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산 어린양 곁에 서있는 신부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14:1)
제14장은 구구한 해석들이 있다. 그러한 해석들로 인하여 신자들의 믿음을 해이하게 만들게 된다. 지난날의 해석을 보면 예수 믿는 이름만 걸어놓고 세상에서 아무렇게 살아도 대환난에 남을 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들이 신학교에서 가르쳤고, 또 그들로부터 배운 목사들이 ‘믿기만 하면 된다.’고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한 원인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두움의 사상이 신학교와 교단의 지도자들에게 가장 많이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셨다.
14장은 11장15절에서 일곱째나팔이 불어지고, 16장 1절로 가서 첫째 대접 재앙이 있기까지 막간은 12-15장까지이다. 따라서 앞의 두 장에서 교회가 박해받는 심판과 연결지워서 축복과 저주의 장면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생애에서 믿음을 온전하게 지켰던 성도들은 대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고 부활이나 휴거되어서 시온에서 어린양과 함께 서서 땅에서 일어나는 환난을 보고 있다. 반대로 믿음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적당히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살던 신자들은 대환난에 남겨져서 적그리스도정부로부터 박해받는 내용을 보여준다. 14장에서 단원을 나눈다면,
① 시온 산에 서있는 어린양과 144,000명의 신분.(1-5)
② 천사의 메시지.(6-7)
③ 바벨론의 멸망.(8)
④ 짐승에게 경배하고 666표 받는 자들의 멸망.(9-12)
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축복.(13)
⑥ 환난 때에 신앙으로 익은 신자들의 구원.(14-16)
⑦ 환난 때에 불신앙으로 멸망 받을 자들.(17-20)
요한은 자기가 보기에는 하늘의 시온산에 어린양이 섰고 어린양과 함께 144,000명이 선 것을 보고 감탄하며 외칠 때 ‘보라’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졌다 한다. 여기에서 다루어져야 할 내용은,
① 시온 산의 위치.
②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4,000명의 신분.
③ 144,000명의 이마에 쓰여진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지 셋으로
대지를 나누어서 상고하면 은혜가 될 것이다.
1. 시온 산의 위치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1a)
1절에서 요한이 감탄하며 외치는 것은 144,000명에 대한 감탄사였다. 이 시온산에 서 있는 어린양의 신부들의 숫자다. 144,000명의 신분을 상고하기 전에 시온(Σιών)산의 위치부터 설명이 되어야겠다. 지금까지 우리가 들어온 견해들을 보면,
ⓐ. 어떤 이는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지상의 산’이라 하였고,
ⓑ. 다른 이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시온 산’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시온’은 땅이라는 대지(Solid earth)가 산이고, 성 예루살렘은 ‘도성’이라는 건축물(Structure)이다(계21:1-). 그런데 어떻게 산이라는 대지가 건축물 위에 위치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견해는 수용하기에 무리가 따른다. 우리는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지상의 시온이다’ 또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도성을 시온 산’이다 하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때로는 그런 견해로 인하여 듣는 사람들에게 그릇된 가르침을 주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바로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되며, 어떠한 미혹도 당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된다. ‘천국’이란 말은 한문 용어다. 우리말은 ‘하늘나라’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셋으로 구분되어진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낙원도 시온으로 보고, 새예루살렘도 낙원에 있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구체적인 내용은 21장에서 자세히 설명해야 되겠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요약만 하겠다.
1층천 하늘나라: 첫째하늘 나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곳은 하늘나라에 맨 아래에 위치한다. 이곳은 낙원(παράδεισοs)을 중심으로 조성된 하나님의 나라다. 첫째하늘 나라에는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로서 흰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들이 거하는 곳이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하신 내용을 오해하고(눅23:43), 시온산을 낙원에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2층천 하늘나라: 둘째하늘 나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곳은 첫째하늘 나라와 셋째하늘 나라 중간에 위치하는 왕국(βασιλεία)이다. 이곳은 1층천과 3층천 중간에 위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지못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곳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신부가 되지 못했거나 왕권의 자격을 얻지 못하는 믿음의 성도들로서 시온의 영광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거할 곳이다.
3층천 하늘나라: 셋째하늘 나라로 불리기도 하는데, 둘째하늘 나라보다 위에 있는 시온(Σιών)이다. 그리고 시온에 있는 모든 산들은 시온산이며 시온이란 뜻은 극치의 아름다음이다. 새예루살렘성은 시온지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시온공중에 떠 있다(계3:12,21:2,10). 그리고 도성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계21:22). 이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공중강림 하실때 부활되는 자들과 휴거되는 자들로서 어린양의 신부들과, 두 증인으로서의 사역자들과 구약에서 신실한 믿음으로 장자의 총회에 들어갈 왕과 같은 권세를 얻은 자들에게만 국한된다
그러므로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무리들은 어린양의 신부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라 아니하고 ‘어린양’라 하였다. 따라서 시온산을 지상에 있다는 해석이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으로서의 표현이라는 해석은 하늘나라에 관해서 모르고 해석하였기에 둘 다 옳은 해석이 아니므로 수용하면 안 된다.
