행위가 없었던 목자들과 신자들입니다. 불의를 행한 탓으로 대 환난에 남겨졌다가 회개하고 죽임을 당하는 목자들과 성도들을 말합니다. 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둘러있는 천사들이며, “우리 하나님의 종들”은 지상에서 사역을 담당하는 사역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마에 인 맞은 자라고 합니다.
5. 천국에는 흰 세마포를 입어야 들어갑니다
큰 무리가 당하는 환난은 생에서 받았던 지난날의 어려움이 아닙니다. 3장10절에 있는 서머나 교회 목자들처럼 그 시대에 되어 진 환난도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창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환난이 없다고 하신 말을 볼 때, 대환난은 장차올 주의 지상재림이전에 되어 질 최후의 환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로 옷을 희게 씻는다는 뜻은 세마포는 입었으나 행위가 온전치 못해서 더렵혀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저들은 애초부터 벌거벗고 있었던 자들로서 대환난에 남겨진 자들입니다. 대 환난을 통하여 회개하며 예수만을 위해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에 예수의 피로 그들의 죄를 씻겨주셨다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하였을 볼때, 그들은 죽임을 당하기전에는 예수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해서 벌거벗고 대 환난에 남았딘 것입니다. 남겨져서 짐승의 표가 나타나서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 이름을 붙잡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지구정부방침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원수들과 타협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면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로 그들의 더렵혀진 심령을 희게 씻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성도라는 조건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그 자체로서 예수님의 피로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저들은 들림받지 못하고 대환난에서 고통으로 죽임을 당할 때까지 자신들의 영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못했습니까? 그러면 저들이 도적질하거나 사람을 죽이고 세상에서 못된 짓을 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의의 흰 세마포 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기 때문에 대환난에 남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영이 더럽혀진 근본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6. 하나님을 밤낮 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7:15)
저들도 예수를 믿었었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헌금생활도 하였습니다. 전도하며 교회에서 봉사도 하였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등, 교회에서 시행되는 모든 직임을 담당하며 교회에 충성된 일군이란 소리도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기는 믿었는데 자기들의 지식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적이라는 말은 자기가 배워서 알게 되면 수용하고, 배우지 못해서 모르면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지식입니다.
저들은 성령께서 알려주는 경고 일지라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내용과 또는 성경에 없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소속된 조직정책에 반대되면 배척하면서, 그 배척하는 것을 정통신앙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좋은 믿음인줄로 착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고 예수 이름을 불렀으니 온전한 믿음인줄 알았습니다. 교권이란 제도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박해하고 주님의 택하신 같은 주의 종들을 배척하고 목회를 하지 못할 정도로 핍박하고 출교까지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로 알았지만, 그것은 교회를 박해하는 사단의 사주를 받고 하는 짓을 깨닫지 못했던 것은 지식으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바치는 헌금을 착복하고 교권을 매수하려고 돈을 쓴 것이 지식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러한 행위는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자신을 섬기다가 이제 대환난을 통하여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부터 육신을 떠난 영체가 하나님을 밤낮으로 섬기더라는 말입니다. 신자들도 같습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를 하나님 이상으로 우상화시키면서 목사의 말이 아니면 어떤 진리의 말씀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교인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온갖 거짓말로 이웃 교회를 험담하고 이웃 성도를 험담하고 이웃교회 목사를 험담하는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인 건물을 섬기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자기교회 목사를 더 섬겼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행하지 않아서 더렵혀졌다고 예수께서 책망하였습니다. 이런 행위 때문에 심판주가 언제 재림하는지 알지 못해서 대환난에 남게 된 원인이라 하셨습니다.
장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 앞에 왔을 때 장로가 ‘그러므로’ 라고 했는데, 이는 영어로 ‘Therefore’ 입니다. 이 단어가 지니는 뜻은....[어떤 결과에 따라서]....[그 때문에]....라는 상태의 ‘전환점’을 강조합니다. 장로가 강조하는 ‘그러므로’는 그들이 땅에 살 때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는 밤낮으로 수고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밤낮으로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죽임을 당하고 그의 영은 육신이 떠나서 하늘나라에 올라왔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육신을 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실한 믿음이요 온전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를 사랑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저들이 그렇게 했더라면 대환난에 남겨지지 않았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후에, 이제는 다만 밤낮으로 하나님만 ‘섬기기 때문에’ 그 위에 장막을 치신다 합니다. 장막을 친다는 뜻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 위에 임한다는 뜻입니다.
