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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설교·6/장죠셉목사님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HkAK/206

 

제4계명: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안식일문제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줄 곳 거론되어 온 문제입니다. 각 교파나 또 같은 교단에서도 교파에 따라 서로 다르게 해석하여 왔었습니다. 그러한 해석 차이는 각기 자신의 유익이나 편리대로 생각하여 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안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상고하는 동안에 우리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여라. 그리고 일곱째 날은 주님께 네 영을 바쳐라.” 안식일의 휴식에 대한 계명입니다. 사람은 하나님보다 나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엿새 동안에 창조하시고 이레 날에는 쉬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감히 아버지 하나님을 본받지 않고 그분의 계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계명은 우둔한 명령이 아닙니다. 사실은 육체적인 면으로나 정신적인 면으로나 영적인 면으로나 유익한 명령입니다. 사람의 몸이 피로할 때에는 어떤 피조물의 몸이나 다 그러하듯이 휴식이 필요합니다. 밭을 가는 소나, 짐을 운반하는 트럭이나, 모든 기계들까지 쉬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들을 잃지 않으려고 쉬도록 하는 것입니다. 밭의 땅도 씨를 심지 않은 여러 달 동안은 쉬게 합니다. 그동안 땅은 양분을 얻기 위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흙속에서 올라오는 염분을 잔뜩 저축합니다. 슬기로운 번식의 영원한 법칙에서 복종하는 동물과 식물은 우리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잘도 쉽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렛날에 쉬신 조물주를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짐승이나 식물들은 본능에 주어진 명령만 가지고도 그것을 따르고 복종하는데 어째서 사람이 하등 피조물보다도 못한 짓을 하는 것입니까? 이 계명은 정신적인 면으로도 유익하고, 육체적인 면으로도 유익합니다. 엿새 동안 사람은 모든 사람과 모든 일로 골몰하였습니다. 베틀의 기계장치에 실처럼 붙잡혀서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느라고 도무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를 한 주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말할 것입니다. ‘자신도 돌보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도 만나봐야지’ ‘나는 아비이니 오늘은 내 자식들과 있어야지’ ‘나는 남편이니 오늘은 아내에게 몸 바쳐야지’ ‘나는 형제이니 형제들과 즐겨야지’ ‘나는 아들이니 연로하신 양친을 돌봐야지’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축복을 위한 명령입니다. 일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더 거룩하고,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것을 보존해 주시는 온전하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이레 중에 적어도 하루는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을 왜 아버지와 아들들이나, 형제들이나, 아내나, 우리 자신의 육체보다 못하게 취급하면 안 됩니다.

 

주의 날은 주의 것이어야 합니다. 하루일이 끝나고 나서 저녁에 정다운 가정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런데 왜 엿새 동안 일한 다음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엿새 동안의 여행에서, 사업상 출장에서 돌아와서 ‘아버지 오늘은 내가 쉬는 날이지만 아버지와 함께 지내려고 왔습니다.’ 하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성실하게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에는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하였습니다. 이 뜻은 일은 성실히 하되 안식은 그 이상이라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안식을 지키기 위해서 엿새 동안의 일을 게으르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맡겨진 일의 성실이 이웃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은 장사할 때에 도적질하지 아니합니다. 일꾼의 임금을 횡령하지도 아니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부정하게 사기를 치지도 아니합니다.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은 하인과 종업원도 자기와 같이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은 하인과 종업원을 무시하거나 박대하지 아니합니다. 생기 없는 돌이나 나무막대기처럼 취급하지도 아니합니다.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득이 비록 자기 생활이나 향락에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해서 성전에 기부금이나 헌금으로 낸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복을 내리지 아니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거짓된 헌금입니까? 그 헌금에서는 사취를 당한 아랫사람의 눈물이 흐르고, 피가 흐르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헌금이 ‘좀도적질’한 돈이요, 이웃에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도둑은 이웃에 대한 배반자라고 불리는데, 어떻게 감히 그것을 제단아래 갖다놓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드리는 제물을 부정하다고 말하지요! 또한 창기가 자기 제단에 드리는 제물을 부정하다고 말하지요! 그렇다면 자기 일에 성실치 못한 돈으로 제단에 드려지는 제물은 부정하지 않습니까? 안식일은 자기를 성찰하는데 쓰지 않고, 더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쓰지 아니하는 사람은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난 엿새 동안에 지은 죄를 속죄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전에 나아오는 것만으로 안식을 거룩하게 지낸다고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내기만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사고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 그런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행위를 원하시지 흉내를 내는 행위는 원치 않습니다. 주일을 위선적(偽善的)으로 지키는 것은 흉내 내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주일에 거룩 한척하는 사람의 눈에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함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한가한 시간을 악습과 음탕과 연회로 다 써버리고 안식일에 성전에 나와 앉았다고 거룩한 것입니까? 새로운 한 주일동안에 어떻게 하면 돈을 사취하고, 해를 입힐 수가 있을까를 궁리하면서 휴식으로 지키는 것은 흉내 내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진실로 거룩하게 지키려면 자기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교만함을 고백하는 겸손입니다. 오는 일주일 동안에는 더 낫게 행동하겠다고 진실한 결심으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내적이고 영적이고 거룩하게 하려는 노력을 곁들이지 아니하고 물질적인 휴식만을 지키는 것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혹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죄짓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하셨다 합니다. 그러나 넘어지고 나서 다시는 넘어질 위험을 걱정해서 한 걸음도 옮겨놓지 않으려고 하는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어떻게 말합니까? 어리석은 아이라고 말하겠지요! 우리 모두가 어렸을 때는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런 일로 해서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를 더 사랑하셨습니다.

