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다섯처녀 (마 25:1-13)
석광근 목사
어느 목사님이 6.25전쟁 때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인민군에 보내게 됐습니다. 인민군은 남한으로 내려 왔다가 다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속한 부대가 마침 고향 근처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소 자신과 가까운 상관에게 집에 잠시 다녀 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고, 그 상관은 그를 믿고 아무도 모르게 다음날 날이 밝기 전 까지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집으로 보내줬습니다.
아들이 살아 돌아오자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습니다. 그
러나 아들은 꼭 돌아가야만 하는 사연을 설명했습니다.
가족들은 바보 같은 짓이라며 반대를 했지만, 목사인 그의 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약속을 지켜라.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를 보내준 네 상관이 죽는다. 가라!" 가족들과 눈물로 이별을 한 그는 날이 밝기 전부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부대는 국군에게 쫓겨 북으로 향했습니다. 미군 전투기가 이들을 향해 폭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상관과 구덩이에 몸을 피했는데,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상관이 주위를 돌아보더니 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어제 약속 시간을 지켜줘서 고맙다.
난 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
내게도 북에 부모가 있다.
너를 고향의 네 부모에게로 보내주고 싶다. 지금 바로 도망쳐라."
그 상관의 도움으로 그는 추격해 오는 국군을 향해 달려가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병사는 지키기 힘든 약속을 지킴으로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약속은 그 사람의 인격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약속 중에도 시간약속은 더 더욱 중요합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약속시간만은 꼭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공적인 약속은 물론 개인적인 약속을 했어도 그 약속한 시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왔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늦을 수밖에 없을 때는 연락을 드려 양해를 구합니다.
그런데 제 편에서 이렇게 시간을 지키려고 정성을 기울여 약속한 장소에 갔는데 상대편에서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때는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약속시간을 어기지 않으려고 땀을 흘리며 혹은 택시를 타고 달려갔는데 약속한 사람이 늦게 오거나 오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습니다.
그 순간을 이해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약속 시간만은 지키자" 좀 거창한 말 같습니다만 제 삶의 철학 이기도합니다.
예배시간이든 모임의 약속이든 꼭 지켜보려고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노력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식을 거행 할 때 약속 시간이 다되었는데 신랑이나 신부가 늦게 도착하는 경우만은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치 않습니까,
예배시간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니까 성도들이 적게 왔다고 할지라도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만 결혼식이라는 것은 신랑 혼자서도 할 수 없고 신부혼자서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결혼시간이 늦어지기라도 하면 주례자 탓도 아닌데 하객들보기에 얼마나 미안하고 민망스러운지 모릅니다.
한번은 우리 박장로님의 결혼식을 대구에 가서 거행하게되었는데 경부고속도로 김천을 지나가다가 관광버스가 고장나서 무려 두시간이나 늦게 결혼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하게도 그 날 마지막 차례라서 무사히 식을 마치긴 했습니다만 주례하는 입장에서 얼마나 민망하고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그 축제의 특수성 때문에 은혜롭게 마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결혼식은 최고의 축제요 기쁨과 행복의 예식입니다.
