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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2/CGN큐티

[생명의 삶] 덕을 세우는 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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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
21
 
덕을 세우는 은사
[ 고린도전서 14:1 - 14:12 ]
 
[오늘의 말씀 요약]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지만, 예언은 사람에게 말해 권면하고 위로합니다. 따라서 방언은 자신을 위하고 예언은 교회를 위합니다. 교회에서 방언만 말하면 서로에게 외국인이 될 뿐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신령한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외국인(11절)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자를 말하며, 이 단어에서 ‘야만인’(barbarian)이라는 단어가 파생했다.
 

본문 해설
☞ 방언보다 예언을(14:1~5)
은사는 사랑의 관점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되, 무엇보다 사랑을 추구하라고 강조합니다. 은사 중에 특히 방언과 예언을 구체적으로 비교하며, 방언보다 예언을 더 추구하라고 조언합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며, 단지 자신만을 위한 것입니다. 반면에 예언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권면하고 위로하기에 교회 전체의 덕을 세웁니다. 바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도 소중한 은사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을 더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방언에는 통역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남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랑’이 은사 사용의 핵심입니다.

☞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14:6~12)
방언으로는 아무리 좋은 내용을 말해도 그것을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기에 선한 영향과 변화를 실제적으로 주기 어렵습니다. 언어는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을 때에 의미가 있고 순기능을 발휘합니다. 바울은 만약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알아듣게 말하지 않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특히 공 예배에서는 소통과 교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약 예배 시간에 설교자가 방언을 사용한다면, 청중은 얼마나 답답하고 소외감을 느끼겠습니까?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악기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듯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서로를 낯선 외국인으로 만들 뿐입니다. 교회에서는 소통이 가능한 말로 풍성한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방언보다 예언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나의 은사를 어디서, 어떻게,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좋을까요?
● 묵상 질문
상대방이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요?
● 적용 질문
친밀하게 교제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성도들은 무엇을 사모하고 구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저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신 무조건적인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무뎌진 신앙생활 속에서 죄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을 주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온 교회가 하나 되게 하소서.