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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설교·6/장죠셉목사님

첫째 천사

http://cafe.daum.net/shalomwoosister/8qif/232

 

첫째 천사의 대환난에 관한 경고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14:6~7)

 

여기서는 천사의 메시지를 받게 되는 대상(6-7), 바벨론의 멸망(8), 짐승에게 경배와 666표(9-12), 셋은 천사들이 전하는 메시지이므로 따로 따로 상고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앞에서의 말씀대로 15장까지는 각 장마다 특별한 총론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14장에서도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시온으로 올라간 거룩한 신부들이 대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는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대환난)를 면(휴거)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계3:10)

 

이처럼 진리는 어린양의 신부들은 대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신부라 할지라도 대환난을 통과하고 주님의 지상재림 때에 휴거된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통과(通過)라는 뜻은 ‘통하여 지나간다(Pass)’입니다. 그러나 Rapture(ἁρπάζω)는 대환난에서 ‘벗어난다(out of great tribulation)’는 면제(免除)입니다. 지상재림 때라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죽임을 당한 사람은 신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휴거(携擧)’라는 단어는 죽은 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공간이동을 하는 거룩한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단어가 ‘Rapture(ἁρπάζω)’입니다.(창5:24,히11:5.왕하2:11.행8:39)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14:6)

 

본문에서 첫 번째 천사는 땅에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심판하실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합니다. 대환난은 지구상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심판(...Trial that the whole world to test those who live on the earth)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천사는 모든 나라에게 하나님을 떠나게 하였던 바벨론의 멸망을 알리는 메시지입니다. 세 번째 천사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유황불 못에서 저주가 있음과, 성도는 그것을 이기고 믿음을 지켜야 된다는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이 두 갈래 길에서 영원한 축복, 또는 영원한 저주이기에 “영원한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천사의 처음 경고는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시간이 임박하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고 그동안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하여 경고와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사상을 받아들인 인간들은 좀처럼 돌아서지 아니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천사를 사자로 삼으시고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천사는 공중으로 날아가면서 땅에 거하는 모든 인간들, 곧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들에게 전하는 경고는 영원한 축복영원한 저주라는 메시지라 합니다. 영원한 복음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해석들을 보면,

 

  ⓐ. 어떤 이는 ‘영원한 복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고 하였고,

  ⓑ. 다른 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원히 똑 같은 복음의 내용을 전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하였고,

  ⓒ. 또 다른 이는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에 앞서 아직도 부르신다.’하였고,

  ⓓ. 또 다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을 얻고 의롭게 되어 하늘나라

       에 올라가는 것은 은혜의 복음이나, 여기 천사의 복음은 그런 은혜의 복음이나 천국복

       음이 아니라 그것은 영원한 복음이므로 믿기만 하면 예수의 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복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앞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잠깐 언급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우리 교계가 이러한 해석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분명하게 밝혀야 될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거룩(Holy)’과 ‘의(Justice)’ 두 단어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합니다.

 

거룩(Holy);은 ‘꽈다디쉬(שׁי󰕑󰙏)’와 ‘하기오스(ἃϒιοs)’이므로 둘 다 ‘내재적 성품’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되라”(벧전1:15) 하였습니다. 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Peace)’과 ‘거룩(Holy)’를 쫓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한다. 하였습니다(2:14). 그러므로 자신의 속사람과 바깥사람이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과 번민 등으로 마음을 볶는 것은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성품은 자신을 사랑하지 아니하므로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항상 분쟁하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지못할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의(Justice);는 ‘쏴디큐(קי󰕑󰘽)’와 ‘디카이오스(δίκαιοs)’로 둘 다 ‘외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저[예수]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예수]의 행하신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6)”하였고,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 그러므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그럼에도 “너희가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하셨으므로 ‘의’는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의’는 그리스도 자신의 것이지 우리의 ‘의’는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를 보여주시면서 너희도 나와 같이 자신의 의를 이루어야 되기 때문에 각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서 의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은 ‘거룩함’과 ‘의’라는 결과로 얻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었으니’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성도들의 믿음을 타락시키면 안 됩니다. ‘의’에는 두 가지로 분류시켜서 생각해야 합니다. 선한일은 ‘선의’며, 악한일은 ‘악의’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보혈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으니, 도적질하고 살인하고 불륜하고 자살해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미 의롭게 되었으니 아무렇게 살아도 되지 않느냐는 잘못된 가르침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못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선한 일은 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도적질하며 나아가서는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의’를 도적질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영원한 복음을 해석하기에 어려움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는데, 우리 하나님은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 말씀으로 주시지 않으심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물으면 기꺼이 알려주십니다. 다니엘서에서 벨사살 왕이 이스라엘에서 빼앗아 온 기구들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쓰이는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자한 벨사살 왕이 그 그릇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때 촛대 맞은편 벽에 손가락으로 글이 쓰였습니다. 왕은 물론이고 갈대아 술객들과 점쟁이와 바벨론의 박사들까지 그 글이 무슨 뜻인지 해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벨사살 왕은 다니엘을 불러서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했을 때에(단5:14), 다니엘은 하나님께 구하여서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죄 된 인간의 머리와 학문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일지라도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구하면 성령은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난해구절’ 또는 ‘상징’이나 이런저런 해석으로 그것을 정당화시키면 안 됩니다.

 

영원한 복음에 관해서는 8-12절에서 설명되어있습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쓰는 날부터 누구든지 죽는 날까지가 ‘자금 이후로’ 하였습니다. 사람은 숨지는 순간부터 영원세계로 바꾸어지는데, 어떤 사람은 축복받고 영원한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666표를 받으므로 인하여 저주받고 영원한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한 갈림길에 관한 메시지이기에 영원한 복음이라 하였습니다.

 

(1)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은 짐승

     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666표도 받지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영원한 천국으로 가야되겠기에 그들에게는 ‘영원한 축복의 소식’이 됩니다.

 

(2)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고, 짐승을 경배하고 표를 받는 사람은 저주 받고 유황으로 타는 불 못에서 쉼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천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들에게는 ‘영원한 저주의 경고’가 되는 것

     입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14:7)

 

천사의 경고는 하나님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는 경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심판이라는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유황불 못의 저주’라 합니다(계14:11). 이 심판은 마지막 심판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않음과 영광을 돌리지 않음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두려움(Φοβέω)의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무감각하다 또는 마음에 두지 아니한다는 의미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세월을 두고 대환난의 비참함을 경고해 오고 있습니다. 그 비참은 창세이전이나 이후에도 없으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귓등으로 돌리고 그 환난을 피할 준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준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자기 영혼을 그날에 들림받을 수 있도록 성화를 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한번 얻은 구원은 영원하다. 구원은 믿음으로 되고 행위로 되지 않는 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는 그날에 가 봐야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던 사람들에게 반드시 입증시켜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그들이 대환난에 남겨서 스스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 대환난입니다.

 

돌림’의 반대말이 돌리지 않음입니다. ‘디도미(δίδωμι)의 명령형 능동 ’도테(δότε)는 바치지 아니하고 가로챈다는 뜻이며,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가로챈다는 뜻은 자기 것이 아인 남의 권리를 슬쩍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도적질 했다는 뜻입니다. 이 앞에 영광이란 단어가 있으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권리를 인간이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무리는 대환난에 남겨져서 스스로의 잘못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이 대환난이라는 심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