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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설교·6/장죠셉목사님

보좌를 얻은 신부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HkAK/205

 

(계14:2~5)-보좌를 얻은 신부들의 기쁨-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키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2-3)

 

요한은 땅위에서 자세를 가다듬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인 그 소리는 맑은 물소리 같이 잔잔하면서도 맑고 큰 뇌성과도 같이 우렁차지만 거문고 소리처럼 음률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노래는 거문고 타는 자의 거문고 소리와도 같다 한다. 이 아름답고 청아한 노래는 하나님의 보좌 앞과 네 생물들과 장로들 앞에서 부르는 무리들이 있는데 그들의 신분을 밝히지는 아니하고 다만 ‘저희’라 한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이기에 아무도 배울 수 없는 새 노래를 배우고 있을까?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인의 수를 분명하게 밝혔으므로 이들은 앞에서 본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있는 어린양의 신부들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다른 견해로 해석하는 경우는,

 

  ⓐ. 어떤 이는 ‘어린양의 사람들은 그들만이 배울 수 있는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하면서

       도 어린양의 사람이 누구라고 밝히지는 아니한다.

  ⓑ. 다른 이는 ‘대 환난이전에 구원받은 교회와 대환난중에 순교하여 들어올린 무리들’이라

       고 해석하였다. 이분은 앞에서는 ‘144,000인은 유대교의 전도자라 하고서 여기서는 구

       원받은 기독교 교회’라고 자신도 어는 것이 옳고 그른지도 모르는 모순을 보이는 해석

       이다.

  ⓒ. 또 다른 이는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수’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앞

       에서는 ‘상징’이라 하고, 여기서는 ‘대표자’로 바꾸어서 스스로의 해석에서도 이중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오류의 원인은 처음부터 대환난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잘못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양의 신부들로서 144,000인이 서있는 곳을 시온 산이라 하였다. 지금 노래하는 장소는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 있다. 네 생물과 장로들은 우리가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보좌()’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전체의 흐름을 달리하게 된다. 보좌에 대하여 하나님의 보좌이면, 분명히 ‘하나님의 보좌’ 또는 ‘그[의] 보좌’로 명시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보좌이면 ‘어린양의 보좌’ 또는 ‘그[의] 보좌’라고 명시한다. 그리고 장로들의 보좌이면, ‘24장로들의 보좌’나 ‘보좌 앞에 서있는 장로들’이라고 보좌의 주인을 명시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보좌’에 대하여 누구의 보좌라고 언급하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 이 보좌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려주셨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20:4a)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을 이긴 자들에게 보좌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3:21). 믿음을 이기고 약속하신 보좌를 이제 얻은 것이다(14:3). 그들은 천년왕국이 끝나고 백보좌심판 때에, 자신들이 얻은 보좌에 앉아서 심판(배심원)하는 권세를 받게 된다(20:4a). 그러므로 144,000인의 앞에 있는 보좌는 어린양의 신부들의 보좌다. 이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유는 계시록을 깊이 있게 읽어보지 않고 남들이 전해주는 설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다른 면은 이러한 해석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자신의 사상을 옳다고 주장하려는 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 예수님의 설명은 틀림이 없으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해석 앞에서 학자들의 해석이나 저자들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요한이 기뻐하고 감탄하며 ‘보라’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쁨과 새 노래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인 밖에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3)

 

땅에서 구속함은 받은 144,000인이 믿음을 이기고 보좌를 얻은 기쁨으로 노래를 부른다. 이들이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 있는 자기들의 보좌를 두고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합창은 숫자만큼이나 우렁차고, 많은 물소리와 같이 부드러우며, 음률은 거문고소리처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새 노래는 이들 외에는 배울 자가 없다는 내용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들은,

 

  ⓐ. 어떤 이는 ‘직접 이기고 구원받은 축복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노래조차 부를 수 없으므

       로 이들은 자신들을 구속시켜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고,

  ⓑ. 다른 이는 ‘전3년 반 동안의 격렬한 환난속에서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올라온 사람들로서 환난을 이겼던 체험에 바탕을 두고 노래한다.’고 하였다.