그 중에서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혼예식은 그 중요도나 흥취 면에 있어서 남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예식의 두 당사자인신랑, 신부는 물론이고 결혼 축하 잔치에 온 손님들에게는 종교적인 의무까지도 면제되는 특권이 주어 졌다고 합니다. 또한 부모를 따라 결혼 잔치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는 율법 학습을 일단 중단시키고 몇 일간의 휴가까지 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큰 특혜를 베풀 까닭은 결혼예식이 그 어떤 의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결혼풍습을 보면 좀 특이하고도 낭만적인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지방에서의 혼인 잔치는 우리들처럼 간단하게 해치우는 것이 아니고 일주일 혹 어떤 집은 그이상도 축제가 계속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지방의 결혼식은 낯이 아니라 주로 저녁이나 한밤중에 거행되었습니다. 만약 일주일간을 결혼식을 거행하는 기간으로 정하였다고 한다면 신랑은 자기 친구들과 어울려 오랜 시간을 즐기다가 약속된 혼인 기간 중 한날을 잡아서 한밤중에 신부집으로 소식도 없이 기습적으로 행차합니다. 한편 신부집에서는 신랑이 오는 동안 신부의 친한 친구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를 즐겁게 해줍니다. 이때 신랑은 신부의 집에 언제 도착할지를 알리지 않고 예상치 못한 시간에 갑자기 들이닥쳐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측 식구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신랑 오기를 기다리다 지친 신부의 들러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큰 재미로 여겼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신랑은 주로 어두운 밤중이나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시간에 기습적으로 신부집을 찾아든다고 합니다. 이때 신랑 친구 중 하나가 앞서 가며"신랑이 오고 있소 나와 맞으시오!"라고 외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신부집을 찾은 신랑이 정해진 예식을 마친 후 다시 신부를 데리고 결혼 잔치가 열리는 자기 집 곧 신랑집으로 나서게 되면, 신랑집까지 가는 길에는 긴 행렬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때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이 행렬에 함께 끼어 잔치연회가 배설된 신랑집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등불을 준비하지 못하면 신부는 두말 할 것도 없고 신부 친구는 물론 초청 받은 하객들까지 이 행렬에 끼지도 못할 뿐더러 신랑의 집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가 도착하여 잔치 집 대문을 닫은 이후에는, 신랑 신부의 안전을 위하고 잔치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 안에서 대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주신말씀 1절에 보면"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는 모든 시대에 예수를 믿는 성도들 전체라는 영감을 주시면서, 바로 이 유대인의 결혼 풍습 가운데 한 부분을 언급하시고, 지상 모든 성도들의 신랑 되신 당신의 재림을 맞는 성도들의 자세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주목해야할 것은 열 처녀가 신랑을 맞이 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처녀들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고, 같은 옷을 입었으며,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에게는 등도 있었고 기름 넣을 그릇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신랑을 기다리다가 지쳐 졸다가 잠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달랐기에 다섯 처녀는 슬기롭다고 하였고 다섯 처녀는 미련한 처녀라고 하였을까요?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평소에는 그들의 차이점을 도무지 발견 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때가 이를 때까지, 곧 신랑이 올 때까지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오늘 신랑을 기다리는 우리들 모두가 이 비유를 통해서 신부 된 나의 현주소를 밝히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형식적인 우리의 신앙을 경고하십니다.
오늘주신 5절 말씀을 보세요"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하셨습니다. 열 처녀 모두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 처녀 모두는 함께 결혼 잔치에 함께 초대를 받았고 그들은 다같이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들도 미련한 처녀들도 다같이 졸고 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다같이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적인 삶의 방법은 똑 같았습니다.