2. 시온의 144,000명의 신분
보라! 어린양이 시온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이 섰는데....(1a)
요한이 ‘보라’는 말은 감탄사다. 지금까지 이러한 감탄사로 외친일이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하늘나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끌리어 올라가서도 그러한 감탄사는 쓰지 않았는데 여기서 보라고 외친다. 그가 시온산이 선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인가?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신 영광을 보았을 때도 감탄하며 외친일은 없었다. 요한이 감탄하는 것은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4,000명을 보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감탄하는 이 144,000명의 신분부터 알아야 된다. 여러 사람들의 해석하기를,
ⓐ. 어떤 이는 ‘7장의 숫자와 같으므로 유대인의 사역자들’로 해석하였고,
ⓑ. 다른 이는 ‘144,000명을 구원받은 성도들을 상징하는 수’라며 상징으로 해석하였고,
ⓒ. 다른 이는 ‘전3년 반 동안 복음으로 전하는 유대교 전도자들 144,000이 후3년 반이되자
소식이 없더니 시온에 와 있다면서 유대교 전도자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들’이라
고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두 증인으로서 유대교 전도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하늘로 끌리어 올라갔다는 앞서의 자신의 해석과 일치되지 않는 모순을 보이게 된다. 또한 7장의 같은 인물이라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구원받은 상징적인 수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엉터리 해석이 어디 있나? 예수 믿는 신자들이 다 구원됐다고 하는데 계시록 1장 1절도 읽어보지 않은 무지한 자의 속임수에 속으면 안 된다.
왜 그런가? 앞에서 시온산의 위치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 연고로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있는 144,000명의 신분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시온산에 서 있는 신분은 어린양의 신부들의 숫자다. 먼저 그들을 ‘신부’임을 밝히려고 그리스도라 칭하지 아니하고 ‘어린양’이라고 하였음을 주목해야 된다. 표현을 바꾸어서 ‘어린양의 신부들이 어린양과 함께 섰는데’로 읽어야 된다. 이들이 믿는 자들의 상징적인 숫자라면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3층천하늘 나라에 들어가야 된다. 그러면 1층천과 2층천 하늘나라에는 누가 들어가는가? 그리고 낙원에서 교정(Paideia) 받는 주의 종들과 성도들은 믿는 자가 아니라서 상징적이 숫자에서 제외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바깥 어두운데서 연단(Bemati) 받는 주의 종들과 성도들도 시온에 들어간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들을 교육을 받게 하고 연단을 받게 하시는가? 또한 유대인 전도자들로 해석하면 기독교인들의 신부들과 왕권가진 사역자들은 어디로 들어가야 되는가? 그러므로 저들의 해석은 옳지않다. 뿐만아니라 성도들의 믿음을 해이하게 만들고, 나아가서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으로서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사상이기 때문이란 결론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3층천 하늘나라 시온 공중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21:22) 예루살렘 성이 있다(계21:10-). 3층천 안에는 왕권의 영광을 얻은 구약의 선진들이 거하는 고을들이 수없이 많다. 또한 증인들로서의 대환난사역자들이 왕권을 얻고 거하게 될 고을들도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공중강림 하였을 때, 구름위로 끌리어 올라간 부활 자들과 휴거 자들은 어린양의 신부들로서 예루살렘에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3층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숫자는 많으나,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자들은 어린양의 신부들뿐이다. 요한이 감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된다. 믿음의 정절을 지키고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어린양이 가장 기뻐하는 ‘신부들을 보라’고 외친 감탄사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3층천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1층천이나 2층천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아들의 자격은 없고 다만 백성의 자격을 얻을 뿐이다.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을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계시록 전체의 해석을 오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은 상징적인 숫자도 아니요, 유대교 전도자들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공중에 강림했을 때에 부활되고 휴거된 자 들인 신부들이다. 대개의 생각은 14장에 나타나는 수가 제7장에 나타나는 수를 문자적인 이스라엘 열두지파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제7장에 나타나는 수의 위치는 ‘땅에’있고, 14장에 나타나는 수의 위치는 ‘하늘에’있다. 7장의144,000은 대환난 때에 땅에서 적그리스도정부가 해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고 있다. 그리고 14장의 144,000은 땅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었다.