  ⓒ. 또 다른 이는 ‘환난 중에서 순교하여 들어올린 무리들이 하늘의 주민들로부터 새롭게

       노래를 배운다.’는 해석이고,

  ⓓ. 또 다른 이는 ‘예수 믿고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수의 인원들이 새 노래를 배

       우는데 창조의 노래는 옛 노래라고 하는 반면에 구속의 노래를 새 노래’라 해석하였다.

 

이기고 구원받은 기쁨의 노래에는 수긍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새 노래를 배우는 신분상의 견해는 무리가 따르게 된다. ⓒ와 ⓓ는 새 노래를 배우는 신분이나, 먼저 간 하늘의 주민들로부터 배운다는 견해들은 본문과는 괴리(Estrangement)가 있으므로 그런 해석은 수용하면 안 된다. 신분은 1절에서 설명된 어린양의 신부들로 제한된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 모두가 아니다. 대환난에서 순교를 당한 순교자들도 아니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대표자도 아니다.

 

새 노래를 배울 자들은 144,000인 뿐이라는 뜻은 믿음을 이기고 부활과 휴거된 어린양의 신부들로서 새예루살렘에 거할 자들이 144,000인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새 노래는 믿음을 이기고 어린양의 신부가 된 자들 외에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인 밖에는 능히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배울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이라 하였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한다(엡4:30). 성령으로 보호 받을지라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는 완전한 구속이 되지 않았기에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구속의 날은 그리스도께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공중강림 하시는 날이 구속의 날이다. 또 성경은 “우리 곧 성령으로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들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한다(롬8:23). 베드로는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하였다.(벧전1:3-5)

 

위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 믿을 때에 성령을 주신 것은 몸이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들림을 받기까지 보호하시기 위함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배우는 신분은 어린양의 신부들인 144,000명 외에는 없다.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공중 강림하였을 때에 부활되고 휴거된 자들만이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처음 익은 열매”로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 여러 견해들은 옳바른 해석이 아니므로 그런 것을 수용하게 되면 자신의 안일한 신앙으로 인하여 대 환난에 남겨지게 된다.

 

144,000인의 자격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4-5)

 

4-5절까지는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있는 144,000인의 자격을 말한다. 사람들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 ‘믿기만 하면 다 구원받고 휴거되고 시온에 올라간다.’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도 여러 번 비교 하였듯이 학자들이나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니 성도들이야 가르치는 대로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가르치던, 예수님은 144,000인이 되는 자격을 엄격히 규정하셨다. 여기에 대하여는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성결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이처럼 성결하냐? 도덕적인 문제와 윤리적인 문제로 사회에 알려지는데 그런 사람도 시온에까지 들어가지는가? 이 자격은 19장 8절에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있어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는다 하였다. 그리고 어린양의 신부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은 여섯 가지 행실이 요구된다.

 

1.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

 

       여자에 관한 기존의 해석들은,

  ①. 어떤 이는 ‘이 단어는 성생활의 정결이나, 하나님과 성도와 관계를 남녀의 관계로 묘사

       하므로 이러한 상징적인 해석은 문자적인 정결을 포함된다.’ 하였고,

  ②. 다른 이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자는 언제나 성적으로 깨끗하기 때문에 신앙의 정절’

       이라 하였고,

  ③. 또 다른 이는 ‘수절을 요구하는 독신주의자가 아니라, 이 문장은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고 일편단심 그들의 정절을 주께만 바침’이라고 했다.

 

②번의 견해는 옳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앙의 관계에서 정절을 지키는 성도라면 성적인 정절도 따르기 때문이다.