그러면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은 기름의 준비였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등은 무엇이며 기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일반적으로 기름을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전체의 내용을 보아서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등은 시각적 측면의 각종 신앙행위를 말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봉사 구제 선교 등을 의미하는 것이고, 기름은 내적 측면의 신앙 행위를 뜻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 거룩 경건 성령 내주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등의 기름은 우리 신앙의 내용, 곧 삶의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내가 지금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는 형식을 갖추었다고 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하는 내용도 갖추었다고 말입니다. 형식이 무엇입니까? 등이나, 혼인 잔치의 초대나, 잔치에 참석한 것을 말할 수가 있는데 이런 형식이 있으니까 내용도 있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여러분이 지금 예배에 출석하였습니다. 이것은 형식입니다. 이 형식 속에 내용도 함께 있어야합니다. 말씀들을 때에 내게 주신 계시의 음성으로 받아 깨닫고 돌이키고 감격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이 찬송이 형식이 되어서는 안된 다는 것입니다. 찬송을 드릴 때에 내 심령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영광의 찬양이 되어야하고 드리는 찬양을 통해 내 심령 속에 기쁨이 넘쳐 나야합니다. 형식이 꼭 내용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저는 형식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내용이 있을 때 그 형식을 통해 내용을 더욱 아름답게 표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식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내용이 없는 형식은 언제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모시는 날에 내용이 없는 형식은 설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신랑이 오기 전에는 여러 면에서 유사했던 처녀들에게 신랑이 왔을 때 비로소 미련한 처녀들 속에 있던 결함이 들어 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얼마나 내용이 있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우리 삶 속에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그 위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몆해 전 필리핀 선교 현지를 방문했을 때 동료 목사님들과 함께 작은 통통배를 타고 몰라카이 섬으로 항해를 할 때의 일입니다. 그 배의 사공은 아버지와 이제 겨우 십 여세 되는 아들 이였습니다. 섬을 향해 떠날 때는 날씨도 좋았고 미지의 섬을 향해 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배에단 모든 분들이 찬송을 부릅니다. 이때 우리 일행모두는 소위 선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부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항로를 따라 목적지로 가는 일이란 그저 평범한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시간 쯤 항해를 하였을 때 갑자기 바람과 풍랑이 일어나 조각배에 물이 넘쳐들기 시작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조각배를 움직여오든 엔진마저 멈추고 말았습니다. 배는 바다 한 복판에 서 속수무책으로 표류합니다. 그 배에 타신 분들이 목사님들이라 입가에는 찬송을 부르는 듯 하지만 두려워 떠는 모습이 역역 합니다. 그런 데 잔잔한 바다위로 항해할 때 대수롭게 생각했든 선장인 아버지와 아들, 조금도 두려운 기색없이 침착하게 아버지는 엔진을 고치고 아들은 바가지로 넘쳐 들어온 배 안의 물을 의연한 자세로 퍼 내고있는 용기와 의지를 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최악의 경우가 닥쳐와도 우리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배를 탓 습니다 함께 항해를 합니다. 잔잔한 바다 위를 항해 할 때는 함께 즐거움을 나누기도하였습니다. 그들과 우리가 형식으로서는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몰아치고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내용이 텅 빈 형식만을 가지고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지마는 저들은 형식 속에 감추어저 있는 내용으로 그 위기를 극복 할 수 있었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등잔에 기름을 채운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안할 때는 언제나 은혜가 넘치는 것 같다가도 어려움이 찿아 오면 불평하고 원망하며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세상으로 기우려집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내용만 확실하면 많은 위기 앞에서도 내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시편기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두려운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 이다."했고"주를 의지함으로 내가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둘째, 누구도 나의 믿음을 대신 할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신랑이 왔다 나와 맞으라" 고 소리를 칩니다. 미련한 처녀가 불을 밝히려고 보니 불이 켜지질 않습니다.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지혜로운 처녀에게 기름을 좀 빌려달라고 애걸을 합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부족하다" 어떤 사람은 지혜로운 처녀가 인색하지 않느냐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교훈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남에게 나누어줄 구원의 은총은 없다, 이것이 오늘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의 음성입니다. 모태신앙 이라는 형식에 속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어머니가, 남편이 아내가, 독실한 믿음의 사람 이였다고 나의 믿음과 연관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마세요, 미국 시카코에 있는 D . L Moody신학교 학장인 조지 스위팅 박사는"하나님께서는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아버지가 믿었기 때문에 아들인 내가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으니 파는 자 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싸라는 슬기로운 처녀들의 권고에 도리 없이 기름을 사러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여 기름을 사 왔더니 잔치 집 문은 굳게 닫혔고 "주여, 주여" 부르며 아무리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 입니 다. 우리가 여기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알아야할 것은 진작 깨달았어 했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다 졸고있을 시간이 있었다면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좀더 일찍 깨달았으면 문제가 없었는데 막상 깨달았어 야할 시간에는 계속 졸고만 있었으니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빌어보려고 하지만 나누어주지를 않습니다. 