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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2/천국과지옥·1

깡통을차고 빌어먹어도 지옥만은 가지마라! (제1장)|

깡통을 차고 빌어먹어도 지옥만은 가지 마라!

 

(김상호 장로)

구병리에서 태어난 김상호 장로는 '산신'을 섬기다

아랫마을 교회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됐다.

그러나 가족 중 다섯 명이 무당이었던 그는,

예수를 믿은후 1년동안 여섯 명의 자녀를 잃고 말았다.

아들의 죽음 앞에 통곡하다 기절했던 그는 우연히 음부와

하늘나라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 후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해 50년째 한 교회만

섬기는 모범 장로가 되었다.

 

1장  예수를 믿기 전

 

[구병리 마을]

병리는 19세기 중엽부터 '정감록'을 신봉하는 자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다.이곳은 한국의 '환란의 피난처' 열 곳 중의

하나이다.{정감록의 십승지 중 하 곳}.구병산 자락의 구병리

마을은 해방 이후와 6.25 전쟁 때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와서 한 때

는 큰 마을을 이루기도 했다.

해발 500m의 산중턱에 자리 잡아 물 맑고 공기 좋은 이곳은100세

이상 장수하는 이들이 많아 '장수마을'로도 유명하다. 

또한 산천이 수려해 '충북의 알프스'라고도 불리느데,충북 보은군

구병산<876m>에서 시작해 장고개를 거쳐 백두대간을 들어서서

삼학봉<861m>까지 이어지는 43.9km 구간의 능선이 유럽의 알프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이다. 여기서 구병산은 속리산과 마주보고

있어 속리산을'아비산',구병산을 '어미산'이라 부르기도한다.

 

[60세에 낳은 아들]

나의 아버지는 선생님으로, 서당에서 한문과 예법,제사법 등을

가르치셨다. 아버지는 다른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빈틈이 없었으며

엄하기로도 유명했다.그러나 그런 아버지도 정작 자식인 내게는

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지성'을 들인 끝에

환갑이 되어서야 얻은 '4대독자'였다.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얼마나 소중하겠는가?

그럼에도 아버지가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때는 '일제 강점기'였고 이러

한 '난세'에 아들이 글을 배우면'제명에 살지 못한다.'는 아버지

'자신만의 확신' 혹은 '종교적 확신'때문이었으리라.

내 비록 세상지식과 학문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아는 지식에는 소홀함이 없음을 고백할수 있다.

 

또한 모들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드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8>

그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골2:3>

 

[장가가던 날]

나는 구병리 산 속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결혼을 했다.상대는

산 위에 사는 유옥선이라는 아가씨 였다.이북 출신으로 키는

작지만 유머감각이 있고 성격이 쾌활했다. 그녀는 내가 스물한 살 때

열아홉의 나이로 시집을 왔다.동네 사람들 모두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주었고, 그날은 동네 잔치로 떠들썩했다.

내가 결혼할 당시 마을에는 약 70호 정도가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한 가정에 식구가 보통 5~6명 정도 되고,그보다

많은 집도 있었다. 우리 마을은 산간지방이라 논농사 짓기가 어려워

산에 가서 땅을 고르고 나무를 태워 불울 놓은 뒤감자나 옥수수를

심었다.거기서 난 감자를 삶고,옥수수로 죽을 끓여 끼니를 때웠다.

그때는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동네 사람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

반찬은 소금이 다였다. 쌀은 구경하려야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일제 강점기,일본이 준 고통은 이 산골 마을까지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나서 결혼하고 나서도 이 마을에 예수를 믿는 이는 한명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 쪽으로 교회에 나가는 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 같이'산제당'에 절을 하는 사람들 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행해 '구원의 손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12>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4-5>

 

[도끼로 내려친 검지]

예수를 믿기 전 나는술을 무척 좋아했다. 술 한 말을 지고 가라면

못 가도, 마시고 가라면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술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 볼 수 있다. 술을 좋아하다 보니 싸움판에는 꼭

내가 끼어있었다.

술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그것이 바로 노름

이었다.집에 있던 소 돼지를 내다파는 것은 예사고,나중에는

1주일간 노름하다 돈이 떨어져 소죽 끓이는 가마솥 까지 팔았다.

그렇게 있는 것 없는 것 다 팔고 , 마누라도 팔 수 있음 팔 지경이었다.

이렇게 나는 '도박의 영'에 혼이 빼앗겨 앞을 볼 줄 몰랐다.

나는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하는 결심으로 오른손 검지를 내리치기 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못 가 무너지고 또 노름판을 찾았다.

(이 부분은 중요한 부분이라 뒤에서 다시 다뤄볼 것이다.)

이 노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그나마 낙이고 기쁨이었다. 노름에

집중하다보면 인생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박은

'돈' 없이는 불가능했기에 나는 돈을 구하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나는 '노름을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서 모종의 결단을 내리게 됐다.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상호야!"

"왜?"

"이제 내가 결단을 내려야 돼."

"무슨 결단?"

"내 오른손 검지를 도끼로 찍어버리려고...,그래야 노름을 못 하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럼 나는 할 수 있어.이 노름 때문에 가정이 풍비박산이 날 것

같아 이제라도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자신과 진지한 대화를 마친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묵직하고

날카로운 도끼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내 오른손 검지를 내리 찍었다.

검지가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었고, 붉은피가 분수처럼

하늘로 솟구쳤다. 이제 나는 손가락 하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아내에게 남자다운 모습과 강한 결단력을 보여줄 수 있음에 내심

흐뭇하기까지 했다.

그 후로 나는 노름을 잊고 농사짓는 데만 열중했다. 그러나 어느날

깜짝 놀랄 소문을 접하게 됐다.'김상호'라는 사내가 손에 붕대를

맨 채 노름판에 다시 끼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 역시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예수를 믿고 깨달아 알게 된 사실인데,인간이 어떤 일에 대해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이룰 수 없다.

이 모두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었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