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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설교/주기철목사님

일사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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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각오 (一死覺悟)

주기철 목사

본문: 요한복음 11 : 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동무에게 말하되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 하더라』


  요한복음 11장 16절은 나사로의 부생장으로 읽게 되다. 예수님 전도의 시기는 점점 끝나게 되고 십자가는 차차 가까워 오는 때 마침 사랑하는 친구 베다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히 오시어 병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이틀이나 지체하는 중 나사로는 그만 죽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형세이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를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올라가시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라 위험한 곳에 전진하는 제자들은 위구(危懼)한 생각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에 도마가 동무에게 이르되 우리들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고 부르짖었나니 이는 솔직한 도마가 위험 직전에 일사를 각오하는 말이다. 비판의 사람 도마도 사선(死線)을 넘어선 이상 창검이 족히 두려울 바 없는지라 후일의 도마는 과연 피사와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인도인의 창에 피를 뿌려 순교하므로 인도 교회의 터를 개척하였다. 그래서 7월 1일은 도마의 순교일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도마와 같이 일사각오가 있어야 한다.


1.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이제 위험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를 따라가려면 생명을 아끼고는 따라갈 수 없다. 도마의 생각에 금번 행차에는 위기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수난의 최기(最嗜)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닥쳐올 것을 직감(直感)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한 도마는 「우리도 또한 같이 죽자」고 일사를 각오한 것이다.

  예수를 환영하던 한 때도 지금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박도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라.

  『무릇 나에게 오는 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의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저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그리스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들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신지라』(벧전2:21) 이 천지간 머리 둘 곳 없는 곤궁의 자취 사람들에게 쓸어버리우는 고독의 자취를 우리도 밟아야 하고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의 자취, 도처에 핍박하던 곤고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 나가야 한다. 망하여가는 예수살렘 성 하에 눈물의 자취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의 자취! 우리도 일보 이보 눈물과 땀방울의 자취 걸어야 하고 골고다의 흘리신 피의 자취, 우리도 이 피자취에 엎디어 이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야 한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 성 도마의 일사각오 인도 도상(印度途上)에 뿌리는 피!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를 따라 일사각오!


2. 남을 위하여의 일사각오


  주님의 이번 베다니 행차는 한 사람 친구 나사로를 위한 모험이오,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구에 응하여 수고하시는 것이니 남을 위한 모험이다. 이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의 일행도 남을 위한 수고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가서 함께 죽자』는 도마의 결심은 남을 위한 일사각오다.

  예수의 일생은 순전히 남을 위한 일생이니 이 세상에 탄강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에 죽으심도 죄인을 위하심이었나니 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살신애인(殺身愛人) 그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그 얼마나 거룩한 행위이냐! 감리교 제일대 선교사 아펜셀라 목사는 조선 감리교의 기초석이오 배제와 이화학교의 아버지다. 이보다 저의 최후는 더욱 고귀하였나니 마지막 전도 여행에 수증기선으로 남행하다가 그 배는 불행히 파선하였다. 자기는 일등실(一等室) 손님으로 구조를 받아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행자인 조선인 여학생을 건지려다가 그만 죽어버렸다. 오! 이 얼마나 거룩한 죽음이냐! 남을 위하여, 일개 외국인 여학생을 위하여 만리 타국에 그 생명을 버리는 그 정신은 우리 조선 교회 역사상에 살아있고 그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빛나리로다. 더구나 그 아들 그 딸도 조선을 위하여 선교를 계속하고 있지 아니한가?

  흑노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아브라함 링컨의 아름다운 일생, 아프리카 개척을 위하여 몸을 드린 선교사 리빙스톤의 장열한 일생! 이는 다 남을 위한 제물이다. 남양군도와 인도와 중국의 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자 백이요 천이다. 이들은 다 예수의 정신을 계승한 희생이다. 당년 나사로를 위하여 일사를 각오한 도마는 후일 억만의 인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었도다! 숭고할거나! 도마의 일사각오! 오늘 우리에게도 남을 위한 일사각오.


3.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


  주님 이번 베다니 행차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서의 모험이다. 주님이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벌써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애곡의 베다니었나니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인생의 비극을 눈물뿌려 곡하시었다. 기도와 함께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하여 천지도 놀라는 듯 나사로는 부생하였다. 아! 부활! 할렐루야! 영광일세.

  나사로의 부생은 이적중 최대의 이적일 뿐 아니라 부활의 최대 교리를 산 사실로 보여주는 이적이오 또한 장래에 예수의 부활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래서 『너희들을 위하여 기뻐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믿게 함이라』(요11:15)고. 『이 말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함이라』(요11:42)고 예고한 대로 나사로는 부활하였다. 이는 주님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을 믿게 하는 큰 이적이다.

  도마가 이번에 예수를 배종(陪從)하여 부활의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함은 미리 안 것은 아니나 부활의 목도할 수 있는 일사의 각오라 할 수 있다. 후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고 대오철저(大悟徹底)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하였다. 그런즉 도마는 나사로의 부생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는 동시에 신자의 부활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도마는 이 부활의 복음을 파사와 인도에 전하였다.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진리의 발명은 모두 희생의 결과 아닌 것이 없다. 아메리카 대륙이 인간의 복지되기까지 콜럼버스 이래 허다한 항해자의 수고가 있었고 전기등이 우리 앞에 밝아지기까지에는 에디슨 같은 과학자들의 뇌고가 쌓였던 것이다. 陷之(함지) 死地面後生(사지면후생) 유사이생(有死而生) 죽음이 있는 뒤에 삶이 있다.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도 일사각오다. 일사각오 한 뒤에 승리가 있고 발명이 있고 살 길이 있다. 하물며 천래의 진리 부활의 진리라오. 내세를 부인하는 공산당 무리도 그 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늘 영생을 믿고 부활을 소망하는 신자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피로써 전지 우전하여 나려오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하에 오십만 성도의 피가 흐르고 참 복음을 위하여 로마교 법왕 악형하에 백만 신자의 피가 흘렀다. 바디칸 궁중에 봉쇄된 성경을 개방하여 만민의 성경이 되기 위하여는 위크리프의 백골이 불에 타지고 틴달의 몸이 재가 되지 않았는가? 신학생 여러분, 제군의 읽는 성경은 피의 기록! 피의 전달이다. 신학을 말하므로 제군의 사명이 다 되는 것인가. 피로써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하시이다. 일사각오 도마는 부활의 복음을 위하여 인도도상에 피를 뿌리었소. 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복음을 위한 일사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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