 

2.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따르는 자에 관한 해석에도,

  ①. 어떤 이는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자’라 하였고,

  ②. 다른 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이라 하였고,

  ③. 또 다른 이는 ‘정절이 있는 성도는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 간다’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순종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144,000인은 부활과 휴거된 자들로서 땅에서 처음 익은 열매로서 구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예수님은 자신이 제2위격의 하나님이었음에도 아버지께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도록 요구했을 때, 순종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주가 되시지만 반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며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주가 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3. 사람들 가운데서 처음 익은 열매

 

       처음 익은 열매에 관한 기존의 해석들은,

  ①. 어떤 이는 ‘최선의 열매를 가리킨다.’ 하였고,

  ②. 다른 이는 ‘하나님께 헌신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하였고,

  ③. 또 다른 이는 ‘제물은 하나님과 어린양에 드려지는 것이므로 추수 때 제물로 드려지는

       첫 열매’로 해석하였다.

 

처음 익은 열매라는 뜻은 그리스도의 공중강림 때에, 예수 안에서 죽은 자의 무덤이 열리면서 부활된 성도와, 예수 안에서 삶을 살아온 성도들이 휴거됨을 말한다. 그러기에 요한은 “땅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은 “땅에서 사람들 가운데서”이다. 이 뜻은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 중에서란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출석한다 하여서 모두가 대환난전에 휴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 안’ 이란 행위계약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은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고전5:22-24)

 

여기에서 땅에서 처음 익은 열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한다. 땅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처음 익은 열매는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부활되고 휴거된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해석한 오류를 덮으려고 이런 말 저런 말을 붙이는데 그러한 수식어(Modificatory)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을지는 모르나 하나님이 바라는 해석은 될 수가 없다.

 

4.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

 

       속한 자에 관한 기존의 해석들은,

  ①. 어떤 이는 ‘처음 익은 열매와 속함은 같다’ 하였고,

  ②. 다른 이는 ‘하나님께 대한 소속’이라 하였다.

 

소속이란 표현은 정확하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소속이라는 뜻은 ‘Belong’을 나타낸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뜻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이다. 어린양에 속했다는 뜻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의의 흰옷을 입은 자들 중에서 생명의 면류관까지 받은 성도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를 “너는 나의 아내”로서 이마에 아버지의 이름어린양의 이름이 있는 신부를 말한다.(계3:12,14:2,22:4)

 

1절에서 요한이 감탄하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을 “보라”하였다. 이것은 절대적인 행위로 얻어지는 순종이다. 그 순종을 ‘Follow up’이라 한다. 이는 ‘나를 따르라’ 또는 ‘내가 행함과 같이 너희도 행하라’는 명령에 따를 때 ‘Follow up’이 된다.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 자

 

       지금까지 여러 해석들은,

  ⓐ. 어떤 이는 ‘일반말의 정결을 가리킨다.’고 하였고,

  ⓑ. 다른 이는 ‘거짓말은 마귀의 말이므로 거짓말을 하는 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소속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고,

  ⓒ. 또 다른 이는 ‘예수님께서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저희 아비를 닮아서 거짓말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 해석하였다.

 

그것은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요구한 정답은 아니다. ‘거짓말’을 ψεύδο󰐠로 표기되었으며, 뜻은 일반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종교 또는 진리를 비진리로 바꾸는 사람들대하여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은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22:15)”는 경고를 때 그런 자들은 144,000인의 자격이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신약교회가 다 이러한 무리 속에 포함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된다.

 

6. 흠이 없는 자

 

기존의 견해들은, 생활의 정결을 가리킨다는 해석과 거짓말과 흠을 함께 취급하였다. 그러나 이 흠은 가장 중요하며 앞의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총망라한 결론이다. ‘흠(Blameless)’이란 죄가 없는 결백이다. 또는 비난할 점이 없음을 말한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한다(살전5:23).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144,000인의 자격은 영,혼,몸, 셋이 비난받을 점이 없어야 된다.

 

이 단원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시온산과 어린양과 함께 서있는 144,000인의 신분에 대하여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러한 축복은 자신의 행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된다. 사람들은 적당히 믿어도 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자격에 관한 조건을 엄격하게 요구하셨다. 이러한 요구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 이마에 기록하신다. 이토록 믿음을 이긴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좌를 얻게 되는데, 그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부르는 새 노래는 숫자만큼 우렁차면서도 맑은 물소리처럼 부드럽고 음률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