7. 예수를 목자로 섬기지 않았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7:17)
저들은 교회에 출석하면서 예수 이름을 불렸을 것입니다. 기도 할 때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찬송할 때도 예수의 피를 부르면서 기쁨으로 하였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시행하는 세례식과 성찬식에도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로부터 성령으로 거듭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선포도 받았을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다 휴거된다는 목사의 가르침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환난에 남아서 죽임을 당했으니, 하늘의 장로가 거짓말을 하였습니까, 아니면 당신에게 말하는 목사가 거짓말로 가르쳤습니까? 귀 있는 자라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십니다.
하늘의 장로가 말한 ‘그러므로’는 17절에서도 적용됩니다.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라는 의미는 그들이 땅에서는 예수를 자기의 목자로 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목자로 섬겼다는 말입니까? 인간인 목사를 예수보다 더위에 올려놓고 목사의 말이라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경에 있는 진리의 말씀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장로가 “그러므로 그들이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매”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밤낮으로 인간 목사를 목자로 섬겼을 뿐이지 예수를 목자로 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죽임을 당하고 육신은 땅에 두고 영만 하늘나라에 올라왔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더 이상 목사를 섬기지 못합니다. 누구와의 관계를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뿐입니다. 자신들이 목사만 밤낮으로 섬기고 예수는 밤낮으로 섬기지 못한 것을 대 환난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잘못 가르침을 받은데 대하여 회개하고 예수 이름을 붙잡고 죽임을 당할 때 저들의 영이 하늘나라로 끌어올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목자를 찾은 것입니다. 그 목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너희들이 대환난에 남겨지지 않으려면 인간인 목사를 섬기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피를 흘려준 예수만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7:16)
대환난의 고통은 굶주림과 목말랐던 것은 이제는 끝났습니다. 어떠한 뜨거움도 천국에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이 대환난 때 얼마나 고통을 겪었습니까? 진작부터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예수를 믿었더라면 그러한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짜가 많다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대환난에서 죽임을 당합니까?
그때는 세계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근이 된다고 누누히 경고하셨습니다. 목마름은 16장 3절에서 물의 근원이 피로 변한다고 하였다. 그때는 물을 마실 수 없는 갈증으로 고통을 당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뜨거움은 16장 8-9절에서 해가 권세를 받고 불로 사람들을 태운다고 하였다. 그때가 되면 핵무기로 인하여 해가 빛을 잃어버리게 될 때 핵무기의 뜨거움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경우도 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임은 당하였지만 부끄러우나마 구원을 얻고 천국으로 올라온 영들은 주님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 이러라.(7:17)
더 이상 눈물의 고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씻어주신다는 말씀은 위로의 말씀입니다. 천국에는 고통이나 괴로움이나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환난에 남으면 고통 속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됩니까?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미련하게 세상에만 집착하다가 대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에서 ‘이 계시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어 행하는 자들이 복되다’ 하신 것은 복 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대환난기에 이러한 고통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 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하였습니다. 그러면 시대는 무엇입니까? 세대(Generation)가 제도(System)를 만들어간다면, 시대(Period)는 문화(Culture)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이라는 문화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대환난을 피하게 됩니다. Cyber Culture 에 살아가는 인류는 Biochip을 만들어냈습니다. 나아가서 사람몸에 넣어질 Biometric을 통하여 사람의 체질을 바꾸어서 통치자를 따르게 하려고 VeriChip을 만든 이 시대를 깨닫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세상에만 집착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라도 구원받은 이들은 첫째하늘 낙원에 있는 ‘교육장(παιδεία τόπο-파이데이아 토포스)’으로 가서 완전하게 될 때까지 교정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었어도 흰 세마포를 입지 못했으면 죽는 순간에 첫째하늘에서 멀리 떨어진 진 ‘연단장(βήμα-베마)’으로 가서 혹독한 연단으로 이를 갊이(βρυϒμό-브르그모스)이 있는 ‘바깥(ἐξώτερο-에쵸테로스)’ ‘어두운데(ξόφο-죠포스)’로 쫓겨난다고 예수께서 경고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2:12-13)
바깥 어두운 데를 영어와 한글성경에는 심판대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연단장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고린도후서 두 곳에서 바깥 어두운데를 연단장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대로 흰 세마포를 입지 못했으면 죽어서 연단장에서 연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7장14절에서 희게 씻김을 받는 대상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또 7장9절에서 말하는 무리 속에도 포함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이 분리되고, 분리된 상태에서는 좀처럼 회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단장에서 회개하고 성화가 되지못하면 백보좌 심판 때 심판을 받고 유황불 못으로 떨어진다고 경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또는 믿는 것만으로 천국에 다 들어간다고 잘못알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사가 말하는 것을 신뢰하고 그렇게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라오디게아 신자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대환난을 겪어야 되고 죽임을 당해야 된다는 경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