 

걸음걸이가 확실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지요, 우리가 넘어지면 어머니가 얼마나 수없이 입 맞춰주고 아버지가 얼마나 쓰다듬어 주고 했는지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이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넘어져서 울면 우리에게 몸을 굽히십니다. 그리고 “울지 말거라, 내가 일으켜 주마, 다음번에는 더 조심해라, 이리 와서 내게 안겨라, 내 품에서는 네가 아픈 것이 없어지고 너는 튼튼해 지고 기쁘고 깨끗해진다.” 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만일 우리가 아버지를 향한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이 잘 됩니다. 온전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어린아이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으로 믿습니다. 그는 어떤 일이 어떻게 생길지 묻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아이는 그 사실의 깊이를 생각해 보지 아니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에게 신뢰감을 주는 사람의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지극히 높으신 하늘의 아버지에게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작은 천사들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길을 잘못 들어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람들이 아주 순진하기를 원하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착하고 순결한 각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이처럼 어떻게 하여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 사람들의 눈에 보이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어린 젖먹이가 어머니 품속에서 젖을 찾는 것처럼, 안식일은 그렇게 아버지를 찾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의사에게 자신의 육신을 맡기고 의사가 자기를 다루는 것처럼, 안식일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과 육신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어러 분은 육신을 위해 의사를 찾아갑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육신이 병들기 전에 예방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정기적으로 예방주사나 검사를 받는 것도 예방하고 튼튼해지려는 것이 아닙니까! 안식일은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안식일에는 우리의 육신과 정신을 아버지에게 맡기면, 아버지 하나님은 엿새 동안의 일에서 지치고 피곤한 육신과 마음이 병들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주지 않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육신이나 정신에 병이 생기는데도 의사를 찾아가지 아니하고 사업에만 열중한다면 그 사람의 병든 육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사를 찾아가지 아니하고 계속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육신을 위한다고 쾌락만을 즐긴다면, 그 사람의 육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병들겠지요, 병들면 어떻게 됩니까? 죽지 않습니까? 죽으면 그동안에 자신의 육체를 위해 일했던 것이나 그 외의 모든 것을 가지고 갑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귀중한 당신의 영혼이 병들어 죽는다면 그 영혼이 가지고 갈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질 수 있습니까?

 

안식일은 단순히 우리들 육체의 안식만은 아닙니다. 육체는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육체 안에는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도 함께 있습니다.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함께 하는 생명이나 영혼은 육체에서 생명이 끝나면 서로가 갈라집니다. 그토록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것을 다 하였지만 생명이 육체에서 떠났을 때에 그 육신은 한줌의 흙이 된다는 것을 아시지요! 그러면 여러분의 육체가 중요합니까, 생명이 중요합니까?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을 살리는 자신은 무엇입니까? 육체입니까, 영입니까? 영입니다. 육체를 위해 살지말고 영을 위해 살아야 됩니다. 영을 위해 살려면 자신의 영을 주신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영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당신의 쉬시는 날을 거룩하게 하셨는데 우리가 거룩하게 자키지 않으면 어떤 잘못이 있습니까?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병들어 죽든 나이가 많아서 죽던 죽음 후에는 영원히 존재하는 영생과 영벌이 있습니다. 영생과 영벌의 갈림길을 누가 주관하십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날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느 길로 가라고 하시겠습니까? 자신이 가야될 길은 어느 길입니까? 영생의 길입니까, 아니면 영벌의 길입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부탁합니다.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켜서 영생의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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