이는 내 믿음은 내 것이요 다른 사람이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부인을 둔 믿지 않는 남편 되는 이들이 잘 하는 말이 있는데"아내 치마 자락 잡고 천당 갈 것이요"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천당 가는 티켓은 하나 가지고 둘은 못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자기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느 나라 신학대학 학장 아들이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그는 신학대학을 나온 목사입니다. 그런데 미국인 한 학생이 그들 특유의 솔직한 생각에서 이 목사에게 질문하기를 "당신 예수 믿습니까? 그리고 구원은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물음에 "내 아버지가 신학 대학 학장입니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하는 말이 "당신 아버지가 하는 신학대학 학장과 당신이 예수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며 정색을 하기에 큰 망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 신앙은 어디까지나 내 신앙입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구원일 뿐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문제입니다. 나의 영혼의 문제, 나의 생명의 문제, 진리와 나와의 문제, 나의 구원의 문제, 이 모두는 누구의 것에서도 빌어올수 없고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각자의 문제요 나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개인적인 만남, 개인적인 깨달음, 개인적인 신앙,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써 만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믿음은 빌려 줄 수도 ,빌릴 수도 없다는 이 진리를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문이 언제나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찬치집의 문이 항상 ,언제까지 계속 열려 있지만 안다는 것입니다.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있습니다. "신랑이 오므로 준비된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잔치집 문이 닫혔습니다. 한번 닫힌 문은 다시 열 수가 없습니다. 문 닫히기 전에, 졸음이 오기 전에, 인생의 황혼기가 되기 전에, 건강하고 눈이 밝으며 총명이 흐려지지 않았을 때에 준비할 것을 준비하고 일할 것을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다려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은 닫힌지라." 문이 닫힌 이후에 와서 애타게 부르짖어도 소용없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삶의 기회는 순간으로 찿아 오는 것이지 언제나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어느 한 순간 내 인생의 기회의 문이 닫혀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몸부림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기름을 살수도 있고, 지금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할 수가 있고, 지금은 주님을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회의 문은 닫힐 수가 있습니다.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 말씀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 헌신하고 봉사 할 수 있는 기회, 그런 기회가 언제나 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혹시 중요한 여행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지나버려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나고 혼자 남게된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그때여러분은 심장이 멎는 듯한 쓰라린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일에 너무 바빠 늦게도 착하여 천국 문이 닫히고 "주여,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소서" 하고 절망감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는 사람이 된다면 이 엄청난 불행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스코틀런드 에 화이트필드(Whitefield)목사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어느 날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십니다. 강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젊은이가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우리가 천국 문에 갔을 때 문이 닫혔으면 어떻게될까?" 옆에서 듣고있든 젊은이가 "우리의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이 열어 줄 꺼야."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설교말씀을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화이트필드 목사님은 계속해서 설교를 합니다. "우리가운데는 문이 닫히면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이 열어 줄 꺼야. 하고 생각함으로써 예수님의 경고를 회피하려는 경박한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자기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목사님의 설교에 두 젊은이는 깜짝 놀라 서로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말씀을 계속 이어 가십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열어 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 문이 어떤 문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문은 바로 지옥의 문입니다 ! 저주와 공포 속에 온 영과 육을 송두리채 내 맡겨야 하는 지옥의 문인 것입니다 ! " 목사님의 감동적인 설교 말씀에 두 젊은이는 무릎을 꿇고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님을 깊이깊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얼마전 원자력병원에 병 문안 갔다가 서른 두 살 된 자매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서 온 가족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광경을 보면서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어린 자식 두고 그렇게 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말씀을 통해서 깊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경우도 우리의 신앙의 형식이 내용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도 나의 믿음을 대신 할 수 없으며, 문이란 언제나 항상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깨어 준비하는 슬기로운 신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마 25장 1-13 슬기로운 다섯처녀/ 석광근|작성자 kai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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