첫 열매에 관한 말씀은 “그러나 각각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를 주목해야 된다(고전15:23). 고린도서의 증거는 그리스도가 첫 열매라 하시고,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붙은(휴거) 자를 본문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 라고 분명히 기록되었다. 따라서 144,000인은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부활과 휴거된 신부가 분명하므로 다른 해석으로 성도들을 미혹시키면 안 된다.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4,000의 위치는 시온산이라 하였다. 3층천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산들은 시온산이다. 3층천 하늘나라인 시온 공중에 새예루살렘 도성이 있다. 시온에는 왕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살게 될 곳이 따로 있고,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왕권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살게 될 곳이 따로 있다. 이들은 각기 지상에서 심은 대로 그곳에서 고을들을 유업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린양의 신부는 아니다. 어린양의 신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죽으신 이후의 성도로서 정결을 지킨 자라야 신부가 된다. 그 수는 그리스도께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공중에 강림하셨을 때에 부활되고 휴거된 자들 144,000인이다.
주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4:16-17)
그때에 함께 라는 뜻은 공중강림 때를 말하며 휴거되는 사람이란 뜻이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하였다(골3:1-2). 위엣 것만 생각하는 성도라야 공중 강림 때에 휴거되겠기 때문이다. 이유는 의의 흰 세마포 옷을 입기 위해서 위엣 것만 찾아야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벌거벗었으면서도 믿기만 하면 다 휴거되고 다 구원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벌거벗은 사람은 안 된다 하셨음을 깨달아야 된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3:18)
흰옷을 사서 입고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하셨는데 언제부터 벌거벗었는가? 모세는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에 있느냐? 고 불렀을 때에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였다(창3:9).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모두 출생될 때부터 영적 옷을 빼앗기고 벌거벗은 상태로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수치를 깨닫지 못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장담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흰 옷을 ‘세마포’ ‘의의 옷’ ‘두루마기’ 등으로 기록해 놓았다.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흰 세마포라는 옷을 입으라는 뜻이다. 벌거벗고 있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 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내치리라.(3:15-16)
예수님의 경고는 신앙생활에서 온전한 행위가 없으면 벗은 상태로 서 휴거에서 제외시킴을 “토해 내친다.”고 경고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다 구원 되였고, 환난 때에 남은 자들은 유대교인뿐이라 할 것이며, 시온에 서있는 144,000을 구원받은 성도들의 상징수라 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경고하셨다.
사대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3:4-5)
사데 교회에 흰옷 입은 성도가 몇 명 있는데 그들이 흰옷을 입은 것은 “행위가 합당하다” 하였다(3:4). 그리고 흰옷을 입지 못한 성도들에게도 믿음의 열심을 내게 되면 이들처럼 흰옷을 입혀 주신다고 온전한 행위를 요구하셨다. 그리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요, 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하시면서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하셨음을 오해하면 안 된다(3:1-3 ). 벌거벗었고, 신앙인으로서 온전한 믿음을 지키지 못하여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던 때에 휴거되지 못하고 환난에 남겨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다 구원되고 환난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는 해석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3. 두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1b)
앞에서의 오류로 인하여 여기서도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는 부분이다. 요한은 144,000인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진 것을 보았다 한다. 두 가지 이름에 대하여 전해지는 해석은,
ⓐ. 어떤 이는 ‘환난이 지나가고 천년왕국으로 들어서고 있으므로 7장에서 하나님의
여기서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새긴다.’는 해석과,
ⓑ. 다른 이는 ‘13장16절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자와 대조시키려는 의도’라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은 자들 중에서 부활된 자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가 휴거된 자들로 구성되는 새 예루살렘의 주인으로서 144,000명이다. 첫째로 이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 두 이름이 쓰였다.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서 설명해야 될 부분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 믿고 거듭날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라는 표로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다는 뜻인데, 이는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표시다. 둘째로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행위가 온전하고 정절을 지킨 것을 지정의라는 완전한 거듭남이 물로 거듭남이다. 그러므로 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세마포를 입은 성도로서 어린양의 신부라는 표시로 이마에 쓰이며, 이 새 이름은 천국에서 영원히 부려질 이름을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 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를 표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앞에서 공부하였다. 일곱 교회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보여주는 것도 그러한 목적 때문이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휴거 상으로 보는 것은 ‘그이 위[이마]’에 ‘아버지의 이름’과 어린양의 ‘새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쓰였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이름이 쓰인다는 뜻은 성도의 행실이라고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라 하더라.”(19:7-8). 이처럼 옳은 행실이 있는 성도에게 어린양은 당신의 신부로 택하실 때, 천국에서 영원히 불러지게 될 ‘새 이름’을 예수님께서 주기 때문에 “나의 새 이름”이라는 뜻이다. 또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갈 성안을 아름답게 설명하면서는 요한은 계속해서 “그이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하셨다(22:4). 따라서 어린양의 신부들인 144,000인은 시온에서 영원히 불러질 이름을 직접 주시게 되는데, 그 이름이 “나의 새 이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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